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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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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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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종합
2. 최초의 자력 통일3. 단일 국가관 정착4. 고구려 계승5. 무장(武將)의 나라
5.1. 무신 차별과 무장(武將)들의 정변
6. 한국사 발전7. 다른 한민족 왕조들과의 비교

1. 개요

중세 고려 왕조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에 대하여 다룬다.

1.1. 종합

고려 전기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거란족)와 송나라의 세력 균형 체제라는 국제적인 정세 속에서 고려는 요나라의 3차에 걸친 대규모 침략막아내며 훗날 요송과 더불어 균형적인 삼강 체제를 이룰 만큼 국력과 위세를 뽐내며 120여 년간의 황금기를 보내게 된다. 그러다가 중기에 들어서며 내부적으론 문벌귀족이 들어서고 외부적으론 요와 북송을 차례로 쓰러트린 금나라(여진족)가 금이 고려에 칭신을 요구하자 책봉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전에 고려가 여진족들에게 조공받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 이후 몽골 제국과 30년간의 기나긴 전쟁 끝에 결국 입조하여 원의 제후국이 된다.

다만 남송을 포함한 유라시아의 여러 국가가 몽골 제국에 쓸려나가는 동안 고려는 비록 조정은 강화도에서 무능한 모습을 보였지만 지방 정규군과 백성이 끈질기게 저항한다. 몽골군 초기 침입군의 총사령관은 한국인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살리타이인데, 이 사람은 무칼리가 이끌던 잘라이르부 출신으로 이 부족은 당시 최강대국이자 몽골족 최대의 원수 금나라와 여러 차례 정면으로 충돌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스님인 김윤후에게 죽었다고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지만 살리타이 본인도 금나라와의 전면전에 참전한 역전의 용사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리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철저한 능력주의 사회였던 초기 몽골에서 능력이 없었으면 그 정도 지위까지 가지도 못했을 테고. 이후에는 원정 병력의 정예도가 좀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쿠빌라이 칸이 고려에 "아직 몽골에 항복하지 않은 나라는 남송과 너희 나라(고려)뿐이다."라고 한 적도 있다는 걸 보면 전쟁 후반부에도 몽골 수뇌부는 베트남 쩐흥다오를 포함하여 고려가 끈질기게 저항하는 세력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쿠빌라이 칸은 남송정복전쟁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전과 기록을 보면 저항이었는지 아니면 무신정권의 방치 속에서 일어난 일방적인 초토화였는지 논란이 많다.

쿠빌라이의 해당 발언 또한 당시 쿠빌라이는 아직 황제 자리에 오르기도 전이었고, 대칸의 자리를 두고 아리크부카와 계승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몽골 귀족들은 아리크부카를 후계자로 밀고 있었다. 몽골인들은 막내에게 자기 재산을 물려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아리크부카는 몽골 본토를 다스릴 수 있었고, 전임자였던 몽케 칸은 공공연히 자기 후계자로 아리크부카를 찍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비몽골족 출신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한화정책을 추진한 이면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 길에서 만난 외국의 사신이, 그것도 외국의 태자가 자신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것은 곧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할 수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쿠빌라이로서는 기뻐하는 게 당연했다. 한마디로 쿠빌라이의 저 말은 고려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거나 우대해서 나온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해주는 고려 태자에 대한 기특함에서 나온 거창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당시 고려는 적절한 외교술을 벌인 것으로 평가받는데 '역사저널 그날 -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 고려의 운명을 바꾸다.' 편이 그러하다. 하지만 여몽전쟁 당시 고려가 정말로 제대로 된 외교를 했는지는 비판하는 의견 또한 많다. 임용한 교수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이 당시 고려 조정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몽전쟁/평가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문서를 참조.

결과적으로 고려가 비록 큰 피해는 봤지만, 나라의 멸망은 피하였다. 이후 몽골제국에 신속하여 속국·속령이 되었다. 원 간섭기 고려와 몽골의 종속 관계를 두고, 독립국으로 유지되는 한편 몽골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하게 받은 이중적인 현상 때문에 당시 고려의 위상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여몽관계를 전통적 한중관계의 연장 선상에서 파악하는 '조공책봉관계론'이 있으며, 김호동과 모리히라 마사히코는 몽골제국의 구조 속에서 위치를 파악하여 각각 대몽골 울루스의 외연적 속국·카안 울루스의 내포적 속령으로 규정하거나 '투하령(고려왕부)'으로서 재래왕조체제가 유지되긴 했으나 그 강역 자체를 고려국왕이 배타적으로 점유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만 모리히라 마사히코의 견해는 학계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많다. 한편 샤오지칭(蕭啓慶)은 당대 고려의 지위가 근대 식민제도 중 간접통치하에 놓인 보호국에 준한다고 해석하기도 했다.(蕭啓慶(1983), <元麗關係中的王室婚姻与强權政治>, 《元代史新探》.)

이후 고려 후기 이 쇠퇴하자 공민왕반원정책을 펼치면서 기존의 몽골-고려의 종속적인 지배 구조를 재편했다. 당시 몽골인들은 옛 송나라 영토나 서쪽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등으로 이주의 눈을 돌려서 위구르계 장씨 정도 등을 빼면 생각보다 고려에 귀화한 몽골인은 수가 많이 적었다.

공민왕 이후 제대로 된 독립국으로 회귀한 뒤에도 공민왕의 개혁 실패와 시해, 권신 이인임의 전횡, 홍건적왜구의 대규모 침공 등으로 내우외환이 이어지다가 제2차 요동정벌 당시 원정군 사령관으로 보냈던 장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원정군 병력으로 개경을 함락하고 최영우왕을 몰아내면서 사실상 실세의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왕실이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했으며 1392년에 이성계 본인이 국왕에 등극하면서 왕씨 왕조는 멸망을 맞이했고 고려로 남아있던 국호도 1393년에 조선으로 바뀌었다.

국호인 고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이념을 실천하여 초기부터 거란에 강경책을 구사하는 등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존속기간 내내 국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라는 사실이 무색하지 않게 요나라와의 총력전을 마다치 않고 고구려의 옛 판도를 회복하고자 여진 정벌, 요동 정벌 등을 과감히 단행하였다. 하지만 애초에 무신들을 차별대우하며 문신들을 우대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무신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도 많이 일어났고, 국가 역시 무신정변 이후로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참고로 고려는 초기 때부터 문신들을 우대하고 무신들을 반대로 차별하는 일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고려 최고의 명군으로 알려진 현종 시절 당시 일어났던 김훈·최질의 난이었다. 거란과의 2차 전쟁 이후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던 중에 일어난 원조 무신정변으로 일컬어지는 김훈·최질의 난은 현종의 가장 큰 실책이라 보는 시각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무관. 즉, 경군의 영업전을 뺏어서 문관들의 녹봉을 충당하려고 했던 중추원의 일직 황보유의와 중추원사 장연우[1] 등 문관들의 주청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해도 결과적으로 문제 있는 정책을 택했고, 무신들의 영업전을 죄다 문신들의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행태를 4년 동안이나 관망한 현종 본인의 실책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2]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여러 논쟁들 또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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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무리 나라가 어렵다지만 목숨을 바쳐 싸운 무관들의 재산만 빼앗은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

우선 영업전의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영업전은 국가에서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 즉 세금을 수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 수조권의 행사는 면조 (세금 면제) 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원래라면 무관도 고려의 백성인 이상 세금을 내야 했으나 직역의 대가로 수조권을 받아 그에 해당하는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큰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나라 안의 살림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자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 토지들의 조사를 실시하여 면조를 해제한 것이 바로 영업전의 환수이다.[3] 개혁의 대상에는 영업전 뿐만 아니라 30결 이상의 양반전과 궁원전이 포함됐으며, 이로 보건대 재정의 부족분을 문무양반과 왕실이 모두 나누어 부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감찬 등으로 대표되는 문관들 역시 이 개혁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가지 간과된 부분이 존재한다. 영업전의 박탈이라고 표현했지만 토지 그 자체를 빼앗기보다는 영업전의 소출을 문신들의 녹봉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백관의 녹봉은 民田에서 거두는데, 경술년(1010, 현종 1)에 거란의 침입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군비가 증액되어 녹봉이 부족해졌으니 경군의 영업전으로 충당하자는 것이 황보유의의 의견이었다. 영업전이 民田과 동일한 국가수조지였다면 녹봉으로 사용해도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영업전은 군인에게 복무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토지였다. 따라서 영업전을 백관의 녹봉을 위한 재원으로 사용하게 되면 군인의 보수가 박탈당하게 되고 영업전이 군인들의 생계와 직결되는 중요한 경제적 기반임을 생각해보자면 이는 군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는 행동이었다.[4] 무엇보다 무신들을 제외한 문신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녹봉을 무신들의 영업전을 빼앗아서 충당하였기 때문에 무신들과 문신들이 공평하게 고통을 분담한것도 아니었다.[5] 심지어 영업전의 박탈은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측면 또한 컸었는데 무기와 군량, 기타 군수품 등을 모두 영업전을 통해서 개인이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구조상 영업전의 박탈은 국방력의 약화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즉, 황보유의가 단행한 무신들의 영업전 박탈 조치는 오히려 군액 증가가 아닌 군액 축소 조치로 해석[6] 될 수 있다라는 것이다.


(2) '영업전을 강탈해 가면 생계를 장담할 수 없는데 무관들은 전부 굶어 죽으라는 말이냐'라는 주장

영업전의 회수가 전쟁을 직접 수행하고 있는 군인층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사안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무관들의 경제적 파산상태를 뜻한다고 보는 것은 매우 심각한 과장이다. -고려전기의 무반과 군반 (The Military Nobility and Gunban(軍班) of the Early Goryeo Period)- 연구에 따르면, 고려 전기 사회에서 무반 (경군・내군) 은 양반 관료의 일원으로서 국가와 정권의 존립을 보장하는 무력적 기반이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무반들에게 직역의 대가로 전시과와 녹봉을 지급하였는데 무반에게 지급된 전시과는 전체 토지의 83%에 달하였고, 또 무반에게 지급된 녹봉은 전체 녹봉의 80%에 달하였다. 개혁의 조치로 일부 영업전을 회수했다 하여 무관들이 생계유지 불능상태에 놓인다는 것도 난센스일뿐더러, 원래 경군영업전의 성격 자체가 오직 직역을 승계할 때만 상속이 가능했던 토지로서 직역자가 사망하면 상속분을 국가에서 환수 조치하여 직역을 승계한 아들에게 다시 분급해 주는 시스템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무반들의 불만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영업전을 기타 토지와 더불어 개혁 대상에 포함시킨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제도가 기존에는 상당히 문란하게 운용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국가 입장에서는 추후 조처에 대한 마련과 별도로 당장 국난의 극복을 위해 특정 집단이 일종의 특혜처럼 영유했던 면세지를 정리하여 재정에 충당해야 할 당위가 있었다.

하지만 황보유의 등이 단행한 영업전의 박탈조치는 회수가 아닌 엄연한 녹봉 박탈이었다. 영업전(전시과)은 국가에서 관직과 직역에 복무하는 사람에게 그 대가로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였다. 토지를 매개로 한 관직과 직역의 수행이 지속되도록 운영하는 것이 특징으로 관직과 직역이 계속 수행되고 있고 또한 직역을 승계하였다면 영업전을 승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였다.[7] 하지만 황보유의 등은 직역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던 현직 무신들의 영업전(더 정확히는 영업전의 소출)을 아무 대책도 없이 모두 박탈하였다. 심지어 그렇게 박탈한 무신들의 영업전을 백관(문관)들의 녹봉으로 충당하는 짓을 저질렀다. 즉, 무신들의 영업전을 합당한 이유없이 자신(문관)들의 녹봉으로 빼앗아간 것이다.

