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3:23:27

함평 모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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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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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모씨(咸平 牟氏)
관향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시조모경(牟慶)
인구(2015년)20,644명

1. 개요2. 인구3. 시조
3.1. 행적3.2. 충정공 회국시
4. 본관
4.1. 상곡리
5. 계파 및 분파6. 실존인물
6.1. 전근대6.2. 현대
7. 여담

1. 개요

대한민국 내 모씨의 유일한 본관.

얼핏 들으면 털 모(毛) 한자를 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보리 모(牟) 한자를 성씨로 사용한다.

2. 인구

대한민국 100위권내 성씨 중 하나로 현재 통계청 기준 대한민국에 21,534명(2020년)이 살고있다. 성씨 순위 91위지만 비슷한 인구를 가진 옥씨(86위 25,107명), 맹씨(89위 22,028명)등보다 인지도가 떨어진다.

드라마 연출가 모완일, 前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모태범, 가수 모지혜, LG 트윈스 타격코치 모창민 등 유명한 인물들이 소수 있기는 한데, 보리 牟가 생소한 한자라 털 毛를 사용하는 성씨로 오해 받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듯하다.

3. 시조

시조는 충정공 모경(牟慶) 대장군(大將軍)[1]으로 북송에서 넘어와 고려에서 개파했는데, 사실상 금나라에 의해 북송이 망하게 되어 고려에 남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는 고려에서 일어난 이자겸의 난을 진압한 일등공신이다. 고려 정부로부터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이라는 공적을 받았고, 후에 고려에 귀화하여 전라도 함평군수를 지냈다. 앞서 중국에서는 병부상서와 호북경서선무사, 이부상서, 대사마 대장군, 시찰단장으로 지낸걸 보면 타고난 무인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낮은 인구 수의 영향인지 현재 잘 알려지지 못했으나 몇몇 위인전에서는 다루고 있다.

한편 삼국시대 고구려광개토대왕이 정복한 부여를 관리하기 위해 북부여수사라는 관직을 주어 파견한 모두루(牟頭婁)라는 인물의 묘지명이 발굴되었는데 모두루의 가문은 초대 국왕인 동명성왕대부터 고구려 왕실을 섬기며 공을 세워온 직속 가신 가문으로 여겨진다. 성씨 사용이 활발하던 시절이 아니라 모두루가 그냥 이름인지 성+이름인진 불분명하나 성씨를 사용한 것이 맞다면 고구려에서 모씨는 부여 지역[2]을 세습적으로 관리해온 귀족 가문이 된다. 모두루는 부임지인 부여에서 광개토대왕의 승하 소식을 들었는데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백제 문주왕의 성씨가 모씨(牟氏)라는 기록이 있다. 문주왕이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송(宋)나라와 주고받은 서신에서 등장한다. 삼국유사에도 모씨(牟氏)가 등장하는데, "백제 동성왕은 '모대(牟大)', 문주왕의 동생이자 곤지의 아들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말다(末多)'로 기록되어 있는데, 발음은 비슷하다. 참고로 혈연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문주왕의 동생이라는 기록과 문주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둘 다 있어서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3]

한편 최근 발굴된 백제의 목간에서 6품 나솔을 역임한 모씨(牟氏)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예 이름이 모씨였는지 이름을 제외한 그냥 성씨만으로 모씨라 적힌 건지는 불명.

3.1. 행적

충정공(忠正公) 모경(牟慶) 대장군

1100년 병부상서
1100년 호북경서선무사
1126년 이부상서
1126년 대사마대장군
1126년 고려 협상 사절단 단장
1126년 이자겸의 난 일등공신
1126년 추충분의 익대좌명공신
1128년 전라도 함평군수

중국 북송 6대 신종(1068~1085 재위)대에 옹주 홍농군(雍州 弘農郡,지금의 河南省 三門峽 남쪽)에서 출생(추정)하여

서기 1100년(북송 7대 휘종, 고려 철종15년) 병부상서호북경서선무사에 임명되어, 금군이 남침해 왔을 때 3만 군대로써 애산(崖山)에서 격퇴하고 1126년7월 (북송 9대 흠종 원년, 고려 17대 인종 4년)에 이부상서대사마대장군에 임명된 후 고려협상사절단(協商 使節團)의 단장으로 파견되었다.
       
