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05:47:32

세속오계

1. 개요2. 내용3. 사상적 배경4. 해석5. 평가6. 여담

1. 개요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삼국사기의 귀산 열전에 기록된 다섯 가지 계율로, 신라 진평왕가실사(加悉寺)에 머무르던 원광법사[1]에게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두 청년이 찾아와서 '평생 마음에 새길 경구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제시해 준 것이다. 원광이 직접 이 오계를 창안한 것인지 아니면 이전부터 존재하던 오계를 강조해서 이야기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드물게 줄여서 '오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2. 내용

  •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어야 한다.
  •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로써 부모를 섬기어야 한다.
  •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 한다.
  •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3. 사상적 배경

언뜻 보기에는 원광법사라는 스님이 가르쳤고, 충효를 말하고 있어서 유교불교의 깊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2][3] 이 시기 신라 사회에서 유교와 불교는 아직 그 뿌리는 깊이 내렸다고 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4] 신라에서 '왕'이 군주의 호칭으로 확립된 것이 지증왕 때이며, 이전까지 사용했던 각종 호칭(특히 차차웅)이 신권정치의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신라에서는 아직도 샤머니즘적인 무속신앙이 지배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신라 특유의 신앙을 고신도사상(古神道思想) 혹은 풍류(風流)[5]라고 불렀는데, 세속오계는 이러한 당시 신라인 특유의 사상이 압축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4. 해석

사군이충과 사친이효는 유교적 미덕인 충과 효를 강조하고 있는 항목이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정통 유교의 입장과는 반대로 충이 효보다 앞서고 있다는 점이다.[6] 이러한 점에서 신라인들이 지니고 있던 강한 공동체 의식을 찾을 수 있다. 교우이신 역시 단순한 우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함께 할 것을 약속하는 유교의 그것보다 훨씬 강한 성격이었다.[7] 살생유택은 불교의 영향이 깊이 드러나는 대목이지만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불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최대한 인간다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임전무퇴는 전쟁이 많았던 6~7세기 삼국통일전쟁 시기에 매우 중요시되었던 사상으로, 원광법사에게 세속오계를 전수받은 귀산과 추항은 이 계율에 따라 훗날 벌어진 백제와의 아막성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8] 이에 사기가 고무된 신라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승리하여 신라군의 대승으로 끝났고. 백제군은 말 한 필, 수레 한 대조차 돌아가지 못했고 지휘관인 해수는 단신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진평왕은 귀산을 사후 나마에 추증하였고, 추항을 사후 대사로 추증하였다. #

어떻게 보면 반굴, 관창의 선배격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삼국사기 열전에는 이렇게 7세기 신라의 인물 중 불리한 전투에서 분투해 전사한 후 아군에게 용기를 주는 식의 이야기를 지닌 인물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를 지키지 못하고 도망쳐서 살아남은 김원술[9], 김흥원 등은 임전무퇴를 지키지 못한 것이 평생 치욕으로 남게 된다.

세속오계에 대한 서술은 삼국사기의 인용 고문헌 중 김대문화랑세기에 근거를 둔 이야기로 추정된다.

5. 평가

세속오계는 고신도사상적 무속신앙을 통하여 신과 인간이 합일할 수 있는 차원에서 이룩된 순수성을 바탕으로 강력한 공동체의식과 철저한 의리정신, 숭고한 희생정신, 그리고 선량한 인간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이는 단순히 신라인들의 시대정신을 표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랑도사상의 구체적 실천 덕목을 약여(躍如)하게 부각시키고 이념적 체계를 가다듬게 함으로써 화랑도 발전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이리하여 직접적으로는 신라로 하여금 삼국통일의 위업을 성취하고 세계사상 유례가 드문 천년왕조의 영광을 누리게 하였고, 간접적으로는 후대에 와서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거세게 밀어닥친 외래문화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 민족 특유의 순수선량하고도 의연한 민족성을 이어오는 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리고 민족적 전통사상의 도도한 흐름을 타고 고려왕조의 처절한 항몽정신(抗蒙精神)과 조선왕조의 의리사상, 한말의 의병정신, 그리고 일제하에서의 독립정신 등으로 이어지는 불굴의 민족정기의 맥락은 모두 이 세속오계의 정신을 통해 튼튼하게 다져진 것이라 하겠다.

- 세속오계 [世俗五戒]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여담

제11기동사단의 표어이다.[10]


[1] 중국 수나라로 유학을 다녀온 만큼 상당한 학문의 깊이를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이 시기 승려들은 귀족 출신이 많았다. 원효도 6두품 가문이었다.[2] 사군이충은 오륜의 군신유의와 다르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서 오계에서는 충성을 강조했지만, 오륜에서는 의로움을 강조했다. 사친이효는 오륜의 부자유친과 다르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서 오계는 효를 강조했다면, 오륜은 친밀해야 함을 강조했다. 오계 중에서 오직 '교우이신'만이 오륜의 붕우유신과 비슷하다.[3] 임전무퇴나 살생유택에서 보듯 싸움에 관한 이야기는 불교에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이다. 승려로서 하기는 어려운 이야기. 따라서 세속오계와 같은 비슷한 가르침이 신라시대에 이미 전래되고 있었고, 이렇게 전해지는 율법을 원광법사가 정리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4] 유교는 삼국통일 이후인 신문왕이 즉위한 이후에야 국학의 설치를 통해 본격적으로 신라 사회에 보급된다. 불교묵호자 관련 기록과 사금갑 설화에 드러나듯이 5세기 초부터 이미 신라에 전래되어 있었지만, 토착 신앙과 갈등을 겪다가 법흥왕 때에야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공인될 수 있었다.[5] 신라 최치원이 난랑비서에서 풍류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6]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혹은 충신출어효자지문(忠臣出於孝子之門)이라는 말에서 보이듯이 정통 유교는 효에서 충이 파생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의 대표적인 사례가 구한말 서울진공작전을 목전에 앞두고 의병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자 "효를 다하지 못하고 충을 세울 수 없다."라며 낙향한 사건이다.[7] 임신서기석이나 사다함무관랑의 일화가 좋은 사례이다. 이런 신라인들의 강렬한 우애를 일종의 신앙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고대 사회에서는 꽤나 보편적이었던 동성애로 보는 견해도 있다.[8] 심지어 이 때 귀산의 아버지인 무은이 낙마하는 사고가 벌어졌는데 이 때 귀산은 후퇴하자는 제안을 뿌리치고 적진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구해냈다.[9] 항목에서 알 수 있듯 신라 천년사의 노익장 김유신의 아들이다. 김원술이 전투에서 패하고도 살아 돌아왔다는 것은 단순히 김유신과 그 가문뿐만 아니라 화랑 제도, 나아가 신라를 욕되게 한 중한 일이었다. 물론 2020년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아들을 평생 안 보고 의절한 김유신과 지소부인 부부가 매우 비정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원술은 이후 매소성 전투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지만 어머니 지소부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용서를 안 한 아들을 어찌 어미가 용서할 수 있겠느냐."라며 끝내 품지 않았다.[10] 참고로 이 부대의 별칭이 화랑부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