또한 무신들에게 지급된 전시과와 녹봉이 과연 80% 이상에 달하는 만큼 과대하였는지도 논란이 크다.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고려시대 4만 5천 명에 달하는 중앙군의 군인전만해도 무려 90만 결이나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고려시대 전국의 농경지 총면적은 약 80만 결에 불과했으며[8] 또한 이런 기록들에 따르면 고려시대 군인들은 병종에 따라 20결∼25결을 차등있게 지급받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만약 이 규정대로 군인들이 군인전을 지급받았다면 고려의 군인들은 매우 윤택한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군인전은 어느 경우에서나 적어도 20결 이상이었는데, 이 액수는 중앙의 하급 문무관료들의 전시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다액의 전지가 군인들에게 모두 지급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만일 규정된 전결수를 그대로 지급할 경우, 고려의 경군 조직인 2군 6위의 45領을 기준으로, 그 전체 병력은 4만 5천 명이 되므로, 군인에게만 100만 결 정도의 토지가 지급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고려 초기 전국의 총 전결수와 비등한 면적이 된다. 따라서 이렇게 막대한 양의 토지가 군인들에게 모두 지급되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러한 점은 전시과의 군인전 지급 규정에 의문을 품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군인전 지급 규정 자체는 인정하지만 국가가 군인들에게 지급하기로 한 규정상의 액수는 급전액(給田額)의 상한선을 나타낸 것이거나 혹은 규정은 있으되 실시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군인들은 규정액에 훨씬 미달되는 전토만을 보유하여 빈궁한 생활을 면치 못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9]


(3) '어찌 됐든 무관들의 불만을 다스리지 못해 반란이 일어났으니 현종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주장

현재 다수의 연구자들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근본적인 배경에 대하여 무관들이 문관직을 겸대하려는 욕구의 실현을 위해 이계 관료들과 정치경제적 지분을 놓고 벌인 주도권 다툼으로 이해하고 있다.[10] 그러나 현종을 옹립하고, 호종하고, 혁신을 이끌어 나가던 이계 관료들의 입장에서 무관들의 문관 겸대를 허용하게 될 경우, 이들의 정치적 입지는 절대적으로 위축될뿐더러 그간 착수해오던 개혁 작업 역시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무관 세력의 성장은 곧 진급 상의 직접적인 불이익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현종 대의 여러 업적은 바로 이계 관료가 주축이 되는 근왕적 관료정치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한 이계 관료 대부분은 토착 기반이 비교적 미약하고 중앙 관직을 통해 진출하였으므로 관직 복무에 따른 경제 급부인 녹봉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문무관의 겸대 차단이나 녹봉 확보의 문제는 이계 관료들에게 있어 보다 절실한 현실적 문제였으며, 나아가 관료제 국가에서 백관에게 지급할 녹봉이 부족해졌다는 것은 곧 국가 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위태로운 실태에 우선하여 현종은 그 자신이 강조의 군사 쿠데타로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용맹하게 싸운 군인에 대해 관직을 매개 삼아 충분한 보상을 하였다. 당장 최질만 하더라도 전장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단 몇 년 사이에 중랑장에서 상장군으로 승진하였고 김훈의 경우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하지만 다수의 연구자들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근본적인 배경에 대하여 단순히 무관들이 문관직을 겸대하려는 욕구의 실현이라고만 보는 것은 아니다. 많은 학자들이 분명히 영업전 박탈이라는 경제적 요인 또한 정변의 가장 중요한 원인들중 하나였음을 지적[11]하고 있으며 당시 무관들의 문관직 겸대 요구 또한 막상 현종 이전까지 무관들이 문관직을 겸임하던게 관행[12]이었으며 오히려 이계 관료들이 무신들을 정책적으로 강하게 견제(억무정책)하면서 무신들의 처우가 그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더 열악해진것이 정변의 주요 발생 이유라고 지적[13]하고 있다. 즉, 반란이 일어나 직접적인 원인은 전체적으로 봤을때 군인들에 대한 대우 문제였다라는 것이다.[14]

애초에 관료제 국가에서 백관에게 지급할 녹봉이 부족해졌다는 것이 곧 국가 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라면 역으로 언제 거란이 다시 침공해올지 모르는 전시상황에서 군인들에게 줄 녹봉(영업전)을 모두 빼앗아간것 또한 국가 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계(吏系) 관료들인 장연우와 황보유의 그리고 고위직 무신들인 김훈과 최질은 모두 현종이 직접 임명하고 중용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인물들끼리 서로 무력으로 충돌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었다는것은 현종이 그들을 임명하고 중용한 최고국정운영자인 이상 현종에게 분명 책임이 존재한다라는 뜻이다. 그 당시 최고임명권자인 현종은 훗날의 고려의 고종처럼 아무런 실권이 전혀 없는 허수아비나 꼭두각시 군주가 아니었으므로 그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라는 주장은 오히려 여러 측면에서 봤을때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사건에서 현종의 책임이 아예 전무하다라는 주장은 그 당시의 실체적 사실 관계와는 다소 동떨어진 주관적 해석에 기인한 것으로, 어쨌든 반란이 일어난것에 대한 최고인사권자인 현종의 실책은 분명 존재한다고 보여진다. 다만, 사료와 논문을 토대로 자세한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리 건성건성 간단하게 묻고 갈 만한 사안이 결코 아님을 또한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현종이 이 사태를 빠르게 수습했다는 측면에서 그의 사후대처 능력이 분명 뛰어났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원작자인 길승수 작가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김훈·최질의 난을 두고 '김훈과 최질이 떼를 썼으며, 떼를 과하게 쓰다가 결국 자신들의 몸을 망치게 된 것이다'라고 코멘트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자림[15]의 계책을 따라서 무신들을 모두 서경장락궁에 초청해서 연회를 베푼 사이 반란 주동자인 김훈, 최질 등 술에 취한 장군 19명을 모조리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항복시키는 방식으로 반란 세력들을 단기간에 제압하고 이후 무신들의 처우도 다시 조절하면서 비교적 단기간에 안정적인 정국을 되찾았다는 점은 사태를 빠르게 수습했다는 면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 할 만하다. 이는 이후 군사반란을 당한 군주들과 비교하면 명확히 대비되는 부분인 게 현종처럼 무신정변을 당한 고려 의종은 반격에 실패하여 폐위된 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조선의 인조는 이괄의 난을 진압하기는 했으나 도성이 함락되고 반란세력이 새로운 국왕을 옹립하는 등 이괄의 난이 성공할 뻔했으며, 관군이 진압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패배한 이괄의 잔당들이 후금으로 투항해서 정묘호란을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조선의 고종 때 일어난 임오군란은 중앙군이 대부분 반란에 가담하는 바람에 외세였던 청나라를 끌어들여 반란을 진압해야 했고 결국 청나라에 간섭을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즉 군사반란을 깔끔하게 수습한 건 현종이 유일하다. 더 자세한 건 김훈·최질의 난 문서를 참조.

고려시대는 종교적으로는 삼국시대~남북국시대를 통해 이어지고 번영하던 불교 문화가 더욱 크게 발달했다. 고려의 문물이나 문화 자체가 한반도의 전통문화와 현대 대한민국 국민의 가치관에 끼친 직접적인 영향은 비교적 가까운 조선 시대에 비해서는 적다고 생각하곤 하지만,[16] 결국, 거슬러가면 각종 학설이나 의례와 같은 기반은 사실상 고려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불교 신자들의 수가 전체 인구 중에 20%가 넘으니, 위와 같이 여러가지를 고려하면 영향력이 적다고도 할 수 없겠다. 또한, 한국인들에게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유교, 개중에서도 핵심인 성리학안향에 의해 고려 중기 때 도입된 사상이며, 한국이란 국가의 기초적인 구조 또한 고려 시대에 총체적으로 정리를 거치며 상당히 고정적인 틀을 갖출 정도로 형성되었던 것이 조선시대 및 그 이후까지 모두 천 년이 넘게 수많은 변천을 거치며 이어져 온 것에 해당하므로[17] 이 또한 고려 시대에 쌓아올린 정치, 사회, 문화의 유산이 먼 후세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증명해주는 예로 볼 수 있겠다.

고려라는 이름은 대기업이나 유명 제품으로는 고려인삼, 고려은단, 고려아연이나 자영업으로는 전국의 그 수많은 고려 삼계탕을 비롯한 대한민국에서 명실상부 백제, 신라, 조선과 함께 기업체나 가게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국명이다. 고려대학교, 북한의 고려항공고려호텔 역시 유명하다. 이것은 고려가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일명 '고려청자'라고 불리는 고려 시대 상감청자는 지금도 제작하는 도공들이 있으며 대한민국의 대표 공예 장식품 중 하나로 대접받고 있다.

2. 최초의 자력 통일

고려는 중국 세력을 끌어들인 신라와 달리 외세의 개입 없이 자력으로 통일을 이루어냈다. 순수하게 한국사 토착 세력들이 본인들의 힘만으로 이룬 통일이여서 고려 왕조는 한국사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신라는 엄연히 발해라는 한국사 국가의 존재 때문에 완전한 통일을 이룬 것도 아니다. 실제로 신라의 불완전 통일 이후의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지칭한다는 점은 통일신라와 비교해서 고려의 통일에 보다 정통성을 부여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18]

물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외세를 끌어들인 걸 무조건 폄하할 일은 아니다. 애초에 외세를 신라보다 먼저 불러온 게 백제다. 백제는 이미 6세기부터 수나라를 불러들여 고구려와의 싸움에 견제하려다 실패했고, 5세기에는 개로왕이 남조의 유송에 원병을 요청한 적이 있다. 오히려 신라는 7세기 중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신라는 지형적 리스크와 위축된 국력을 타개하기 위해 외세와 동맹을 맺은 것도 엄연한 전략이자 외교술의 산물이며 당대 삼국이 서로 으르렁대는 적국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그 부작용으로 신라는 당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아야 했고, 두 나라를 무너뜨린 뒤에도 한 차례 대규모 전쟁을 치른 후에야 겨우 당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이후에도 이전 삼국의 터줏대감 세력들을 혼자의 힘만으로는 완전히 찍어누르기 힘들어 이들은 후삼국시대에 유민의식을 여전히 갖고 호족세력으로 발흥하게 된다. 게다가 신라의 통일 당위성에 대한 의문은 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19]

반면, 왕건의 고려는 한국사 최초로 '완전한 자력 통일을 성취한 나라'가 되었다. 고려는 신라와 달리 외세와 손을 잡을 의지가 없었고 국제정세상 손 잡을 세력조차 없었다.[20] 게다가 당시 국제정세도 한반도 주변 세력들이 모두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여력이 없어서 고려에 비교적 수월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반도와 지정학적으로 밀접한 당나라후삼국에 버금가는 난세에 처해 있었고, 만주는 멸망 직전의 발해가 요나라에 맞서 힘겨운 항전 중이었으며, 해양 세력인 일본도 헤이안 시대 들어 천황 권력의 약화와 견당사 파견 중단 등에다가 내부의 권력 갈등으로 말미암은 고립주의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이런 고려보다 후백제는 외교에 꽤 공을 들였다. 후백제는 거란, 일본과 힘을 합쳐 삼면에서 고려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그러나 위와 같이 후백제에 도움을 줄만한 세력들이 제앞가림하기도 바빴기 때문에 의미 있는 외교적 협력을 받지 못했다. 일본에 보낸 사신은 문전박대당했고 거란에 보낸 사신단은 항해 중 풍랑에 몰살당했다.