협상안건은 북쪽의 금나라(금태조 완안아골타가 1115년 건국하여 국호를 '金'이라 함)가 북송을 공략하고 있으니 고려가 지원군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고려의 입장은 불과 몇 달전에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어린 왕(인종)을 잡아가두는 사태까지 있어서 국내사정상 외국에 지원군 파견 불가하다 하여서[4] 그 결과 북송의 협상 사절단(協商 使節團)은 고려의 국내사정을 이해하여 더 이상 요청을 하지 못한 채 귀국. 이때 牟공은 고려의 충신 정지상을 도와 이자겸의 난 수습에 협력해 준 공로로, 고려 정부로부터 추충분의 익대좌명공신이란 공적을 부여받고 귀국했다.
 
1126년 10월부터 1127년 4월까지 金나라의 대대적인 남침공격으로 북송의 수도 동경개봉부(지금의 하남성 開封)가 함락되고, 투항파(진회秦檜 등)들의 모함으로 牟공과 악비(岳飛) 장군 등이 투옥되었다. 이때 수도에 입성한 金군들은 온갖 노략질을 다한 후 북송의 휘종, 흠종 등 두 황제와 문무백관 3,000여명을 포로로 잡아 金나라의 오국성(五國城) 인근에 감금하였다. 중국 역사에서는 이를 “정강의 변” 이라고 하였다.

1127년 5월 (남송 고종 원년, 고려 인종 5년) 흠종의 동생이 중국 남쪽으로 피신하여 <남송>을 건국하고, 재상 이강의 탄원으로 牟공과 악비(岳飛)장군을 석방하게 된다.
 
1128년 6월 (남송 고종 2년, 고려 17대 인종 6년) : 牟공이 고려에 협상 사절단으로 두 번째 파견된다.

이때 사절단은 고려의 동해를 따라 金나라에 몰래 잠입하여 오국성에 유배중인 북송의 두 황제(휘종, 흠종)를 비밀리에 구출해 오고자 하오니 고려의 협조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이미 金나라의 강요로 형제관계를 맺었고 만약 이런 공동의 비밀작전이 金나라에 발각되는 날이면 金나라는 고려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었다. 따라서 국익상 남송의 요청을 들어줄 수가 없다고 하여 사절단은 사뭇 못마땅한 기색으로 마지못해 귀국하였으나, 牟공은 귀국을 포기한 채 고려에 남아 귀화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인종은, 2년전 이자겸의 난 때 협조해 준 牟공의 공로 등을 감안하여, 전라도 함평군수의 직위와 함께 공주를 牟공의 배필로 삼아 정착토록 하였다.
 
1143년 (인종21년)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3.2. 충정공 회국시

1135년경 金의 오국성에 유배중이던 두 전 황제가 金나라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비보를 접한 충정공은 울분을 참지못해 자결을 시도했으나 정지상 등의 만류로 자결을 포기한 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울분을 토로하셨다.
-충정공 회국시(忠正公懷國詩)-

安得精兵超岱崇 어떻게 정병을 길러 대숭(泰山)을 넘어가서
直屠金虜立成功 금나라 오랑캐를 모조리 죽여 공을 세울꼬.
忽聞五國城消息 갑자기 오국성(두 황제가 유배된 곳) 소식 듣고서
未返孤臣老海東 돌아가지 못하는 외로운 신하는 해동(고려)에서 늙도다
- 牟慶 作 -

4. 본관

함평군(咸平)은 전라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백제의 다지현(多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다기현(多岐縣)으로 고쳐서 무안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때 다기현을 모평현(牟平縣)으로 바꾸었고, 1018년(현종 9) 영광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가 파견되었다. 1409년(조선 태종 9년) 모평현(牟平縣)을 함풍현(咸豊縣)과 합하여 함평현(咸平縣)으로 개편하였다.

현재 모씨가 함평 모씨와 함풍 모씨로 나눠진 이유로 함평 모씨가 주축이다.

집성촌으로는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 전라북도 남원군 대산면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등이 있고 20가구 이상 모여사는 곳을 합치면 30여 군데이다.

