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9 22:17:12

원광


圓光
(542/555 ~ 630/640)

1. 개요2. 생애

1. 개요

신라승려이자 중국에서 배워온 새로운 불교지식을 신라에 전파한 고승. 속세 성씨는 박씨(朴氏) 혹은 설씨(薛氏)[1]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속고승전, 수이전에 수록돼 있다. 다만 수이전은 행적이 많이 다른데 현대 학계에서는 수이전보다는 속고승전 등의 내용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2. 생애

본래 유교, 도교 등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중국에서 학문을 배워오기 위해 25세 때 유학생으로서 중국 남조 진나라의 수도 금릉으로 건너갔다가 중국에서 어느 날 사찰에서 강의를 듣고는 불교 사상의 심오함에 감동해 돌연 출가를 결심해 566년에 불가에 입도해 승려가 되었다는 두 가지 기록이 있다. 즉 대부분 신라 출신 유학승이 출가한 후에 중국에 유학한 것과 달리 원광은 원래 신라에 있을 때부터 승려는 아니었고 유학을 간 이유도 다른 학문을 배우러 간 것인데 중국에서 공부하다가 불교에 귀의한 케이스다.

578년에 중국 진(陳)나라금릉 장엄사에서 열반경, 성실론을 집필했으며, 서주의 서산사에서 구사론을 집필하면서 연구했다. 진나라에서 수나라로 바뀔 때는 전쟁통에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다 겨우 살아남기도 했다. 속고승전에 의하면 588년 진나라가 멸망할 때 원광이 사찰의 탑 앞에 묶여 군인들에게 해를 입으려 하는 찰나 멀리서 이를 본 수나라 장수에 의해 구출됐다고 한다. 결국 원광은 폐허가 된 금릉 대신 589년에 수나라의 장안에서 섭대승론을 배웠고 이미 노년에 접어든 600년에 신라 사신 일행과 함께 고국 신라에 귀국했다. 중국에서 명망 높은 고승이 된 원광에게 돌아와 달라고 신라 본국에서 줄곧 귀국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신라수이전을 인용해서 원광의 유학 과정을 더 실감나게 그리고 있는데, 요약하면 원광의 유학에 삼기산의 신령이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다. 571년에 원광이 삼기산에서 금곡사[2]를 지어 수도하고 4년 정도 지나서 인근에 주술을 좋아하는 승려가 와서 암자를 짓고 2년을 살았다. 어느 날 원광이 수행하는데 어딘가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는 신이 원광의 수행을 칭찬하면서 "내가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얼마 전에 이 근처에 와서 살고 있는 그 주술 좋아하는 승려 말인데, 내가 그 근처로 지나갈 때마다 그가 주술 부리는 주문을 들을 때마다 진짜 짜증이 나서 언제고 저걸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는 중이다. 내가 괜한 살생을 하지 않게 그 승려더러 어디 다른 데로 옮겨가 달라고 말 좀 전해 주시라"라고 말했고, 원광은 그 신의 말대로 다음날 그 승려의 암자를 찾아가서 자신이 간밤에 들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다른 데로 옮겨 갈 것을 권했지만, 승려는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귀한테 다 홀리는 모양이다. 그딴 여우 요괴 따위가 뭐가 무섭다고"라고 코웃음을 치며 원광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날밤 원광이 금곡사로 돌아왔을 때 그 신이 다시 와서 자신의 말을 전했느냐고 원광에게 물었고, 원광은 "아, 제가 오늘 깜빡하고 미처 얘기를 못 했어요. 제가 내일은 꼭 가서 신령께서 하신 말을 전하겠습니다."라고 둘러댔다. 그러자 신은 "내가 그 중놈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다 들었는데 왜 나한테 지금 거짓말을 해? 당신 이제부터 나서지 말고 내가 하는 것만 입 다물고 보기나 하시오."하고는 사라져 버렸고, 그날밤 벼락이 치는 소리가 났다. 다음날 원광이 깨어서 그 승려가 있던 암자에 가 보니 암자는 산사태로 파묻혀 있었다. 그 신은 다시 원광에게 와서 자신은 이미 3천 년이나 살았고 이 정도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아니며, 원광에게 서쪽으로 유학을 가서 불교를 제대로 공부할 것을 권했다. 이 신은 원광이 유학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고, 11년 뒤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원광은 신에게 감사를 표했고, 신은 원광으로부터 앞으로의 태어나는 내세마다 서로가 서로를 구제하자는 수기를 맺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원광에게 내일 아침 동쪽 하늘을 보라고 했는데, 원광이 다음날 동쪽 하늘을 보니 크고 굵은 팔뚝이 산의 언덕 사이에서 구름을 뚫고 하늘까지 솟아 있었다. 놀라는 원광에게 신은 "이제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며칟날에 어느 고개에 와서 내 마지막 가는 길을 장송해 달라"고 부탁했고, 원광이 약속한 날에 가봤더니 온몸이 시커먼 늙은 여우 한 마리가[3] 숨을 헐떡이고 있다가 원광이 오자 조금 뒤에 숨을 거두었다. 원광이 신의 거대한 팔뚝을 본 산은 이후 비장산(臂長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귀국 이후 그 동안 중국에서 터득한 새로운 불교 지식을 신라에 전수했으며, 임금과 신하의 스승이 되어 1년에 두 번씩 정기적 강의를 했으며 불교 관련만이 아니라 일반 청소년들에게도 스승이 되었다. 대표적 사례로 경상북도 청도로 내려가서 가실사에 머물면서 귀산, 취항 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좋은 말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하자 세속오계를 제시하면서 이를 통해 신라 화랑도의 중심이념을 마련했다. 608년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자주 침범하자 진평왕이 수나라에게 걸사표를 지어 도움을 청할 것을 명하자 수나라에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요청하는 걸사표를 지었다.[4] 613년 가을 7월에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가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자 원광 등이 맞아들여 불경을 강의했다.

615년에 황룡사에서 인왕백고좌회를 열어서 인왕경을 강설했다가 630년에 입적했으며, 장사는 명활산에서 지내졌고[5] 삼기산 금곡사에 부도(訃屠)가 세워졌다. 수제자로 원안(圓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1] 해동고승전[2] 조선 시대까지 있었지만 6.25 때에 파괴되었고, 지금은 백련암이라는 암자가 들어서 있다. 경내에 원광의 부도탑이 남아 있다.[3] 처음에 원광의 말을 듣지 않던 승려가 "여우 요괴 따위가 뭐가 무섭냐"라고 했던 말을 돌아보면 그 승려가 신의 정체를 얼추 맞춘 것이다.[4] 사실 원광은 승려이므로 걸사표를 쓰고 싶지 않았다. 진평왕의 명에 대답하기를 "자기가 살기 위하여 다른 이를 멸하는 것은 승려에 걸맞은 행동이 아닙니다만, 저는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물과 곡식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남조 진과 수에서 오래 학문을 닦은 원광의 한문 실력은 당대 신라에서 제일이었을 것이고 수나라에 보내는 중요한 외교문서인 만큼 원광이 승려임에도 강제로 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5] 속고승전에 따르면 원광이 사망했을 즈음에 어떤 사람이 집에 아이가 사산되어 태어나자 “복이 있는 사람의 무덤에 그것을 매장하면 자손이 끊기지 않는다”는 속설을 믿고 그 사산된 아이를 몰래 원광의 무덤 옆에 묻었는데, 그날 벼락이 쳐서 그 사산된 아이 시신을 땅에서 파내서 내던져 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