3. 단일 국가관 정착

고려는 한민족으로서의 의식적인 통합을 이루고 단일한 국가관을 정착시켰다. 현재 대한민국북한까지 이어지는 한민족이라는 의식은 이때부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한국사에서 고려의 통일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높다. 고려 이전 신라삼국통일의 결과는 남북국시대가 되었으며, 그나마도 신라 내의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의식까지 통합해내진 못했다.

신라 조정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흡수하기는 했으나 그들을 '신라인'으로 만드는 데는 소홀했다. 물론 신라가 유독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특별히 박해했던 건 아니었는데 나름대로 삼한일통 사상을 주입하기도 했고, 지방민 차별이라는 것도 통일 이전 기존 신라인들에게도 적용되었던 골품제를 비롯한 여러 신분제와 차등 대우들을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에게 기존 신라인들보다 더 큰 박탈감을 주었다. 이런 박탈감 때문에 신라가 쇠약해질 때까지 200여 년의 시간이 지날 동안 통일신라 백성의 통합된 국가관이 생성되지 못했고, 결국 시간이 지나 신라 정부의 통치력이 약해지자 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는 중국 최초 통일왕조 진나라가 통일 후 겪은 부작용 및 재분열 이유와 비슷했다. 진나라 역시 통일 이전 전국시대 진나라 때부터 늘 하던 대로 통일 후에도 전국에 엄격한 법가적 통치를 적용했던 거였으나, 원 진나라 영토의 백성과 달리 통일로 새로 얻은 나머지 6국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전통과 맞지 않은 법가적 통치에 반발심이 있었고 진나라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진나라의 법치든 신라의 골품제든 기존의 사회 제도 내에서 나름의 기득권을 축적해 온 기존의 신라인/진나라인들에 비해 피정복민으로써 새로 이 사회에 편입된 백제인/고구려인 및 육국인들에게는 그 제도를 그대로 적용한 것 자체가 일종의 차별로 작용했던 것이다.

정복국 처지에서는 새로 편입한 영토와 백성을 통제하기 위해 당연히 요충지에 지방관을 파견해야 하고, 당장 직전까지 전쟁하던 피정복국 귀족들에게는 반란의 위험성 때문에 보좌나 바지사장이나 낮은 자리 정도면 모를까 요직을 주진 않는다. 그렇다 해도 귀족 대우를 거진 박탈하는 지경까진 잘 가지 않는다. 전후에 인구 증가 및 개발로 인해 증설되는 지방행정단위에 기존 기득권층인 중앙귀족만 쑤셔박으면, 기존 백제, 고구려 지배층의 유민일 수밖에 없는 호족들은 아예 그냥 국정 자체에 참여하지 말란 얘기밖엔 안 된다. 고려가 통일하면서 새로운 기득권층이 된 패서호족들은 어디 신라 진골처럼 하고 싶은 유혹이 없었겠는가? 그렇게 하면 지방반란으로 인한 망국 외엔 길이 없는 걸 아니까 못했던 거였다. 이런 식으로 피지배국의 옛 유력자 출신들의 역량이 전후복구 등 때문에 성장하는 것에 비해 차별이 존재해 파이는 모자란 상황에서 기후 등의 문제로 기근이라도 들어 맬서스 트랩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불안한 정국이 발생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 완성되는데, 결국 그걸 고치거나 방지하는 걸 끝끝내 막아버린 것에서 신라 진골층의 어리석음은 변명할 길이 없다.

이는 단순한 어리석음이 아니라 그만큼 신라 귀족 집단이 피지배층은 물론이고 타 삼국의 지배층들에 대한 동질감마저도 낮았을 만큼 배타적인 집단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신라는 삼국시대 삼국 중에서도 유독 지배층의 배타성이 짙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에 있었다. 물론 신라 왕실도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마련했지만[21], 혜공왕이 피살된 후에 이 아슬아슬한 균형은 심지어 6두품까지 배제하게 된 진골의 독점으로 급격히 추가 기울게 된다.

그래도 무열왕계가 왕위를 계승하던 신라 중대에는 경덕왕의 사례처럼 구 백제 지역을 특별히 신경 썼지만, 무열왕계가 어째서 그렇게도 옛 백제 지역을 신경 쓰고 우대했는지 그 문제의식을 이해하지 못한 원성왕계는 직접 지배 제체가 그래도 잘 돌아가는 옛 백제 지역에는 거의 잘 신경 쓰지 않은 것 같고, 엉뚱하게도 정작 신라 왕실에게 별 악감정은 없었던 패서 지역에 의혹을 품고 경계했다.[22] 또한 그전 눌지계 신라 왕실과 습보계(=무열왕계) 신라 왕실은 대백제전, 대고구려전, 나당전쟁에서의 잦은, 그리고 궁극적인 승리로 얻은 큰 권위를 통해 진골들을 다소 강압적으로 다루면서 필요한 개혁은 어떻게든 하거나 해보려 했던 반면, 아무래도 그런 권위는 없었던 원성왕계는 진골들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어 급진적 개혁은 불가한 상태였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이다.

반면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자처하면서 발해의 유민들도 흡수하는 데 성공했으며 신라의 삼한일통 의식도 이어받았고, 그에 따라 고려시대에는 신화와 역사의식의 개변이 이루어졌다.[23] 패서 지역 기반 성인인 단군, 기자, 동명성왕[24]은 삼국 이전부터 한민족의 시조였던 것으로 격상되었다.[25] 단군과 기자[26]가 통치한 고조선은 삼한에 건립된 최초의 국가이자 시조국으로 공인되었고,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은 부벽루, 동명왕편 등 고려시대의 각종 문학 작품에 등장하였다. 이런 의식 개변 덕분에 마침내 한민족들이 단일 공동체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었다.

4. 고구려 계승

신라구층탑을 만들어 일통지업을 달성했으니, 지금 개경에 칠층탑을, 서경구층탑을 만들 것이다.
그 현공을 빌려 군추를 없애 삼한(三韓)을 일가(一家)로 모으려 하니 경은 날 위해 소를 지어달라.
- 고려사 최응 열전 중 발췌.
..."최근 서경(西京)을 세우는 것을 끝내고 백성(民)을 옮겨 그 곳을 채우니, 이는 지력(地力)을 빌려 삼한(三韓)을 평정하고 그 곳에 도읍하려 함이었다"...
- 고려사 태조 세가 재위 15년(925년) 5월 중 발췌.
이제현이 찬하여 말하길: "충선왕께서 늘 이르셨다: '...(생략)... 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신 후, 김부가 아직 방문하지 않고 견훤이 아직 잡히지 않았는데, 자주 서도(西都)에 행차하시어 북방을 친히 순시하시니, 그 뜻은 동명구양(東明舊壤)[27]을 오가청모(吾家靑氈)[28]로 여기시어 반드시 석권하시려 함이었다. 을 다루고 오리를 잡는데에 멈추려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29]...(생략)...
- 고려사 태조 세가 논평 중 발췌.
'여진은 본래 구고려(勾高麗)의 부락으로, 개마산 동쪽에 모여 살았다. 세세토록 공물을 바치고 직위를 받으니, 우리 조종의 은택을 깊이 입었다.'

...(중략)...

'이 땅은 본디 구고려(勾高麗)가 소유하고 있었다. 옛 비석의 글귀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하여 구고려가 전에 잃은 것을 금상이 후에 얻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 고려사 윤관 열전 中.
(생략) 태종(太宗)이 만국(萬國)을 신하로 만들어 천하를 지배하려하니 장군(將軍)에게 장수들을 통제하게 해 우리 고려(我高麗)를 침범했소. 장군은 불행히도 이겨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우리나라(我國)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생략)
-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8권 제소정방장군문 중 발췌.[30]

고려의 국가 정체성에서 고구려 계승 의식은 매우 중요했다. 국호부터 장수왕 이래 고구려의 국명이었던 고려를 그대로 이어서 썼고,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의 본기에 고구려를 포함시켰으며, 잊혀질 뻔했던 동명성왕을 국조로 공인해[31] 국가적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고려의 지배층은 민족적으로도 스스로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신라와 달리, 고려는 왕건을 포함한 개국 세력부터가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패서 출신이었기 때문이다.[32]

하지만 고려의 계승의식은 꽤 복합적이어서 삼국 중 단 하나만을 배타적으로 계승했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다. 일단 고려 중기에 편찬된 관찬사서인 삼국사기에서는, 옛 삼국은 동등했고, 그 중 신라가 삼국을 처음으로 통일하였으나 나중에 그 신라를 흡수한 고려가 진정한 정통 왕조라는 식의 관념이 드러난다. 삼국 역대 임금 모두를 '본기'에 넣었다는 점에서 그 부분은 분명해진다.[33] 즉 백제와 신라도 고구려와 동등한 위치에 둔 것이다. 이는 고려 초기에 비해 중후기에 이르러서는 삼한일통 의식이 고구려 계승 의식만큼이나 강성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고구려 계승 의식과 삼한 일통 의식의 대립설에 대해 정작 고려 당대에는 그걸로 구체적인 파당이나 학파를 이루거나 했던 흔적은 전혀 없다.[34] 즉 고구려 계승 의식과 삼한 일통 의식은 모순없이 함께 계승되어 왔을 개연성이 큰데 그렇다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왕조가 중심이 되어 삼한일통에 성공해 삼국 모두를 계승하는 데까지도 성공했다는 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고려의 통일과정을 보면 태조 왕건은 경순왕에게 선양 형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게 아니라 태봉의 군주 궁예역성혁명으로 몰아내서 고려 왕이 된 뒤 어디까지나 항복 형식으로 신라라는 외국을 귀부 받는 형식을 취했고[35] 그런 이유로 경순왕은 고려 왕조에게는 전혀 정통성에 위협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궁예가 다시 세운 고(구)려 왕위는 보장왕의 그 고(구)려 왕위를 다시 세운 것이었지 신라 왕에게는 빚지는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36] 그러므로 경순왕은 신라의 별칭에 해당하는 낙랑왕이라는 작위까지 받아 군왕(郡王) 대우까지 받게 되는데 이는 '신라국'은 고려가 접수했지만 신라왕위는 그대로 보전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려 왕실이 '신라왕'이라는 자리를 계승하는 것에서 정통성을 찾았거나 탐낼 일이 전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37][38] 이는 고려 왕조가 신라의 삼한일통 계승이 아닌 고려의 삼한일통만을 진정한 통합으로 보고 그 자체에서 정통성을 찾는 독자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면서 시작하였고[39] 그 후에 백제와 신라까지 모두 포섭하여 삼한일통에도 성공하였다는 식으로 보면 고구려 계승의식과 삼한일통의식은 서로 크게 모순될 게 없게 되는 것이다.[40] 물론 고려 왕조가 백제와 신라 또한 본기로 넣어 정통으로 대우해준 건 비록 고려인이 중심이 되어 통일왕조 성립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절대 백제인과 신라인을 소외하거나 차별하진 않겠다는 강력한 포용의지의 표명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도 고려 왕조는 다양한 출신의 호족들을 포용하는 데 성공했으니 괜히 고려 왕조가 고구려 계승 외의 삼한일통이란 업적에서도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게 아니었던 것.[41]