4.1. 상곡리

상곡리 모평(牟平)

이 마을은 주위에 고인돌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선사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으리라 믿어지며 함평 모씨(牟氏)가 개촌(開村)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고 기실 함평모씨의 보첩에 임천산간좌(林泉山艮坐)에 시조묘를 비롯 2세, 3세의 묘가 있고 자양산에 4세의 묘가 있었으나 실전했다고 적고 있다. 임천산과 자양산은 모두 모평에 이웃해 있는 산으로 모평이 모씨가 개촌한 마을이라는 전언은 사실 그대로인 것으로 여겨지며 이곳은 옛 모평현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곳이어서 마을이름 또한 모평이라 했다. 이 마을을 비롯한 옛 다지현 일대가 마한 때 54소국중 하나였던 모수국(牟水國)일 가능성이 있다는 마한소국 위치 비정론이 있어 학계에서 모수국(牟水國)과 모씨(牟氏), 그리고 모씨와 모평(牟平)과의 관계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 모씨의 뒤를 이어 입촌한 성씨가 파평윤씨다. 입향조는 윤길(尹吉 1368년생)이며 세조2년(1457) 절재 김종서의 제문에 "공은 죽을 곳에 죽었도다. 천년의 긴 역사가 공으로 하여금 다시 밝아지리다(公死於死 千載之下 春秋之史 由公更明)"한 것이 세조의 미움을 받아 90세의 나이에 제주도로 귀양갔고 귀양이 풀려 돌아오는 길에 상곡리의 산수에 흠취하여 정착했다고 하니 1460년경이다. 그 후손이 번창하여 현재는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고 개촌했다는 함평모씨들은 한 집도 살지 않는다. 이리하여 입심 좋은 어떤 이는 모평이란 이를 함평모씨에서 "牟"자를 따고 파평윤씨에서 "平"자를 따 모평(牟平)이라 했다고 하는데 이는 고려 때이며 모평현의 모평이었음을 볼 때 잘못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조선조 중기에 이르러서는 모평을 "牟"자를 빼고 상평지(上平地 1789년 호구총수지명) 하평지(下平地) 중평지(中平地)로 불렀으며 1912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부터는 상모(上牟)와 하모(下牟)라고 불렀고 이후 다시 옛지명인 모평(牟平)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는데 상 하로 나누어 상모평(上牟平), 하모평(下牟平)이라고 한다.

상곡리 운곡(雲谷)

모평이 점차 커지자 파평윤씨 일가가 이주하여 윤씨촌을 이루면서 후에 상산김씨, 진주정씨, 전주리씨 등이 입촌하게 되었다. 모평의 파평윤씨 입향조 윤길(尹吉)이 골짜기에 끼이는 구름이 신선도를 보는 듯한 천하일품의 경관이라는 점에서 마을 이름을 운곡(雲谷)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5. 계파 및 분파

죽파공파(竹圃公派) 파조(派祖) 봉(菶) 16세(世)
경암공파(敬庵公派) 파조(派祖) 봉(芃) 16세(世)
수정공파(壽亭公派) 파조(派祖) 우하(遇夏) 16세(世)
해은공파(海隱公派) 파조(派祖) 헌(憲) 16세(世)
구암공파(龜岩公派) 파조(派祖) 기(夔) 16세(世)
벽담공파(碧潭公派) 파조(派祖) 상득(尙得) 16세(世)
군자감정공파(軍資監正公派) 파조(派祖) 고적(高勣) 16세(世)
갈산공파(葛山公派) 파조(派祖) 언욱(彦郁) 16세(世)
부사공파(府使公派) 파조(派祖) 은(蒑) 16세(世)
곡산공파(谷山公派) 파조(派祖) 만남(萬楠) 16세(世)
운곡공파(雲谷公派) 파조(派祖) 진권(進勸) 16세(世)
제월공파(霽月公派) 파조(派祖) 진서(進瑞) 16세(世)
죽은공파(竹隱公派) 파조(派祖) 웅걸(雄傑) 16세(世)
지곡공파(智谷公派) 파조(派祖) 태산(泰山) 16세(世)
수사공파(水使公派) 파조(派祖) 경직(敬直) 16세(世)
서산공파(瑞山公派) 파조(派祖) 효원(孝元) 16세(世)
기곡공파(基谷公派) 파조(派祖) 방형(方亨) 14세(世)
절강공파27대손

