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9 04:58:32

다라니


1. 개요2. 해설3. 용례4. 진언과의 차이5. 발음에 대하여6. 대중문화에서7. 관련 항목

1. 개요

다라니(陀羅尼, धारनी; dhāranī)는 한량없는 뜻을 지니고 있어 모든 악한 법(法)을 버리고 한량없이 좋은 법을 지니게 한다는 불교 용어이다.

2. 해설

다라니는 산스크리트어 dharani를 그대로 음차 표기한 것이고, 의역하면 진언(眞言)이라고도 하며,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의 핵심으로 신비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지는 주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총지(總持) · 능지(能持) · 능차(能遮)라고도 번역되는데, 짧은 구절 안에 능히 무량하고 무변한 이치를 섭수해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라니를 기억함으로서 다른 모든 것을 연상하여 잊지 않게 하고, 선한 법을 가지고 악한 법을 잘 막을 수 있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보살이 타인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라니를 얻어야 하고 다라니를 얻게 되면 무량한 불법을 잊지 않고 자유자재로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짧게 주(呪)라고도 한다.
若比丘尼,誦習世俗呪術者,波逸提。若比丘尼,教人誦習呪術者,波逸提。
만약 비구니가 세속의 주술을 외우고 익힌다면 바일제이니라. 만약 비구니가 다른 사람을 시켜서 주술을 외우고 익히게 한다면 바일제이니라.
사분니계본(四分尼戒本)
만약 비구니가 갖가지 주술을 독송했다면 바일제(波逸提)죄[1]가 된다. 바일제란 소자와 부장의 고통에 떨어지는 죄이니, 만약 그 허물을 참회하지 않는다면 도업을 장애한다.
여기에서 범죄에 해당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비구니가 갖가지 주술을 독송했을 경우 만약 그것이 게송이라면 게송마다 바일제죄가 되고,
만약 그것이 문장이라면 문장마다 바일제죄가 되며,
만약 그것이 별구(別句)라면 구절마다 바일제죄가 된다.

범죄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치통을 다스리는 주문이나
복통을 다스리는 주문이나
독(毒)을 다스리는 주문을 독송하거나
편안하게 수호하기 위해 독송했다면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십송율』 46권
若比丘尼誦外道呪術, 若教人誦波逸提
만약 비구니가 스스로 외도의 주술(呪術)을 외우거나 남을 시켜 외우게 한다면 바일제이니라.
『오분비구니계본』 1권

다라니는 엄밀하게 말하면 일종의 '주문'으로 주술적인 의미가 강한데, 율장에 보면 석가모니 부처가 여러 차례 이런 '주술'을 금지한 일이 여러 차례 보인다. 소부(小部) 율장에서는 “세속의 명주(明主) 비법은 축생이나 배우는 것이다”라고까지 하고 있다. 십송율에는 외도 출신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 가라 비구니가 불법 공부는 미뤄두고 갖가지 주술만 독송하였고 이를 전해 들은 석가모니 부처가 '비구니가 스스로 외도의 주술을 외워 행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행하게 하는 것'을 바일제죄로 간주했다고 전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경계한 이유는 간단한데, 자신에게 내재된 불성은 내버려두고 외부적인 신의 힘에 맹목적으로 의지하려는 태도를 갖게 되고 종교의 본질보다 기복신앙에 치우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분율에서 "치통이나 복통 같은 병환 치유 목적의 주문이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목적의 주문이라면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2] 어느 정도 타협의 여지가 열려 있었다. 부파 불교 시대 말엽 불교 내부에서 주문을 외우고 밀법을 행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나면서 "수행자가 일신의 보호를 위해 도움이 되는 주법은 행해도 좋다"고 예외적으로 승인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후에 민간 비법과 바라문교의 주법과는 다른 불교 특유의 진언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밀교 성립으로 이어진다.

중관학파의 시조 용수보살(나가르주나)은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여러 외도의 주술은 선업이 아니기 때문에 삼악도에 떨어지고 즐겨 탐욕과 진애를 따라 마음대로 악을 행하게 된다. 그러나 반야바라밀다 주문은 능히 선정과 불도, 열반에 대한 여러 가지 집착을 소멸시키고 성불할 수 있게 해 주기에 무등등(無等等)의 주문이라고 일컫는다”[3]며 진언을 통해 집착을 끊고 성불할 수 있음을 설명하기도 했다. 다른 종교도 주술적인 의미로 주문을 외고 하는데 반야바라밀다 주문이 외도들하고 다를 게 뭐냐는 물음에 대한 설명이다.
諸外道、聖人有種種呪術,利益人民;誦是呪故,能隨意所欲使諸鬼神。諸仙人有是呪故,大得名聲,人民歸伏。貴呪術故,是以帝釋白佛言:“諸呪術中,般若波羅蜜是大呪術。”何以故?能常與衆生道德樂故。餘呪術,樂因緣,能起煩惱,又不善業故,墮三惡道。復次,餘呪術能隨貪欲、瞋恚自在作惡;是般若波羅蜜呪能滅禪定、佛道、涅槃諸著,何況貪、恚麤病!是故名爲“大明呪、無上呪、無等等呪”。
모든 외도의 성인에게도 갖가지의 주술(呪術)이 있어서 인민들을 이익되게 하고 이 주술을 외우기 때문에 뜻하는 대로 되며 모든 귀신과 선인(仙人)들로 하여금 이런 주술이 있게 하기 때문에 크게 명성을 얻고 인물들이 돌아와 믿고 복종하게 되나니, 주술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석이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모든 주술 가운데에서 반야바라밀은 가장 큰 주술이오니, 왜냐하면 항상 중생들에게 도덕이 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밖의 다른 주술은 즐거움이 인연으로 번뇌를 일으키며 또한 착하지 않은 업 때문에 3악도(惡道)에 떨어지게 되나이다.”고 한다.
또한 그 밖의 다른 주술은 탐욕과 성냄을 따르면서 제멋대로 악(惡)을 짓거니와 이 반야바라밀의 주술은 선정과 부처님 도와 열반에 대한 모든 집착도 없애게 하거늘 하물며 탐내고 성내는 거친 병이겠는가. 이 때문에 크고 밝은 주문[大明呪]이라 하고 위없는 주문[無上呪]이라 하며 아무것에도 견줄 수 없는 주문[無等等呪]이라 한다.
대지도론 석권수지품(釋勸受持品)34