결국, 이런 배경이 삼국 중에서도 고구려가 분명 좀 더 특별한 위치에 있게 된 이유였던 걸로 보인다. 관찬사서에서는 명목상 차등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와중에도 고구려에 대한 배타적인 계승의식 또한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고려 시대에 동명성왕은 백제나 신라의 시조와는 달리 고려의 시조로서 더 특별한 위치에 있을 수 있었다.[42] 특정한 나라에 치우치지 않고 삼국을 그나마 대등하게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는데 이는 조선이 삼국 중 하나가 아니라 고조선이라는 대과거에서 나라 이름을 가져오면서 삼국을 초월한 정체성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조선 왕조조차도 역대 한국계 왕조의 시조 및 주요 군주들을 모신 팔전(八殿) 중 고구려와 백제에는 하나씩만 할당한 반면 신라에는 세 곳이나 할당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대에는 삼국에 대한 균등한 계승의식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43][44] 이렇게 본다면 통일신라, 고려, 조선 모두 각자의 이유로 계승 인식 내 나라 간 차등을 두었고 가장 삼한 계승을 균등히 한 국가는 국호를 삼한을 계승한 대한으로 하고 교과서에서도 균등하게 분량을 배분하는 현대 대한민국이라 할 수 있다.[45]

참고로 단군은 조선 대에 들어 단순히 한 국가의 시조나 성인이 아닌 한반도 전 역사의 시조이자 근원으로 떠받들어졌기에 삼국의 시조들과는 달리 전국적으로 숭배되기 시작해 원래 단군 신화와 관련이 깊었던 구월산삼성사 외에도 신화와 전혀 관련없는 남부 지방인 하동군 청학동에도 삼성궁이 세워지고 환인, 환웅과 함께 모셔지는 등 격이 다른 엄청난 특별 대우를 받았으며 강화도참성단 또한 단군과 관련된 유적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팔전 중에서 가장 높은 대우를 받았던 건 조선의 직계 부모 국가라 할 수 있는 고려의 사당으로 고려 왕조의 사당인 숭의전에는 가장 많은 군주가 배향되었다.
북원(北元) 요양성(遼陽省)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우승(右丞) 왕카라부카(王哈刺不花)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우리 나라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가 있지나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
- 고려사의 공민왕 대 기록. 요동을 고토로 보던 당시 고려 조정의 인식은 물론 그걸 당대의 상식처럼 알고 있던 원나라 변방무장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고려는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와 영토를 계승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다. 고려는 고구려의 고토였던 한반도 북부와 요동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꾸준히 주장했으며 이를 수복하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도 끊임없이 병행되었다. 역사적으로 예종의 여진 정벌이나 공민왕의 요동 정벌을 비롯해 내외적으로 어려운 여건에서도 수 차례나 북방원정이 추진되었다. 고려는 영토 수복에 대한 근거로 자국이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대외적으로 강력히 주장했다. 요나라의 1차 침공에서는 이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런 고려의 노력 덕분에 고려는 당대에 국제적으로도 고구려의 적자로서 인정받았다. 고려의 주적이었던 요나라는 물론이고 고려와 긴장 관계에 있었던 금나라도 고려를 고구려의 후손으로 보았다. 이는 고려사 문종 세가 11년 3월조에 있는 요흥종의 고려 문종에 대한 책봉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요나라는 국서에서 문종을 언급할 때 '주몽(朱蒙)의 후사', '일중유자(日中有子)[46]'라고 불렀으며, 고려 숙종을 언급할 때 삼한(三韓), 오부(五部)[47]의 주인으로 불렸다

몽골 제국은 그냥 고려를 고구려와 같은 나라로 보았다.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이 고려가 항복 사절단을 보내왔을 때 당태종도 무너뜨리지 못한 나라를 자신이 굴복시켰다고 말하며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북송의 사신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도 고려가 아예 고구려에서 그대로 이어진 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수도 개경의 동신사(東神祠)라는 사당에선 유화부인에 대한 숭배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는 시각은 발해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적다. 이는 역사적으로 고구려고려 사이에 통일신라라는 또 다른 왕조가 있었고, 무엇보다 고려의 영토가 고구려에 비해 협소했기 때문이다. '만주를 정벌했던 강대국 고구려의 계승국이 소국인 고려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이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처지인 것이다. 단순히 만주를 영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발해를 고구려의 정통 후신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고구려 계승에 있어서 고려의 정통성과 역사적 성과를 엄청나게 폄하한 것이다. 또한, 영토의 넓이와 별개로 영토의 질과 생산력은 중부와 삼남을 안정적으로 영유한 고려가 그렇지 못한 고구려를 압도했다는 중요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이런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48] 게다가 영토적 유산으로 봐도, 그것을 고려는 발해 이상으로 잘 계승하고 있었다. 고려가 차지한 고구려의 고토는 고구려의 사회문화적 중심지였던 평양 일대와 패서 지역이었고, 그곳들을 차지한 고려는 발해보다 고구려의 알짜배기 지역들을 더 많이 차지한 셈이었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의 사회문화적 유산을 계승하고 국가적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도 발해보다 훨씬 유리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영유했던 것은 고려 스스로 고구려의 적통임을 주장하는 강력한 근거였다. 그래서 고려는 평양을 영유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제2수도인 서경으로 삼아 화려하게 재건했다.[49] 이런 정통성과 강력한 계승의식은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데 상당한 당위성을 더했다. 그래서 당대에 국제적으로 고구려의 적통으로서 훨씬 널리 인정받은 것도 발해가 아닌 고려였다.[50]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보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영토의 크기와 만주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고구려 멸망 이후 만주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지나치게 만주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이유지만 그것은 적절하지 못한 견해다. 고구려의 중심지는 대중이 그렇게 좋아하는 만주가 아니라 한반도 북부 지역인 평양성 일대를 포함한 패서였다.[51] 요동 일대는 분명 군사적 방어선이자 농업 요충지였지만 고구려의 중심지는 아니었다.[52] 현대 한국에서 군사 지역인 강원도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요충지라고는 해도 중심지라고는 부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고려의 지정학적 조건도 신라보다는 고구려와 유사했다. 신라는 통일 전쟁 이후에는 대륙세력으로부터 유리되어 장보고청해진 등으로 대표되는 해양국가적 속성을 발전시켰다. 이는 당나라와 발해 같은 제국들이 이민족들로부터 통일신라의 완충지대가 되어주기도 했고 신라의 수도 금성(서라벌) 또한 북방과는 멀지만, 한·중·일 삼국의 해로를 잇는 남해안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는 신라와 달리 해양국가적 속성은 줄고[53] 고구려처럼 대륙세력과의 역학관계가 부각되었다. 이는 발해의 멸망으로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골과 같은 북방의 강력한 기마민족들과 완충지대 없이 인접하게 되었고 고려의 중심 권역 역시 보다 대륙과 가까운 패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중요한 해상 교류 국가였던 일본은 동시기에 고립을 선택하면서 덩달아 고려의 해양 교류 빈도도 크게 줄었다. 그 때문에 고려사는 해양세력과의 교류보다는 대륙세력과의 투쟁이 중심이 되었다.

고려는 신라와 백제 모두를 통합하여 삼한일통의 대업을 완수했는데, 이 영역들은 고구려가 가장 강성하던 시절에도 나제 동맹에 막혀 끝내 정복에 실패했던 영역들이었다. 고려는 통일신라에 대해 지방민들이 가졌던 두 가지의 불만에서 태어난 나라였다. 호족들의 자치권을 제한하고 중앙정치 참여를 부정한 점, 삼한일통의 대의를 표방했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고 명분 측면에서만 그친 점. 하지만 고려는 바로 그랬기에 역설적으로, 초기에는 전국에 통일신라처럼 체계적인 중앙집권체제를 관철할 수가 없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전국의 호족들에게서 돌아올 강력한 비판은 '고려가 대체 신라와 다를 게 뭐냐?'일 게 뻔했기 때문.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호족들의 군사력을 연합시켜 강력한 군사력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삼국을 정복할 수 있었건 것이었기 때문에[54][55] 호족들에 대한 물리적 탄압이 가장 극심했던 광종마저도 호족들의 자치권을 모조리 회수해버리는 행태는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물론 고려사 내내 계속 이런 건 아니었고 고려 중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중앙집권화가 진전되면서 중앙귀족인 문벌귀족 중심의 시스템이 완성된다. 문벌귀족이 대거 몰락한 무신정변 이후로도 여몽전쟁기에 강도로 수도를 옮긴 상태에서도 조운제도가 계속 운영되고 지방관이 파견될 정도였다.[56]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고려 후기 몽골 제국의 지배로 왕실의 존속까지 위태로워질 정도로 제도가 흔들리면서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다시 중앙집권제를 완비하게 된 것은 공민왕 시기부터였다.[57]

세계사적 관점에서 고구려-고려 관계와 가장 비슷한 관계로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관계에 비유해볼 수 있다. 사산 왕조를 건국한 페르시아인들은 아케메네스 왕조 멸망 후 친척 민족이지만 국가정체성은 공유하지 않았던 파르니족의 파르티아에게 지배받았고, 아케메네스 왕조의 부흥을 기치로 건국 후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레반트 지역 및 발칸 반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흥지인 파르스 지역에서 건국했다. 하지만 바로 그랬기에 거울상처럼 뒤집힌 공통점과 정반대의 차이도 발생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 기존 지배층을 두 측면에서 강력하게 비판했다. 후진적인 봉건제를 채택한 점, 페르시아와 무관한데 자격 없이 옛 이란 지역을 지배한 점. 그래서 정국이 안정되자 캐치 프레이즈대로 중앙집권적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결국 고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보다 우세했다. 사산 왕조는 그 최전성기에도 예멘 일대 외엔 그 영역 전체가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스리던 영역이었으나, 고려는 고구려가 정복에 실패했던 한반도 중남부를 모두 제패했다. 또한, 사산 왕조는 끝내 이슬람 제국에게 버티지 못하고 망했지만, 고려는 비록 부마국이 되었을지언정 몽골 제국에게도 망하지 않고 국체를 지켜냈다. 덧붙여 그 지위를 이용해 몽골 제국의 황위 다툼에 개입했을 정도였다.

특이사항으로는 고려 왕조가 들어서고서부터 고분벽화에서 고구려 묘제의 고분벽화로 유명한 사신도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고구려가 낙랑군을 점령한 뒤 한나라 묘제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그려지게 됐는데 후에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한반도 남부에도 영향을 끼쳐 백제와 신라에서도 고구려처럼 고분벽화를 그리게 되었고 특히 백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고분벽화에서 사신도가 등장하기도 했다.[58] # 신라에는 고분벽화에 사신도를 그려넣는 풍습이 없어 삼국통일 후 사신도는 자취를 감추었다가 고려가 들어서면서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조선 시대에도 이어져 다양한 작품이나 장식물에 사용되었고 선조(조선)의 왕릉인 목릉(穆陵)의 고분벽화에 그려지기도 했다.

