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1 23:05:59

지소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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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부인 | 智炤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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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태종 무열왕의 왕녀
김지소 | 金智炤
이름 지소(智炤)
출생
627년 이후?
사망
미상
본관 경주 김씨
골품 진골(真骨)
부왕 태종 무열왕
모후 문명왕후
부군 흥무왕
형제자매 형제 - 문무왕, 김인문, 김문왕,
김노차(金老且), 김인태(金仁泰),
김지경(金智鏡), 김개원(金愷元)
자매 - 김고타소, 요석공주,
원성왕의 증조할머니
자녀 슬하 5남 4녀
아들 - 김삼광, 김원술, 김원정(金元貞),
김장이(金長耳), 김원망(金元望)
딸 - 4명
지소부인(智炤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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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

1. 개요

태종 무열왕의 3녀. 김문희 소생으로, 외삼촌김유신의 부인이기도 하다.[1]

참고로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부인(只召夫人)과는 한자가 다르다.

2. 내용

655년 10월에 환갑을 맞은 외삼촌 김유신과 결혼했다. 그리고 김유신과의 사이에서 김삼광, 김원술, 김원정, 김장이, 김원망 다섯 아들과 이름이 전하지 않는 딸 넷을 낳았다고 한다.

결혼 당시 지소부인의 나이에 대해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신라본기 성덕왕 11년(712) 기록에서 김유신의 아내가 살아있으며 존칭과 곡식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등장하므로, 655년에는 10~20대의 젊은 연령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재혼하는 경우가 아니면 그쯤에 결혼하는 것이 전근대 사회에서는 정상적이기도 했다.

김유신이 환갑 때부터 79세로 사망할 때까지 5남 4녀를 낳았다는 것인데,[2] 금슬은 매우 좋았던 듯하다. 그러나 만약 장남 김삼광이 삼국사기 기록대로 그녀의 아들이라면 10대의 너무 어린 시기부터 활약하기 시작하는 것이나, 과연 김유신이 60이 되는 그때까지 정식으로 결혼해서 적자를 보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아 삼국사기의 이 시기 기록들이 다소 부정확하다는 의혹도 있다.

다만 김유신에게 661년 시점에 전쟁터에 참여할 만큼 장성한 서자 김군승(金軍勝)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지소부인과 혼인하기 전에도 분명히 부인은 있었을 것이다. 당시는 신분 상관 없이 혼인은 사실상 필수였고 그것도 신라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당시 골품제의 최상위 계층이라 볼 수 있는 진골의 골품으로서는 부인이 없는 것이 이상한 것이기에 사실상 이쪽의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왕실의 공주인 지소부인과 혼인해서 (아마도 그보다는 신분이 낮았을) 전 부인의 아들이 서자의 격으로 내려간 것인지, 아니면 김군승의 어머니가 원래 첩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유신이 젊을 적 연애했던 천관녀의 아들이 김군승이란 설도 있다.

결혼 당시부터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만큼 김유신이 죽고 과부가 된 뒤로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로 출가했다고 하며,[3] 아버지에게 의절당했던 아들 김원술이 기어코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매소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지만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유신이 그녀에게 유언으로 원술을 들이지도 용서도 하지 말라고 했었을 것이다. 이후에는 위에서 적었듯 40여년이 지난 성덕왕 11년까지 장수해서 왕실의 어른으로 존중을 받았다.


[1] 문희 소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닐 수도 있다는 설도 있다. 참고로 고대 사회에서는 혈통의 고귀함과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왕족이나 상류층에서 근친혼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신라에서도 특히 중기 전후로 성골 등 왕족이나 최고위 귀족들에서는 근친혼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는데, 신라에서 부모 중 낮은 신분을 자식이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는 설에 따르면 성골끼리만 혼인하다 보니 근친혼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고 신라 중기에 성골이 감소하자 이런 현상은 더욱 늘어났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골은 씨가 말라버리고 말았다. 다만, 성골이 다한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아직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2] 여성은 40대 이후로 임신이 어렵지만, 남성은 건강하다면 이론상 죽을 때까지 임신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환갑 넘어서도 자식 본 사람으로 삼국지조조, 공자의 부친, 김용건 등이 있다.[3] 이 과정에서 문무왕은 김유신의 가족들이 평생 먹고살 수 있게 많은 재물들을 내렸으나, 지소부인은 비구니가 되는 과정에서 이것들을 마다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고 기부를 선언하였다. 출가한 절에선 남편 김유신을 비롯하여 김유신 내외의 조상들과 장병들의 명복을 빌고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