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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제 | 연등회 | 팔관회 | 풍어제 |
1. 개요
八關會팔관회는 신라 진흥왕 때 불교의 팔관재계를 지키기 위해 열렸던 불교법회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사 교육과정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같이 시작한 연등회와 세트로 묶이는 경우가 많은데, 차이점은 연등회가 불교 행사라면 팔관회는 불교 행사기는 하지만 차츰 불교적 색채가 옅어져 무속 신앙의 제천행사의 성격이 있었다.[1] 그리고 팔관회는 고려가 멸망하면서 맥이 끊겼고 연등회는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다르다.
2. 역사
2.1. 신라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팔관회는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한 이후 진흥왕이 그에게 불교교단과 각종 의식을 정비하도록 했는데 이에 산천용신제와 10월 제천행사 등의 토속신앙의 종교의식과 불교의식을 결합해[2] 죽은 장수와 병졸들을 위로하기 위해 연등회와 더불어 개최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898년 11월, 아직 나라를 세우기 전의 궁예가 송악(개성)에서 팔관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이때는 전몰자 추모의 성격이 강했다.
2.2. 고려
팔관회에는 예법에 따라 화려하게 장신한 의식용 기물인 깃발, 악기, 부채, 지팡이, 우산을 들고 임금이 탄 초오련을 호위하는데 행렬대의 팔관의위는 3726명, 팔관 노부는 548명이 참여했을 만큼 대규모이다.
『고려사』 권72 ‘팔관노부(八關鹵簿)
『고려사』 권72 ‘팔관노부(八關鹵簿)
고려가 팔관회(八關會)를 개설(開設)하였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이래로부터 여러 대를 지나 궁예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중동(仲冬)에 팔관회를 크게 개설하여 복을 빌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유사(有司)가 그 제도에 따르기를 청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궁궐 뜰에 윤등(輪燈) 한 곳을 설치하고, 그 곁에 향등(香燈)을 벌여 놓고서, 온땅에 가득히 광명으로 밤을 새웠다. 또 신라의 화랑을 본떠서 양가(良家)의 자제 네 사람을 뽑아 무지개같이 아름다운 옷을 입혀 뜰에서 줄지어 춤추게 하였다. 또 두 개의 채붕(綵棚 화려하게 꾸민 가설무대)을 마련하였는데, 각각 높이가 5장(丈) 남짓 되는데 모양이 연대(蓮臺)와 같아, 바라보면 덩그렇고 아득하였다. 그 앞에서 갖가지 유희와 가무를 보였는데, 그 중 사선악부(四仙樂府)의 용ㆍ봉황ㆍ코끼리ㆍ말ㆍ수레ㆍ배는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였다. 백관이 모두 포홀(袍笏 도포와 홀. 즉 조복차림)로 예를 행하였으며, 구경하는 이들이 온 도성을 뒤덮어 밤낮으로 즐겼다. 왕은 의봉루(儀鳳樓)에 거둥하여 관람하였으며, 그 명칭을 ‘부처를 공양하고 귀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이라 하여 해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 상례(常例)를 삼았다.
『동사강목』 제5하 918년
그리하여 궁궐 뜰에 윤등(輪燈) 한 곳을 설치하고, 그 곁에 향등(香燈)을 벌여 놓고서, 온땅에 가득히 광명으로 밤을 새웠다. 또 신라의 화랑을 본떠서 양가(良家)의 자제 네 사람을 뽑아 무지개같이 아름다운 옷을 입혀 뜰에서 줄지어 춤추게 하였다. 또 두 개의 채붕(綵棚 화려하게 꾸민 가설무대)을 마련하였는데, 각각 높이가 5장(丈) 남짓 되는데 모양이 연대(蓮臺)와 같아, 바라보면 덩그렇고 아득하였다. 그 앞에서 갖가지 유희와 가무를 보였는데, 그 중 사선악부(四仙樂府)의 용ㆍ봉황ㆍ코끼리ㆍ말ㆍ수레ㆍ배는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였다. 백관이 모두 포홀(袍笏 도포와 홀. 즉 조복차림)로 예를 행하였으며, 구경하는 이들이 온 도성을 뒤덮어 밤낮으로 즐겼다. 왕은 의봉루(儀鳳樓)에 거둥하여 관람하였으며, 그 명칭을 ‘부처를 공양하고 귀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이라 하여 해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 상례(常例)를 삼았다.