5. 무장(武將)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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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님 블로그

고려시대에는 걸출한 무인들이 많이 활약했다. 이는 고려가 전쟁을 통해 건국된 데다 존속 기간 내내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에서 군인의 수요가 컸고, 조선 시대에 비해 문관과 무관의 구분도 상대적으로 약했다.[59] 군대가 비대하다보니 격구수박과 같은 무술들이 국가적으로 성행했다. 정중부이의민도 무술 실력으로 왕의 눈에 들어 출세했다. [60]

고려의 역사를 관통하는 전쟁만 꼽아도 엄청나게 많다. 건국기엔 후삼국 통일전쟁, 성종~현종대까지 이어진 거란과의 전쟁, 왕조의 최고 전성기인 현종 중기~인종 시기에는 여진 정벌, 인종 시기에는 1년 이싱 지속된 서경 반란(묘청의 난)이 있었다. 이후 고려의 암흑기였던 무신 정변의 발생부터 조위총의 난과 몽골의 침공, 말기엔 홍건적과 왜구의 약탈까지 내란과 외침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수백년간 평화가 지속되었던 조선과 대조적이다.[61]

고려의 무인들이 어떤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수조지인 군인전을 기반으로 한 군반씨족설과 면세 혜택을 준 농민병들을 활용하는 부병제설로 나뉘었다. 이는 고려 시기 군제에 대한 소략한 기록이 두 가지에 모두 걸쳐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경외군 혼성제설이라 하여 두 가지가 병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 개국공신 유금필은 출동만 하면 지던 싸움도 역전시키는 용장이었다.
  • 고려 2대 국왕 혜종은 통일 전쟁기에 직접 활약한 무인이었다. 그는 호위 무사 없이 맨주먹으로 자객을 때려잡기도 했다.
  • 2차 여요전쟁 때 양규는 맹활약을 벌인 장군이었다. 그는 1천여 명의 병력으로 6천 명의 거란군이 지키는 곽주성을 탈환했다. 단, 이는 거란군의 규모가 과장되었거나 성 안에 고려 잔존 병력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럼에도 대단한 전공임에는 틀림없다. 이후 소수 병력으로 거란군을 끊임없이 기습하여 3만의 포로를 구출해냈다.
  • 3차 여요전쟁 당시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군 10만명을 휘하의 20만 고려군으로 대파하였다. 이는 훗날에 귀주 대첩이라 불리게 된다.
  • 문종 때는 '유고'라는 절충군 대정이 활약했다. 그는 10명의 병사와 함께 저녁에 순찰을 돌다가 40여 명의 여진족 도적의 습격을 격퇴했다. 병사들은 놀라서 숨었지만 유고는 단기로 앞장서서 40여 인의 여진 도적들과 맞서 그들을 쫓아냈다. 이는 고려사절요 문종 3년(1049년) 6월에 기록되어 있다.
  • 여진전쟁 때 활약한 척준경은 한국사 최강의 무력을 지닌 맹장이었다. 그의 명성과 활약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 무신정권의 이의민두경승은 당대 최강의 무장들이었다. 둘 모두 수박의 고수였다. 궁궐에서 주먹으로 벽을 쳐서 힘겨루기를 한 일화가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의민은 의종을 시해할 때 맨손으로 척추를 접는 방법을 썼다. 조위총을 토벌할 때는 눈에 화살을 맞았는데 그대로 적진으로 돌격해 적을 무찔렀다.
  • 경대승은 무신정권기에 이름을 떨친 장수였다. 그는 약관(20세)에 고려 왕실 친위대 교위에 임명되고 26살에 기해정변으로 정중부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무엇보다 그가 집권할 때 다른 사람도 아닌 이의민이 그를 두려워해서 경주에 은거할 정도였다.
  • 김경손귀주성 전투에서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몽골군 진영을 들쑤셔 놓았다.
  • 승려 김윤후몽골군 장군 살리타이를 활로 저격해 사살했다. 그런데 김윤후는 자신이 살리타이를 쏘지 않았고 그때 자신은 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 이는 만화 살례탑에서 그려진다. 물론 김윤후가 사살한 것이 맞지만 겸양의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다. 이후 충주성 전투에서 노비군을 이끌고 70여일을 농성하여 몽골군의 맹공으로부터 성을 지켜냈다.
  • 합단적이 침입할 때원충갑이라는 장군이 활약했다. 합단적은 강원도의 치악(지금의 원주)까지 내려왔다. 이때 합단적의 지휘관인 카다안은 원주에 도착해 노략질을 해서 전쟁 물자를 얻으려 했다. 그 중 기병 50명은 치악산을 순찰하면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있는데, 원주 별초 향공진사 원충갑은 보병 6명으로 기병 50명을 무찌른 후, 말 8필을 도로 빼앗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원충갑은 치악성(원주성)에서 전투가 발발해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해있을 때 7명의 궁병으로 기병 400명을 모두 죽였다.
  • 원충갑과 더불어 흥원창판관 조신이라는 장수도 활약했다. 기록에는 '단지 공을 세우려고 성 밖에 나가 적군 1명을 베었고, 화살이 그의 왼쪽 팔을 관통하였으나, 그는 북을 치며 성 밖에서 항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합단적은 사기가 떨어져 물러갔다고 한다. 이때 조신은 합단적의 장수인 도라도의 머리에 칼을 꽂아 그의 목을 장창에 꽂았다. 이에 적은 모두 도망쳤다고 한다.
  • 충렬왕 때는 한희유라는 장군이 유명했다. 그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 참전했을 때는 맨손으로 적의 칼을 빼앗아 적을 베었다. 카다안의 침입 때는 적군에 활을 잘 쏘는 적장이 있었는데 1장 8척(약 540cm)의 창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여 적장을 죽였다. 그 후, 그는 장창에 적장의 목을 걸었다고 한다. 이에 적의 기가 꺾였다고 한다. 이 역시 전부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 참고.
  • 최영은 고려 말기 최고의 지휘관으로 꼽힌다. 원나라의 요청으로 중원에서 반란을 진압할 때 적들의 창에 찔리면서도 전투를 속행하여 그대로 승리하였다. 고려에서는 홍산 전투에서 입술에 화살을 맞은 채로 싸워 승리했다. 고려를 침공한 왜구들이 "머리 하얀 최만호"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는 기록도 있다.
  • 이성계신궁이자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명장으로 유명했다. 여러 외적을 격퇴한 전적이 고려사조선왕조실록 이외에 원사, 일본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제1차 요동정벌황산 대첩에서의 맹활약들이 특히 유명한 편이다. 그외 여러 기록에서는 이성계의 지휘 능력만이 아니라 활 솜씨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를 보면, 다소 과장이 있다하더라도 활을 잘 쏘긴 어지간히 잘 쏜 모양이다. 심지어 본인 뿐만 아니라 본인의 후손들 중에서도 명궁이 많이 나왔다.[62]

5.1. 무신 차별과 무장(武將)들의 정변

고려는 이후 조선시대에 비해서[63] 상대적으로 무장들에 대한 차별이 컸으며 그 탓인지 무장들의 정변이 유독 많은 왕조였다.[64] 고려 초기부터 이미 강조의 정변[65]김훈·최질의 난 그리고 중기에는 무신정변과 말기에는 이성계위화도 회군까지 터지는 등 수 많은 무장들이 정변을 일으켰고 이중 무신정변은 결국 100년간의 무신정권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위화도 회군은 아예 고려라는 왕조를 멸망시켰을 정도였다.

무신들의 정변 이유로는 주로 문관들에 비해서 푸대접을 받던 무신들이 대우에 불만을 품고 정변을 일으킨 경우들이 많았으며 대표적으로 고려 초기의 김훈·최질의 난과 고려 중기때의 무신정변은 무신 차별로 인하여 발생한 정변들이었다. 구체적으로 고려 초기 김훈·최질의 난은 문관들이 무신들의 월급이라 할 수 있는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의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몰상식한 짓을 벌인것에 대한 불만으로 터진 사건이었고 고려 중기의 무신정변은 어려도 한참 어린 문신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린 일등 여러 무신차별들이 누적되다가 결국 폭발하여 일어난 정변이었는데 공통적으로 문신들과 무신들의 대립 그리고 무신차별에 대한 무관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들이 존재한다.[66]

당연하지만 이러한 무신들의 정변들이 자주 일어나자 고려의 국왕들은 무신들을 잘 믿지 못하고 강하게 경계하게 되었으며 대표적으로 공민왕 같은 경우에는 홍건적의 침공으로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었다가 다시 개경을 수복하자 이때 공을 세운 무장들을 경성수복공신(京城收復功臣)으로 책봉해주었는데 이후 경성수복공신들이 고려 군부를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권력이 커지자 훗날 공민왕은 신돈을 앞세워 경성수복공신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에 나섰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이성계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왕조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으니 사실상 왕조내내 무신들의 정변에 시달리다가 왕조가 멸망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6. 한국사 발전

고려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많은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얼마 남지 않은 사료를 찾아내고 책으로 정리했으며, 이 사서들은 지금까지도 매우 중요한 한국사 연구 자료이다. 특히 고려가 편찬한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고대 한국사의 기록은 매우 부실해질 수 밖에 없으며, 상고사와 다를 바 없이 거의 전적으로 중국 사료에 의존해야 했을 것이다.

