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21:34:16

석(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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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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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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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石 ( 석)
1.1. 실존인물
2. 昔 (옛날 석)
2.1. 족보의 서술에 관하여2.2. 실존인물
3. 가상인물4. 불교 승려가 사용하는 성씨 5. 我姓石

1. 石 ( 석)

본관으로는 경주, 성주, 성산, 밀양, 대구, 충주, 해주, 광주, 전주 등 23본이 있으며 이 중 연원을 전하는 본관은 충주[1], 해주, 조주 3본이다. 인구수는 2015년 인구조사 기준으로 49,203명이며 고려 후기 상장군을 지낸 석린을 시조로 두는 충주 석씨가 42,811명으로 가장 많다. 해주 석씨, 조주 석씨, 성주 석씨의 경우에는 임진왜란 당시 군권을 쥔 명나라의 병부상서였으며, 위기에 빠진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파병반대파와 만력제를 설득시킨 인물인 석성의 장남 석담이 조선에 망명해서 세운 귀화 본관이다. 차남 석천도 1597년에 성주로 내려와 조주 석씨, 성주 석씨의 원류가 되었다.

1.1. 실존인물

2. 昔 (옛날 석)

시조는 신라 4대 왕인 탈해 이사금. 본관은 월성(경주시) 단본이며 인구수는 2015년 인구조사 기준으로 11,355명이다. 1번 문단의 石씨보다 훨씬 적다.

경주 김씨, 밀양 박씨와 함께 신라의 왕위 계승권이 있었던 3대 국성 중 하나였으나, 흘해 이사금을 마지막으로 권력을 잃어 몰락했다.[2] 이후에도 왕비를 배출하기도 영향력은 얼마간 유지했지만 상대 말부터 김씨와 박씨가 왕족과 왕비족으로 많이 등장하며 말기에는 박씨 왕조가 잠시 부활하기까지 한 데 반해 석씨는 상대 후기부터는 아예 기록에서 없어진다.

물론 그렇다고 가문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속일본기에 기록된 723년 8월 8일 일본에 갔다 온 사신단 중 부사가 한나마(=대나마) 석양절(昔楊節)인 걸 보면 신라 귀족으로 가문이 통일신라시대에도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나마는 5두품 이상만 오를 수 있는 관등이기 때문에 석씨가 통일신라 시기에도 최소 5두품 이상의 귀족임을 유추 가능하나, 한때는 신라 왕위까지 누렸던 가문치고는 너무나도 비참한 몰락이다. 물론 성덕대왕신종에서 박씨는 대나마까지만 오를 수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박씨도 일부만 진골이지 상당수는 5두품 이하로 보이며 김씨도 6두품 이하로 족강된 사례가 많이 확인되는 등 김씨, 박씨라고 무조건 진골이었던 건 아니었다.

현대에도 경주 김씨밀양 박씨에 비해 석씨는 그 수가 적은 편이다.

2.1. 족보의 서술에 관하여

족보에 따르면 석씨는 크게 두 계통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계통은 조분 이사금의 3남인 6세 각간 석지(昔祉)의 후손들이고, 두 번째 계통은 흘해 이사금의 아들인 8세 각간 석보(昔甫)의 후손들이라 한다. 그러나 석지와 석보 모두 실제 역사서에는 나오지 않고 오직 족보에만 등장하므로 실존인물로 보기 어렵다. 이 둘뿐만 아니라 신라~고려 때의 석씨 인물들은 각자 지낸 벼슬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생존했던 시기나 행적 등이 전혀 없다. 정작 속일본기에 기록된 실존 인물 석양절은 없다.

석지의 직계장손인 16세 석오원(昔五源, ~648)은 선덕여왕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지었다고 한다. 석오원의 차남이 강수의 아버지인 석체(昔諦)이며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강수 본인은 스스로를 임나가량 사람으로 소개했으므로 신라 왕족일 수 없다. '석체'에서 '체'만 이름인지 '석체'가 전부 이름인지 확실하지 않은 판에 단순히 昔만 보고 끼워넣은 것이라는 의심이 가능하다.

그리고 석오원의 4남 석광수(昔光水)의 손자 석제만(昔濟萬)은 태종 무열왕 때 대장군이었고, 석제만의 직계장손인 석경운(昔璟雲)은 고려 인종 때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에 제수되었다고 한다. 세대상 10세기 초에 살았을 인물이 12세기의 인물인 인종으로부터 벼슬을 받은 것이다.

한편 인터넷에서 월성 석씨의 중시조라고 알려져 있는 석재흥(昔載興)은 석제만의 장증손으로, 석탈해의 22세손이다. 고려 때 교서랑(校書郞)을 지냈다는 사람이 태종 무열왕 때의 대장군의 증손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석보의 직계장손인 16세 석항(昔恒)의 딸이 경명왕의 왕비라고 한다. 세대상 7세기 초에 살았을 인물이 10세기의 인물인 경명왕과 혼인한 것이다.

이상에서 보이듯 석씨의 족보가 전하는 조상들의 계대는 사실 여부의 검증이 불가능하고 현실성이 매우 떨어지는 부분이 많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석씨에게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고, 그 기원을 신라나 고려에서 찾는 절대다수의 가문들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오늘날과 같은 체계적인 족보는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각 집안별로 직계 조상만 기억해 적어두는 정도에 그쳤는데, 그러다 보니 다른 조상들이 정확히 언제 태어났으며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상당수였기 때문이다.

석항의 직계장손인 28세 안성공(安成公) 석양호(昔良浩)의 대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2.2. 실존인물

3. 가상인물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성씨이다 보니 남성 캐릭터가 많다.

4. 불교 승려가 사용하는 성씨

어원은 석가모니의 석.

엄밀히 말하면 속세의 일반적인 성씨와는 다르고, 동아시아 불교의 한 가지 관습이다. 속세의 출신과 상관 없이 승려가 되면 법명 앞에 붙여 성씨처럼 쓴다.

영원히 부처의 제자가 되기를 맹세하였으므로 부처의 성씨를 따라 석씨를 쓴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승려가 석씨를 사용함은 중국 동진의 고승 석도안(釋道安 314~385)이 제안한 바에서 유래했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의 고승 원광법사는 삼국유사에 석원광(釋圓光)으로 기록되었다. 베트남 불교에도 이 관습은 지금까지 유지된다. 베트남 승려 틱낫한(釋一行, Thích Nhất Hạnh) 또한 법명을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으면 '석일행'이 되는데, 이 관습을 따라 작명한 것이다.

다만 현대 한국 불교에서는 자신을 속성(속세 때 성)+법명으로 칭하는 승려 역시 상당수 있고, 석씨를 쓰는 관습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다.

5. 我姓石

GUXI라는 중국의 EDM 작곡가가 만들었다. 해당 문서 참고.
[1] 충주 石씨 문중 일각에는 스스로의 가문을 월성 昔씨의 일파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한자는 石를 쓰면서 본관은 월성으로 기록한다.[2] 경주 김씨는 왕위를 거의 독점했으니 말할 것도 없고, 밀양 박씨 역시 외척으로 영향력을 계속 행사했고 신라 말기에는 다시 밀양 박씨 세습왕조가 부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