『동사강목』 제5하 918년
918년 궁예를 축출한 직후부터 고려에서는 팔관회를 국가 행사화하였다. 동사강목에서는 이 918년의 팔관회에서 옛 화랑을 본떠 양가(良家)의 자제 네 사람을 뽑아 아름다운 옷을 입혀 춤추게 하고, 갖가지 유희와 가무를 보게 하고 이들을 선랑이라 하였는데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였다고 쓰고 있다. 이런 기록을 보아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신라의 팔관회를 세세한 부분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받아 개최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팔관회는 고구려 승려 혜량이 진흥왕의 명을 받아 개최하기 시작했는데 고구려에서도 불교는 소수림왕 때 삼국 중 가장 먼저 전래된 이래 나중의 백제나 신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왕실과 굉장히 밀착해 있었으니만큼 당연히 왕실 주관의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었을 것이고[3] 혜량은 고구려의 고승이었으니 그런 각종 제도적 지식에 대해 굉장히 해박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4] 그리고 아마 이 점 때문에 공인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자체적인 역량이 모자랐던 신라 불교계에서 각종 제도정비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 과정에서 이미 알고 있던 고구려 불교 제도의 지식을 활용했을 것이며 그렇다면 고려의 팔관회는 고구려 불교의식의 그림자가 돌고 돌아 후계국인 고려까지 다다르게 된 셈이 된다.[5]
단 고려 팔관회의 불교적 색채는 다소 옅어지게 되었다. 태조 왕건이 훈요 10조에서 '천령(天靈) 및 오악(五岳)·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대회'라고 그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기존의 불교적 성격에 토속신에 대한 제례적 성격도 띄게 되었음을 알수있다. 또한 송(宋)나라 상인이나 여진(女眞) 및 탐라(耽羅)의 사절이 조공을 바치고 무역을 크게 행하는 국제적 행사였다는 점에서도 과거와 차이가 있다.# 태조 왕건은 훈요 10조를 통해 팔관회와 연등회 행사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후세에 당부했다.
그런데 유교 우선적 정책을 펼친 성종은 "이러한 행사는 그냥 돈지랄이다(...)."라며 훈요 10조를 무시하고,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연등회와 함께 팔관회를 폐지(987년)해버리고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다. 이후 현종 때에 성종 이후 폐지된 연등회, 팔관회를 다시 부활시켰다. 그중 팔관회는 태조 왕건의 유훈으로써 현종이 정당문학 최항의 권유에 따라 다시 개최한 것인데, 대내적으로는 고려 고유의 해동천하관을 견고히 하고, 대외적으로는 천자국 고려의 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한 국가 중흥책의 일환이었다. 한편 팔관회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구국 영웅들과 국가의 번영 또한 기원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6]. 이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행해졌다.
팔관회와 관련된 사건으로 1170년 의종 24년의 팔관회에서 무신정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했던 곳 역시 팔관회 장소였다.[7]
2.3. 조선
조선 정부는 사대문 안쪽에 승려의 출입 자체를 금지할 정도로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고 당연히 국가행사로서의 팔관회도 조선이 건국된 그 해에 사대부의 주청으로 폐지되었다. 다만 고려 팔관회 때 행해졌던 음악과 무용은 일부 조선의 궁중행사에 전해졌고 불교색을 뺀 토속신에 대한 제사도 일부 유교의례로 편입되었다.또한 팔관회가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신라와 고려가 몰락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조선시대에 있었다.[8]
2.4. 현대
불교 억제가 사라진 현대에는 팔관회를 다시 복원해 축제 형식으로 열기도 한다. 부산에 있는 고찰 범어사는 팔관회라는 이름으로 매년 크게 행사를 연다. # 물론 연등회와 달리 오랫동안 명맥이 끊긴 만큼, 고려시대까지 하던 팔관회와는 행사 내용이 다를 것이다.3. 창작물에서
-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의 30~31회에서도 팔관회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참조하면 좋다. 이 작품에서는 궁예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팔관회를 연 것으로, 대식국, 교지국, 일본의 상인들에게서도 군주의 예로서 인사를 받으면서 궁예가 그만큼의 권위를 얻었다는 상징적인 의식이 되었고 이는 이후 궁예가 양길의 심기를 건드려 비뇌성 전투로 이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4. 같이보기
[1]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연등회는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고, 팔관회는 천령(天靈)ㆍ오악(五嶽)과 명산(名山)ㆍ대천(大川)과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2] 여러 토속 신앙들의 종교의식을 통합해 중앙집권화를 쉽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3] 혜량이 신라에 귀화한 뒤 바로 시작한 게 백좌강회와 팔관법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는데 인도나 티베트, 중국 같은 선진불교지역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에서도 이런 법회 등의 의식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4] 교육의 기회가 적었던 당대에 승려는 유럽의 수도자들처럼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 공부에 몰빵한, 유교를 공부한 유학박사와 더불어 최고 지식인 계층이었고 따라서 명성이 있다면 백제로 간 도림이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나라를 가도 웬만해선 크게 환영받았다.[5] 물론 각각 시공간이 다른 신라와 고려에서의 토착화가 있었고 또 시대에 따른 변화도 컸으니 오리지날 그대로 내려왔을 리는 만무하겠지만.[6] 2018년 국가직 9급 한국사 과목에서 언급되는 것이 바로 이것. 선택지를 안 보고 지문만 보면 팔관회인지 연등회인지 모른다.[7] 물론 실패했다.[8] 사실 조선왕조실록에 불교로 검색해보면 나오지만, 조선시대에는 거의 기승전불교 수준으로 불교를 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