7. 다른 한민족 왕조들과의 비교

7.1. 이전 국가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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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조선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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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장연우는 거란의 2차 침공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도망을 치고 있었을 때 왕을 호종하던 신하 대부분이 도망치던 와중에도 몇 명 안 되게 현종의 곁을 끝까지 지킨 인물이었다.[2] 다만 관련 기록이 실린 고려사 원문을 어찌 해석하느냐에 따라 4년 전부터 벌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4년 뒤에 재정 문제가 발생하자 난이 일어난 시기에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주장한 것으로 볼 가능성도 있다. 특히 관련 기록에도 언급되었듯 이미 무신의 관직 상승 제한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최질 등과 같은 이들이 전쟁 직후라 상황이 안 좋았다고 해도 정책이 주장된 해에 반발했으면 모를까 문신들의 저런 움직임을 4년간 내버려두었을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는 것도 있다.[3] 전시과의 운영과 그 성격[4] 오치훈 (2018) 『고려 전시과의 운영과 영업전·구분전』[5] 군인들은 일반 관리의 녹봉분을 채우기 위하여 참전의 대가로 지급받고 있는 경제급부를 빼앗아가는 상황에 대해 크게 분개하였다. 그리고 난의 주동자들은 이 문제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군인세력을 규합하고 반란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김두향: 고려 현종대 정치와 이계(吏系) 관료, 한국역사연구회)』)[6] 11세기 고려의 대외관계와 정국운영론의 추이, 박종기, 역사와현실 제30권, 148 - 172 (25page)[7] 고려 전시과의 성격 ―분급토지와 분급대상을 중심으로― , 오치훈, 역사와 담론, 5 - 33 (29page)[8] 신편 한국사 고려 시대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Ⅲ. 군사조직 1. 경군 3) 중앙군의 인적 구성에 관한 제설 (2) 군반씨족제설[9] 신편 한국사 고려 시대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Ⅰ. 전시과 체제 4. 사전의 여러 유형 6) 군인전[10] 오영선, 김당택, 김두향, 김보광 등[11] 김두향, 오치훈, 박종기 등[12] 김두향, 김당택 등[13] 김당택, 김두향 등[14] 고려 성종 · 현종대 太祖配享功臣의 선정 과정과 의미, 김보광, 사학연구, 43 - 81 (39page)[15] 이때 계책을 세운 공으로 왕씨를 사성받아 왕가도로 개명했다. 참고로 이자림덕종의 2비 경목현비와 문종 때 일어난 쿠데타 모의 사건때 처벌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인 왕무숭의 아버지이기도 했다.[16] 가령 고려 문화의 핵심인 불교문화 또한 조선시 대에 들어서는 교단이 해체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분포하던 절들이 철거된 뒤 문중불교와 산사(山寺)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교단이 재결성되고 다시 도시에 절이나 불교 시설이 슬슬 들어선 현대 한국에서도 여전히 산사가 핵심이 되는 것 같은 조선 시대의 불교 전통은 강하게 남아있다.[17] 가령 중앙정부의 구조라던가(중서문하성->의정부) 수도를 한반도 중부지방에 두고 도(道)를 단위로 하여 영속성 있게 지방을 구획한 뒤 지방 주요 도시들을 완성한 것 등.[18] 후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태조 왕건 엔딩 나레이션 때도 자주적 통일이라며 강조한다.[19] 이 논란을 만들어낸 게 바로 본 항목의 주인공인 고려의 존재 그 자체이다. 애초에 신라가 정체성의 통일까지 완벽하게 성공해 유민의식을 아예 지워버렸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현대의 우리들 또한 그런 의문을 가질 일 자체부터가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영국인들은 앵글로색슨족의 나라로 시작했지만 프랑스 문화가 짙었던 노르만족에게 정복당해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역사를 일절 부정하지 않는다. 프랑스인들 또한 갈리아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이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로마에 정복당해 라틴화된 역사에 대해 일말의 의문도 가지지 않는다. 멕시코인들 또한 아즈텍의 역사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콩키스타도르의 정복 이후 스페인화된 현실이 너무 명백하기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신라는 불완전한 통일 이후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 발해라는 한국사 국가가 분명하게 존재하며 삼국의 유민의식을 간직하고 있던 유민들이 후삼국으로 다시 갈라졌던 역사를 기록하고 있고 기록을 통해 엿보이는 이들의 인식 또한 서로가 옛 정체성을 그대로 이은 점에 대해 일절의 의문도 갖고 있지 않다. 반면에 고려는 발해의 유민들까지 흡수하며 통일 이후 너무나도 당연한듯이 우린 고(구)려인이니 평양을 수도로 삼을 것이며 옛날처럼 요동을 정복하고 여진족을 속민으로 부리며 옛 영광을 부활시킬 거라고 수도 없이 천명하고 있다. 공식사서인 삼국사기에서는 삼국을 모두 본기에 떡하니 박아버렸고 고려의 통일이야말로 진정한 통일인 것처럼 기록해놨으며 이후의 왕조인 조선은 아예 선양을 통해 고려의 정부 자체를 곧이곧대로 물려받았기에 어떻게 이어졌냐는 논란 자체부터가 필요없다. 즉 신라의 통일의 완전성에 대한 의문은 현대에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 애초에 천 년도 더 전에 성립된 고려라는 나라의 존재 및 정체성과 긴밀하게 연관된 부분이며 이러한 고려인들의 정체성 및 인식이 현대까지도 살아남았기에 근대 민족주의의 발흥과 더불어(조선시대에는 아직 민족주의가 크게 발흥하지 않았기에 화이관으로 어느 정도 퉁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현대의 한국인들에게도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에 가깝다.[20] 물론 고려도 타국과 외교 관계를 안 맺은 것은 아니다. 930년 고창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이후 본격적으로 후당, 후진오대십국시대의 중원과 긴밀히 사신을 주고 받았다. 심지어 933년에는 건국 이래 줄곧 써왔던 연호 천수를 폐지하고 후당의 연호를 사용했을 정도. 그 외에 남당, 오월 등 십국의 나라와도 외교 관계를 이어나갔다. 다만 이들에게 후삼국 통일을 위한 지원 요청을 한 적은 없었으며 오히려 후삼국 통일 이후 후진 황제 석경당에게 거란을 같이 치자고 선제시했다. 그러나 거란이 무서웠던 석경당은 당연히 이를 무시했다. 어지간히 무서웠나 보다 석경당이 그렇지 애시당초 석경당은 자기 좋자고 연운 16주를 요에 넘긴 인물이니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1도 없었을 듯.[21] 근위대에서 진골, 6두품 등 수도 귀족 집단 완전 배제, 조령 및 추풍령 지방 출신 우대 등[22] 이는 당시 성장한 패서지역의 역량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던 걸 수도 있다. 신라 후기 한반도 남부는 기후변동으로 재해에 시달렸지만 패서지역은 오히려 평화시대에 발달한 농업과 무역으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삼국사기를 통해 본 한국 고대의 자연재해와 가뭄주기(윤순옥, 황상일)[23] 관찬사서인 삼국사기는 신라만 본기, 나머지는 세가 혹은 고구려만 본기, 나머지는 세가의 형식이 아닌 모두 본기인 형식을 취하였는데, 이는 즉 삼국 모두의 정통성을 인정한 것에 해당한다.[24] 다만 동명성왕은 삼국 중 고구려 하나만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란 성격이 너무 강해 전국의 공감을 얻기 힘들었고 그에 따라 시대가 지나면서 공동 시조격 인물에서는 내려오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시조들 중 한 명 정도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래도 이런 과정을 거쳐봤기에, 또한 신화의 내용도 가장 극적이기에 현대에 와서도 시조급은 아니더라도 삼국의 시조 중 가장 중시조급에 가까운 독특한 위상을 갖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이미 유일하게 단군과 혈연이 있는(아들) 삼국의 시조로 취급되기도 했다. 물론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경우는 결국 동명성왕의 2세이기에 위상이 밀릴 수밖에 없긴 하지만... 심지어 이는 본국인 백제에서마저도 명목상 시조는 동명성왕으로 여겼다.[25] 신라의 시조급인 혁거세 거서간이나 김씨 왕가의 시조급인 김알지/성한왕은 통일신라 정도를 제외하면 이렇게 한민족 전체의 시조급으로 숭상되었던 흔적이 없다. 특히 신라의 시조의식이 실전되었다는 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김알지/성한왕에 대한 부분인데 성한왕은 기록이 남지 않아 금석문을 통해서만 존재가 드러났으며 지금도 당대 신라 왕실에서 이들의 관계에 대해 정확히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나 정설이 없다.[26] 현대 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설의 실체를 부정하고 있지만, 고고학이고 뭐고 없었던 고려-조선 당시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27] 직역하면 '동명성왕의 옛 땅.' 고구려의 옛 영토를 의미한다.[28] 직역하면 '우리 가문의 푸른색 비단 이불.' 즉 고려의 가보란 뜻이다.[29] 태조 즉위 설화 중 하나인 '왕창근의 거울'에서 인용한 것이다. 닭은 계림(鷄林), 즉 신라를 비유하고 오리는 압록(鴨綠), 즉 압록강을 의미한다.[30] 소정방은 백제 - 나당연합군 전쟁에서 일정 성과를 끌어냈지만, 고(구)려 - 나당연합군 전쟁에선 대패하여 겨우 도망쳤다. 즉 제문과는 다르게 고구려에서 죽진 않은 셈.[31] 동명성왕의 사당은 서경(평양)의 장락궁에 위치했다.[32] 고려 전기 지배층을 본관별로 분석하면, 통일 전 옛 고려 지역 출신이 성씨의 수에 있어서는 전체의 62%, 고급 관료의 수에 있어서는 75%를 차지하였다.[33] 만약 고려왕조가 셋 중 어느 하나가 정통성에서 위라고 생각했다면 그 나라만 본기고 나머지는 세가나 열전에 넣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삼국시대를 다룬 삼국지가 바로 그렇고(조위가 본기, 촉한동오는 세가), 그 외에도 송서 문서의 내용과 같이 중국사에서 여러 나라가 존재한 시대를 다룰 때 누구는 본기에 넣냐 세가에 넣냐 하는 것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와 관련해 곧잘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똑같이 기전체 역사서를 편찬하던 한국사 왕조들도 이런 개념을 잘 알고 있었다.[34] 고려사 윤관열전의 내용, 이규보의 동명왕편, 이색의 부벽루 등에서는 소위 고구려 계승의식이 흐려졌다고 여겨지는 고려 중기부터 후기에도 지식인들이 너무나도 당연히 고구려를 고려의 직계전조(前朝)로 여겼던 인식이 드러난다.[35] 심지어 경순왕은 항복하기 4년 전 이미 고려에 칭신했다. 신라는 그전부터도 고려의 신하국이었고 애초에 신라는 이미 4세기 후반~5세기 중반에 고(구)려의 신하국이었던 적이 있었다.[36] 물론 궁예는 자기 왕위의 근거를 고(구)려가 아니라 그냥 본인한테서 시작되는 미륵 정통성으로 고쳐 일종의 역사 개변까지 실시했는데 본인 나름대로는 삼국 정통성을 초월한 것으로 봤겠지만, 패서 호족들에겐 중대한 약속 위반이었다.[37] 신라왕은 전통적으로 중국에게 낙랑군공/왕의 작위를 받았고(왜 하필 낙랑군이었는지에 대해선 낙랑군 항목 참조) 따라서 이는 신라군왕의 작위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비해 공양왕과 태조 이성계는 '고려왕'이 되어 '고려국'도 접수한 형식이었으니 당연히 이성계는 처음부터 조선 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따라서 일단 고려왕이 된 뒤 새 왕조를 개창한다고 선포한 후에 고려왕을 잇는 '조선왕'이 된다. 왕건도 마찬가지 논리로 처음부터 고려 왕이 된 게 아니라 일단은 궁예 대신 태봉 왕이 된 다음 국호를 고려로 되돌린 게 이른바 왕건이 창업한 일의 진상이었다. 이후 공양왕은 군왕 대우는커녕 존재 자체만으로도 조선 왕조의 정통성에 위협이 될 수 있었기에 오등작으로는 후작급인 공양군(君)으로 강등되어 박대당한 뒤 결국 피살된다. 일제강점기 조선 왕가도 나라는 뺏겼지만 왕가는 보전되어 이왕가라는 형식으로 존속되었는데 경순왕은 고려에서 신라 왕가까지 보전해준 건 아니라 딱 자기까지만 왕 대우를 받았다는 차이가 있다. 