6. 실존인물

6.1. 전근대

  • 모순(牟恂) : 부친은 첨정(僉正) 모세택(牟世澤)이고, 장인은 정존(鄭存)이다.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金叔滋)와는 과거시험을 치를 때 알게 되어 교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1417년(태종 1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6위에 급제하여 거창현감(居昌縣監), 좌우헌납,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사헌집의(司憲執義),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좌사간(左司諫), 의정부(議政府)의 사인(舍人)과 검상(檢祥) 등을 지냈는데 지합천군사(知陜川郡事)로 재임하던 중에는 선정을 베풀었다. 1443년(세종 25)에는 군기감정(軍器監正)으로서 체찰부사(體察副使)의 임무를 띄고 일본(日本)의 도적들이 납치해 간 조선 백성을 찾아오기 위해 7월말에 대마도(對馬島)에 가서 11월초에 돌아왔다. 이때 적왜(賊倭)를 잡은 공로로 두 자급(資級)이 올랐다. 1446년(세종 28) 전제소별감(田制所別監)에서 회양부사(淮陽府事)를 제수받았다. 1455년(세조 1)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었으나,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여 진주(晉州)로 유배를 가 사봉면(寺奉面) 방촌리 뇌동에서 세상을 떠나니 괘종산에 장사하고 후손들이 대대로 방촌리 등건(登巾)에 살았다. 효자로 이름나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효자 통정대부 행 좌사간 함평모공순지려(孝子通政大夫行左司諫咸平牟公恂之閭)”라 음각된 진주 모순 정려비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95호로 지정되었다.[5]
  • 모정(牟禎), 모극심(克諶), 모수명(牟受明), 모윤성(牟允誠) :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병에 맞서 싸웠다.
  • 모유추(牟有秋) : 모정(牟禎)의 증손. 1662년(현종 3년) 무과에 급제하여 양덕현감(陽德縣監)을 지냈다.
  • 모일성(牟一成) : 언양현감(彦陽縣監)
  • 모세무(牟世茂, 1637년 ~ ?) : 조선 숙종 때 흥양현감(興陽縣監)
  • 모세번(牟世蕃, 1640년 ~ ?) : 모세무의 동생. 1669년(조선 현종 10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다.
  • 모경관(牟景觀, 1709년 ~ ?) : 1750년(영조 26)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내고, 1757년(영조 33)부터 1759년까지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지냈다.
  • 모달겸(牟達謙, 1749년 ~ 1821년) :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경양찰방(景陽察訪)에 임명된 뒤 1792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좌랑(禮曹佐郎)을 지냈고, 1793년 황해도사(黃海都事)·훈련주부(訓鍊主簿)를 거쳐 1803년 보시관(補試官)에 임명되었고, 1806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온릉영(溫陵令)을 지냈다. 1811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재임시에는 민막(民瘼) 및 과폐(科弊) 구제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다. 사헌부장령으로 있으면서 바른말을 잘하고 권신간배들을 가차없이 탄핵하여 ‘모장령의 직언(直言)’이라는 말을 들었다. 1812년 예조좌랑, 1813년 사헌부장령과 전주의 복시관(覆試官)을 역임하였으며, 1814년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대정현감(大靜縣監)을 지내면서 청백한 관리생활로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 모수명(牟受明) : 조선 말기의 서예가. 호 기초(箕樵). 전남 함평 출신. 초서와 해서를 잘 썼다. 만년에 호남지방을 돌아다니며 서법(書法)을 가르쳤다. 이때 3개월 내에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수업료 200냥을 받지 않았다 한다. 그의 서체(書體)를 모체(牟體)라 한다.
  • 모광정(牟光炡) : 고려 의종 때 밀직부사를 역임했다.
  • 모호(牟皓) : 명종조에 전서를 지냈다.
  • 모충이(牟沖伊) :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6.2. 현대

나무위키 문서가 있거나 등재 기준을 만족할 정도로 저명성이 있는 인물만 기재합니다.

7. 여담

보리 牟씨의 근대 인물에 의병활동,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 많은 반면, 비슷한 털 毛 성씨 인물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모윤숙이 있다는 점에서 꽤나 대조적이다.한 쪽은 애국, 다른 한 쪽은 매국

마오쩌둥의 모씨는 털 毛 한자를 쓴다.


[1] 현대로 치면 국방부장관.[2] 부여성을 중심으로 한 현 중국 지린성 창춘시 일대.[3] 그러나 백제의 왕성은 부여씨였고 문주, 모대, 말다 등은 그냥 이름으로, 당시의 고유어를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본다(모두 당시 말로 '맏이'의 음차로 추정된다). 모를 성씨로 사용한 것은 다른 사서에도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가능성은 매우 떨어진다. 혈연적인 부분은 보통 동성왕이 문주왕의 동생인 부여곤지의 아들인 것으로 본다.[4] 그해 3월에 이자겸의 난 발생 → 5월에 척준경 등이 진압함.[5] 도덕교과서에서 간혹 언급되는 병든 부모를 위해 멀리 약을 구하러 갔다가 홍수로 인해 강물이 불어나자 통곡해 비가 멈추었다던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주고 허벅지 살을 잘라 구워 드렸다는 일화가 이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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