여담으로 백제 멸망 후 당나라에 의해 태자 부여융은 명목상 백제를 잇는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임명되면서 고구려의 요동군이나 신라의 낙랑군과 마찬가지로 백제의 별칭에 해당하는 대방군왕의 작위를 받았으며 이 작위는 부여융의 손자인 부여경까지 이어진다.[38] 한편 후백제왕 견훤은 적어도 재위하고 있을 때는 태봉에게서든 고려에서든 정통성 있는 백제왕으로 대우는 잘만 받았다. 이는 견훤이든 후백제든 그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부정한 신라와는 완전히 다른 행보다. 물론 견훤이나 신검에 대한 사후 대우는 임금에 걸맞은 대우는 아니었다지만, 그렇잖아도 고려 왕조 외의 다른 임금들의 계보는 될 수 있으면 격하하거나 부정해야 하는 처지상 부정된 것이지 당대에도 후백제를 인정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39] 일단 기본적으로 이게 없으면 고려는 작동할 수 없진 않더라도 정통성이 크게 떨어지는 근본 없는 반역왕조가 된다. 태봉이 미륵사상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정통성을 확립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것에 비해 고려는 고구려에 대한 향수를 자극함으로써 수많은 호족들의 지지는 물론 옛 고구려의 영토를 잠식하는 것에 대한 큰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40] 신라의 삼한일통의식도 이와 비슷한 형식이었다. 결국, 삼국이 하나가 되기 위해선 삼국 중 어느 한 나라는 중심이 되어야 했고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으니 당연히 신라를 중심으로 삼한일통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신라는 물론 당대의 사서나 기록이 완전하게 남아있지 않기에 추정이긴 하지만 고구려나 백제에 대한 사서를 저술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것으로 보아 오로지 신라만이 정통이라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신라측에서 삼국사를 저술했다고 해도 오로지 신라사만을 본기로 치고 나머지는 세가급으로 취급했을 가능성이 높다.[41] 또한, 이는 당대에는 그만큼 옛 삼국의 유민의식이 강력했다는 반증이었을 수도 있다. 삼국전쟁에서 두 번이나 패배한 백제까지도 엄연히 본기로 넣어야 했을 정도로 민심을 포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42] 유명한 문인인 이규보도 시조로서의 동명성왕을 특별취급해 동명왕편을 썼던 사례가 있다. 이색(고려) 또한 한시 부벽루에서 동명성왕을 소재로 사용했다. 수도 개경에도 유화부인의 사당이 있었고 평양이 고려의 제2수도인 서경이었던 배경상 고려인들에게 동명성왕은 유독 가깝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43] 사실 신라는 왕가가 박씨, 석씨, 김씨로 셋이나 되었기 때문에 조선의 기준으로 보면 각 가문당 사당 하나씩 세워야 격이 맞아서 그렇게 했던 측면도 있다. 조선 왕조는 모든 주요 역대 한국 왕조들에 대한 예우를 최대한 갖추려 했고 그랬기 때문에 삼국 외에도 평양에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 기자의 사당이 세워졌고 심지어 아무래도 위상이 비교적 낮았던 가야도 김해에 수로왕의 사당이 세워졌다. 동명성왕의 사당이 따로 지어지지 않았고 단군의 사당인 숭령전에 같이 합사된 것으로 보아 소홀한 대우를 받았다는 견해도 있는데 고려 대에서부터 이미 단군=해모수(《삼국유사》에서도 해부루가 단군의 장남, 동명성왕이 차남인 이복형제로 여겨졌다)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러한 견해의 반영일 가능성도 있다. 같은 계통의 군주들은 예외없이 같은 사당에 모셔졌기 때문이고 기자는 따로 모셔졌다. 동명성왕을 소홀히 대우해 그냥 고조선 왕가에 합사시킨 거라면 순서에 따라 단군이 아닌 기자와 같이 배향되어야 했다. 그런데 기자보다 앞서는 단군과 같이 배향되었다는 점이 과연 단순히 소홀히 대우받은 것이라 볼 수 있는가?란 의심을 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찌보면 고구려에 유리하게 해석한 것이고 어찌되었든 신라에는 성씨별로 3개의 사당을 마련했고 외국 왕족이면서도 신라 주요 귀족에 편입되어 신라사에서도 몹시 중요한 가야 금관국 왕실까지 포함하면 신라 관련해 최대 4개의 사당이나 마련한 반면(다만 신라에서 지대한 업적을 세운 김유신은 사당에 배향되지 않았으며 물론 김유신은 왕이 아닌 신하였으며 왕호를 얻은 것도 그저 추존왕에 불과했기에 배향될 수 없었다고 쳐도 신라에 항복했으므로 마찬가지로 신라에 대한 공헌을 했다고도 볼 수 있는 마지막 왕인 구형왕도 배향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고려에 항복한 경순왕은 고려 왕조에서 높게 평가한 것이 반영돼 배향되었다. 수로왕은 다른 가야의 왕들과 달리 조선 시대까지도 지역에서 독자적으로도 상당히 신성시되던 분위기가 반영된 것도 커 보이며 따라서 금관국 왕실의 사당을 모신 게 단지 신라를 높이기 위해서였다고만으로 보기엔 힘들어 보인다. 구월산 삼성사도 환인과 환웅은 배제해야 한단 성리학자들의 주장이 거세 훼철 논란까지 있었으나 지역여론에 밀려서 결국 유지되었다) 고구려에는 하나의 사당, 그것마저도 단군을 주, 동명성왕은 부수적으로 모셨다는 점에서 삼한일통을 이루고 한국사 최초로 유교를 들여온 신라 왕조에 특별한 예우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가 유교를 최초로 들여왔다는 건 잘못됐다. 선진유학은 고조선 시대에도 이미 중국에서 발전해 있었고 정확히 시기를 알 수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삼국 모두에 들어와 있었다. 고구려에서도 유교의 성인인 기자를 숭배했다는 게 기록되어 있고 관학으로서 유학을 중시해 태학과 경당에서는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등을 가르쳤고 이를 지도하는 오경박사가 있었다. 백제 역시 한성백제시대에 해당하는 4~5세기경의 인천 계양구 계양산성의 논어 목간이 발굴된 바 있다. 이는 한국 역사상 가장 이른 유교, 한학 유물이다. 이후로도 오경박사 왕인, 아직기, 단양이, 고안무, 왕유귀 등을 일본에 파견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기도 했고 의자왕대 백제 왕족들의 인명에서도 유교적인 뜻을 담아 지은 흔적이 보인다. 오히려 불교와 마찬가지로 신라는 고구려, 백제를 통해 가장 나중에 유교를 수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삼국~남북국시대의 유교는 어디까지나 귀족들이 배우는 관학에 그쳤고 후대처럼 유교가 민간까지 확산된 건 고려 시대에 들어서였다. 물론 아예 일반생활에도 침투하고 국교가 된 건 우리가 알다시피 당연히 조선 시대에 들어서야였다. 게다가 백제 온조왕의 사당은 인조 대에서나 온조왕사라는 이름으로 지어졌고, 현대에서 그리 먼 과거도 아닌 정조(조선) 대에서야 팔전으로 격상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삼국 중에서도 비교적 소홀한 대우를 받았다. 고려 초기의 인식에서부터 이미 북부 지방을 대표하는 왕조로 여겨진 고구려에 대해 남부 지방을 대표하는 왕조의 자리는 신라가 차지한 데다가 온조왕부터가 단독으로 계보를 연 시조가 아닌 동명성왕의 아들로서 시작했으며 백제 자체로도 삼한통일을 해봤던 것도, 막대한 국력을 자랑했던 것도 아니었기에(그나마 백제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전성기도 삼국시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 같은 후대에 가서는 이미 기억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위상이 떨어질 수밖에 없긴 했다. 심지어 백제인들부터가 공식 시조는 동명성왕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사당이 세워진 배경이 국난 극복의 역사와 관련이 깊었기 때문인지 독특하게도 조선 왕조의 신하와 함께 배향되어 뒤늦은 대우에 대한 만회를 약간이나마 한다.[44] 사실 조선 왕조는 마치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처럼 삼국 중 하나를 적극 계승했다기보단 유교적 정통론으로 정통관념이 일원화되었기 때문에 신라가 부각된 것에 가깝다. 세종대왕 시기 정립된 역사관을 보면 단군-기자가 천명을 받아 고조선을 세웠으니 정통성의 시작이고 위만은 찬탈자였기에 정통에서 배제, 준왕이 남하한 마한에서 정통성이 이어지고 준왕의 계보가 단절된 후 삼국시대에는 무통시대라 하여 정통이 없었다가 고구려, 백제가 망하면서 단독 왕조가 된 신라로 끊어졌던 마한의 정통성이 이어지고 이게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식의 관념이었다. 이는 유교적 정통론보단 고구려 왕조를 계승한 고려 왕조가 천명을 받아 태봉, 후백제, 신라 등을 모두 싸그리 정복하는 삼한일통의 과정을 통해 이전의 천명이 없어 그저 일시적으로 존속했을 뿐인 왕조들과는 달리 마침내 최초로 한반도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는 식의 독자적인 관념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즉 천명에 의한 한반도의 통합이 정통성의 근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선 왕조에게 고조선 이후의 나머지 왕조들은 그냥 정통성이 넘어가는 과정에 불과했기에 오히려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가장 오래됐지만 정통성의 시초인 단군-기자를 가장 국가적으로 강조했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의 왕실을 감히 찬탈했던 위만은 고려 시대의 데면데면했던 인식에 비하면 거의 국적 수준으로 노이로제에 가깝게 멸시되었다. 그래서 조선 왕조에서 특별히 신라를 강조했다고 보기엔 신라의 문물이나 역사를 그다지 부각시키지도 않았고(신라의 국사였던 불국사는 조선 말기에는 폐허에 가깝게 방치되었다) 더 나아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적 이상향을 목표로 삼았던 지배층인 유학자들에게 신라를 비롯한 삼국의 옛 왕조들과 바로 전 왕조인 고려 왕조는 적극적으로 본받아야 하는 대상이긴커녕 물론 한때 잘나갈 때도 있긴 했으나 결국에는 불교와 기이한 야만(중원 처지에서 보기에 이상했던 고대 한국의 고유 풍습)의 문화를 숭상해 신성한 유교적 질서를 제대로 실현하지 않고 무시하다 퇴폐적으로 망해버린 반성의 대상에 불과했다. 즉 일단 조선 왕조는 고조선을 기원으로 잡고 유교적 이상향을 목표로 삼음으로서 삼국의 정체성을 탈피하긴 했던 것이다. 문묘에 신라시대 인물 설총최치원을 배향했지만 여기에 고려 인물도 똑같이 2명을 배향했고 조선 유학자는 14명이나 넣을 정도로 조선왕조가 신라 왕조를 다른 왕조들과 비슷하게 봤다면 몰라도 특별히 우대했다고 보긴 힘들다. 다만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조선 왕실에게 순순히 선양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선양의 모양새가 매우 이상하게 되었고 이 부분은 면밀히 따지면 태조 이성계를 유교적 질서에 정면으로 반한 역적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역린이자 컴플렉스가 되었다.[45] 물론 삼한 계승의 취지는 좋았으나 이후 사학과 고고학 등의 발전으로 현대인들에게 삼한의 실체가 광범위하게 알려지면서 삼한이란 명칭은 삼국 혹은 그 모두를 포괄한 한반도 전체보단 한반도 남부만 대표하는 이미지가 짙어지긴 했다. 당연히 이는 19세기 말 당대에는 예측하기 힘들었던 것이며 따라서 예상치 못하게 그렇게 된 것. 그래서 북한은 억지 자존심 빼면 시체인 정부뿐만이 아니라 주민 사이에서도 '한'은 남방색이 짙은 명칭이라고 보아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북한의 국호인 조선도 기원만 따지면 다분히 북방색이 더 강하다.[46] 주몽의 후손이라는 의미[47] 고구려의 5부[48] 고구려가 고려에 비해 적은 인구와 생산력으로도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지형의 덕이 컸다. 고구려는 요동을 완전히 점유하는 데 성공했고 그래서 요동의 복잡한 산지 및 험준한 늪지대인 요택을 이용해 유기적으로 연계된 강력한 산성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예속되어 있던 말갈병을 통해 농경민만으로는 얻기 힘든 전문화된 기병전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이를 합쳐서 활용한 게 침략군을 수도 없이 괴롭힌 고구려 특유의 '산성기병'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보다 훨씬 적은 농경지와 인구의 백업만으로도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지만, 고려는 압록강 라인을 방어선으로 점유하고 있었는데 압록강 하구의 요충지(옛 서안평이 있던 곳이다.)가 뚫리면 그 다음은 평양에서 현 재령 일대까지 낮은 구릉지 및 평야지대만이 이어지기 때문에 이렇다 할 자연적 방어선이 없다(언젠가 천도할 것만 같이 여겨졌던 제2수도 서경이 전쟁 때마다 수도 없이 털리게 됐던 이유다). 그다음은 황해도의 그다지 넓지 않은 산맥지대만 넘으면 지리적으로 완만한 서해안가를 따라 주요 도시들을 공략할 수 있게 된다. 이 지대는 결국 많은 인구를 채워넣어서 방어할 수밖에 없는데 고려가 아무리 삼국 그 어느 나라보다 인구가 많았다고 해도 대륙세력의 수많은 인구에 비해서는 항상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만약 고려가 요동까지 완전히 점유하는 데 성공했다면 과연 한반도 전체의 백업을 받을 요동방어선이 얼마나 강력해졌을지가 인터넷 일각에서 if 떡밥으로 종종 제시되곤 했다.[49] 물론 고려 조정이 상시 위치하는 본수도는 개경이었으나 서경 역시 1년에 3달을 머무는 '또 다른 수도'의 위치이자 조정의 연장선이었고(원의 대도-상도 시스템과 비슷하다) 이는 '지방 부수도' 격이었던 동경, 남경과는 분명 차별화되는 위상이었다. 다만 '제1 수도'인 개경과의 위상 차이 또한 명확하였고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은 더는 수도라 부를 수 없는 그저 그런 '지방 3경'으로 추락하였다. 사실 태조의 유조를 봐도 고려 왕조는 처음에는 아무래도 북진하여 요동까지 차지할 것을 염두에 두고 서경을 개발하였던 것 같다. 개경은 고려 시대 내내 제기되었듯이 지리적으로 대도시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평양은 그것은 물론이고 요동까지 점유하게 되었을 때 한반도와 요동을 잇는 중심지의 역할을 가장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진은 요나라, 금나라에 막혀서 실패했고 이에 서경은 위험한 최전선의 중심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심지어 몽골의 침략 때는 평양 일대가 아예 동녕총관부로 떨어져 나갔다가 겨우 반환되기도 했다. 이런 냉정한 현실 속에서 조선대에 들어서는 서경으로의 북천은커녕 오히려 남경(한성부)으로 남천하게 된다.[50] 그리고 어차피 고려의 건국 이후 발해가 곧 멸망해 고려가 태자 대광현 집단 같은 중요한 발해 유민 집단을 상당히 흡수함으로써 사실 상관없게 되었다. 또한, 발해가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지 못한 건 바로 '고려'에 대한 계승의식을 지니고 있던 것과는 별개로 '고려' 그 자체로는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해도 초기에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국호를 고려로 사용하는 등 내부적인 논쟁이 있었던 걸로 보이나, 그런 논쟁에서 자유로웠던 일본과 달리 당나라나 신라는 그토록 힘들여 멸망시켰던 고구려가 부활하는 걸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위 두 나라와의 외교에서는 고려라는 국호가 아예 일절 나타나지 않는다. 그나마 당나라와의 외교에서는 어느 정도 타협을 보는 데 성공해서 고구려의 별칭에 가까웠던 발해라는 국호를 통해 느슨하게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인정받았으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에 통합된 걸로 완전히 끝이니 무조건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였기 때문에 그냥 고구려와 부용관계에 불과했던 속말말갈의 후신으로 내내 취급한다(물론 실제로는 단순 부용관계가 아닌, 예맥화가 거의 이루어져 고구려 사회에 고도로 통합되었던 말갈집단이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이었다는 게 통론이지만, 아무튼 구분이 있긴 했던 만큼 신라 정부는 거기서 확실히 선을 딱 그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당나라도 인정한 발해라는 국호까지는 어찌하지 못했지만. 결국 국호의 측면에서도 발해는 국제사회에서 고구려의 후신으로 온전히 인정받지는 못했던 것이다.[51] 이 지역은 현재 북한의 사회문화적 중심지이기도 하다. 장수왕의 천도에도 별다른 반발이 없었을 정도.[52] 심지어 요동은 농업 요충지로서도 부실했다. 바다 같은 완충지대 없이 대륙을 통해 시베리아 북풍이 그대로 들어와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지역이다. 제1차 요동정벌 때도 요동성의 군량을 실수로 태워버린 뒤 따로 식량을 얻을 곳마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동시대의 몽골 군벌이자 요동평야를 점유했던 나하추 또한 명나라와 적대하다가 교역이 끊기자 경제적으로 시달리다가 명군에게 결정타를 얻어맞자 못 버티고 항복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도 명나라와의 교역이 끊기자 청나라에 기근이 들 판이었기 때문이다.[53] 물론 삼면이 바다인 나라였던 만큼 오늘날 한국의 영문명인 코리아의 유래가 고려인 점이나 고려가요 쌍화점, 벽란도 등을 볼 때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다. 하지만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교역 빈도수가 줄었고 중국 방면으로도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묘사된 것처럼 한국인들이 황해 바다의 무역로를 장악하는 정도는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대륙 방면의 중요도가 높았다. 이는 기술의 발달에 따른 지정학적 변화로 인한 것이기도 했는데 남북국시대까지 일본은 중국과 직통으로 교역할 수 있는 항해기술이 없어서 반드시 한국을 경유해야 했고 그래서 신라를 거치거나 아니면 발해를 거친 뒤 육로로 교통해야 했다. 특히 발해를 경유하는 루트는 동해가 상당히 험했기 때문에 난파선이 속출할 정도라 쉬운 게 아니었고 그래서 그보다 무난한 교역로를 갖고 있던 신라가 경유지로서 많은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들어서면 일본이 자국의 동부개척에 집중하면서 이전보다 교역량이 크게 줄어들게 되는 한편으로 그나마 있던 무역도 중국과 일본의 직통이 가능해져 한반도의 중계무역이 크게 축소되게 된다. 고려 말기에 들어서면 일개 호족들의 통제하에 있던 왜구가 요동이나 강남(중국)까지 약탈할 정도로 동아시아 전반의 항해기술이 크게 발달하게 되어 동남아시아에 중국, 일본인들의 거류지까지 생기게 된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얕은 황해, 남해에서의 연안항해 정도만 가능해 백제-중국의 교통도 엄청난 일이었던 것에 비하면(항해술이 발달했던 백제도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 일대를 털린 뒤 한동안 중국과의 교통이 어려워졌다가 이후 직항 루트를 겨우 개발하게 된다.) 그야말로 대격변의 발전사이다.[54] 행정과 교통능력, 생산성이 떨어지던 시대에는 이처럼 준봉건제/군구적 제도를 통해 중앙집권을 다소 희생하게 하더라도 군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낸 일이 세계사적으로도 흔했다. 현지에 익숙하고 애정을 가진 유력자들이 직접 통치하게 함으로써 상하로 똘똘 뭉친 조직력을 가지게 할 수 있었고 그 지역에 대한 전문화 또한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역으로 유럽 봉건영주들의 국왕에 대한 위협이나 당나라의 절도사 제도처럼 지방세력이 중앙권력에 도전하기 쉽게 하는 위험성 또한 안고 있었으나(연개소문도 쿠데타에 자기에게만 충성하는 동부의 병력을 동원해 중부의 국왕군을 공격했다가 웅진성으로 도주한 의자왕이 잡힌 이유도 웅진성의 북방 병력이 국왕보다도 북방령이었던 예식진을 따랐기 때문이다.) 전근대는 행정과 교통능력이 상당히 떨어졌고 일단은 군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게 급했기 때문에 군주들이 기본적으로는 분권제를 싫어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제도가 자주 이용되곤 했다.[55] 그렇다면 배타적인 중앙 위주의 제도를 가진 채로 한반도를 정복한 신라는 뭐였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건 삼국전쟁에는 초강대국인 당나라가 개입해 왕가를 두 개나 몰락하게 하고 주요거점을 초토화하는 등의 전무후무한 위협을 가해 전체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던 고구려, 백제계 호족들이 친연성은 없어도 유일하게 중앙권력 중심의 조직력을 완비하고 있던 신라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전란의 상흔이 치유되면서 다시 세력을 회복한 고구려, 백제계 호족들의 정치적 불만이 대두될 때 다시 신라 왕조의 휘하로 들어가고자 한 호족들은 드물었다.[56] 이 시기는 국왕의 권력이 다소 떨어져 왕실이 귀족들에게 압도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없었던 것이지 중앙정부 자체의 권력이 약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미 유력한 호족들의 중앙귀족화가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중앙에 대항할 만한 지방은 특혜를 받은 제2수도였던 서경 정도뿐이었고 이마저도 묘청의 난으로 몰락하게 된다. 그래서 이후의 반란은 지방호족의 중앙에 대한 도전이 아닌 민란의 성격을 띠게 된다.[57] 고려의 중앙집권제를 분석할 때 초기의 호족연립정권적이었던 상황에만 국한해 후기신라보다 국토 통제가 못했다고 보는 시각에는 문제가 많다. 후기신라는 그 수도의 위치에서 비롯되는 교통로의 특성 및 귀족연립정권적 특성, 외세의 개입 때문에 왕가가 증발해버린 상황에서 세력을 온존한 호족들의 협력이란 배경 하에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효율적인 관료제를 도입하고 국토의 중앙에 자리잡아 국토의 남북부 모두에 전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후대의 고려, 조선와 비교하는 데는 시대적, 공간적으로 무리가 있다. 전반적으로 후기 신라는 물산이 풍족하고 수도와 비교적 가까우며 특히 해상로의 거점이 되었던 옛 백제의 영토 경영에는 적극적이었던 걸로 보이나(이것이 백제계 호족들의 영향력을 제약해 반발을 더 크게 불러일으킨 배경으로 추정된다) 북부 영토는 상대적으로 훨씬 자율적인 형태의 준자치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58] 다만 양식에서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의 영향이 강하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향이 아닌 남조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59] 고려의 명장들로 잘 알려져 있는 양규강감찬, 윤관 같은 무장들도 사실은 모두 문관 출신들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 조선 또한 김종서, 송상현 그리고 권율이 모두 문관 출신들인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문관과 무관의 구별이 생각보다 엄격하지는 않았다.[60] 물론, 역으로 보자면 역사가 전쟁으로 점철되어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에는 무인과 영웅들의 활약만 기록되지만, 당대를 살아가던 민중들은 참으로 고생했을 것이다.[61] 조선의 경우 건국 직후~양란 이전, 영정조 시절까지 약 300년 정도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대신 현종 시대에는 경신대기근으로 인한 기근 문제가 훨씬 심각했었다.[62] 이 부분에서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정조로 49발을 쏘아 49발을 전부 명중시킨 기록이 사서에 남아있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과인이 한 발을 더 안 쏜 것은 모두 맞히지 않기 위함이다"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는 보통 임금이 활을 활 번에 50발씩 쏘면 군주는 겸양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고 보통 1발은 일부러 맞히지 않는게 관례여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63] 조선에서 무장들의 반란은 단 두 차례로 이괄의 난, 임오군란이 전부였다.[64]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는 무관들도 종2품 이상으로 승품이 가능하여, 조선 초기 일부이긴 하지만 조영무최윤덕 같은 무관 출신 정승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이는 순수 검투사와 다름없는 사람들을 무인으로 뽑은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는 무인들에게도 전술, 전략은 물론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까지도 어느정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고려는 무관들이 조선처럼 종2품 이상으로 승품하는게 불가능했던 탓에 불만이 컸었는데 김훈·최질의 난 당시 김훈과 함께 정변의 주동자였던 최질은 아예 2차 여요전쟁 당시 공을 세웠음에도 문관직을 얻지 못한 불만탓에 정변에 가담했을 정도였다.[65] 다만, 강조는 무관 출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변 당시 강조는 서북면 도순검사로서 군을 이끌고 있는 위치였다.[66] 다만, 무신정변은 하급 장교들이 상급 무신들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고 일으켰다면, 김훈·최질의 난은 고위급 군인들의 주도로 벌어진 반란이라는 점에서 차이점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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