『대지도론』이 말하는 반야바라밀다 주가 외도 즉 타종교의 주술과 다른 이유에 대해서 용수보살은 외도의 주술은 '즐거울 만한 것'을 인연삼아서 탐욕 자체의 실현과 그로 인해 수반될 쾌락과 세속적 이익을 목적으로 삼아 그것을 추구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것에 기반해 주술을 행하는 것은 번뇌를 일으키게 되고, 선업이 아닌 탐욕과 진애를 따라 마음대로 악을 행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지만, 반야바라밀다 주는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해 생기는 갈등, 분노의 감정을 벗어나 차분하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점이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복신앙'에 대한 경계를 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용례

다라니의 유행은 밀교의 성행과도 연관이 깊다.

다라니는 대체로 악을 없애고 복을 빌 때, 망자의 명복을 빌 때, 또는 불보살 공양이나 참회 의식에 독송되는 형태로 쓰인다. 한국에서는 천수다라니가 가장 많이 독송되는데, 이 다라니를 독송하면 뜻하는 바대로 이루어진다는 보편성이 있어서라고 한다. 특히 밀교(密敎)에서는 다라니를 지니고 외움으로서 마음을 통일하고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다라니를 중시했고, 일종의 주문처럼 이미지가 굳어져 있다. 애초에 '주문'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다라니에 얽힌 영험담이 많이 전하고 있다.

보통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한역될 경우 그 불경 문구의 의미를 한문 문장으로 번역해 놓지만 다라니만큼은 발음 그대로 최대한 그 음만 번역하는 것이 원칙인데, 다라니는 그 문구와 발음 자체에 힘이 있기 때문에 원문의 전체 뜻이 한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4] 그리고 밀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비밀로 하려는 뜻이 있다고 소개된다. 때문에 다라니만은 한자로 쓰지 않고 범자 즉 산스크리트 문자를 부기하거나 아예 산스크리트어로 새겨 두는 경우도 있었으며, 다라니는 완전히 해석하기 어렵고 또 어떤 것은 아예 해석이 불가능한 것도 많다.

밀교에서는 주다라니라고 해서 재난을 없애는 힘이 있다고 여겨졌고, 때문에 여러 밀교 의식과 함께 여기에서 독송되는 다라니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탑 모양과 같은 그림 속에 경전의 전문(全文)을 써 넣는 ‘탑다라니’라고 하는 것도 있고, 다라니 자체에 위력이 있다는 믿음에 따라 사찰에서 탑을 지을 때 다라니를 함께 봉안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이레 뒤에 죽어 16지옥에 떨어질 바라문을 구제하기 위하여 외우도록 한 것으로 이 다라니를 일곱 번 외우고 탑 안에 안치하면 죽은 뒤에 극락세계에 태어난다고 여겨졌으며, 사리탑을 77번 돌고 이 다라니를 77번 외운 뒤에 77벌을 써서 작은 토탑 77좌를 만들어 그 안에 다라니를 하나씩 봉안해 공양하면 수명이 연장되고 모든 업장이 소멸되며 영원히 삼악도를 벗어나 태어나는 곳마다 모든 부처를 만나게 된다고 여겨졌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에는 신라 시대에 다라니 신앙이 유행했고, 일본의 「선광사연기(善光寺緣起)」는 백제에서 전해진 『청관음소복독해다라니주경』에서 “경전의 다라니를 지심으로 지송하면 그 공덕으로 아미타불이 사바세계에 내려와 중생의 병고를 없애준다고 설명하고 있다”고 적고 있어서 백제에서도 다라니 신앙이 유행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9세기 신라 하대에는 다라니신앙이 폭넓게 유행해서 토속신앙과 습합하기도 했다. 신라에서는 대덕의 선발에 총지를 포함시키기도 했고, 진성여왕대에 다라니를 빌려 난세를 비난한 참요가 나돌았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유명하다. 왕거인 항목 참조.

4. 진언과의 차이

진언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데, 같은 의미에서 나온 번역어이기는 하지만 다라니와 진언은 그 형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대체로 천수경처럼 짧은 것을 '진언' 또는 주(呪)라고 하고, 신묘장구대다라니나 능엄주(능엄신주)처럼 긴 구절로 된 것은 다라니 또는 대주(大呪)라고 한다. #

법보신문 보도에 따르면 '진언'은 산스크리트어 만트라(mantra)의 번역이며,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또 어원적으로 따져보면 ‘사념한다’는 뜻의 만(man)과 ‘그릇’의 뜻을 지닌 트라(tra)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어원에 의해 ‘신의 덕을 사념할 수 있다’든가 혹은 ‘사념을 표현하기 위한 그릇’, 즉 신성한 문자나 언어를 의미하고 있다.

다라니는 그 단어 자체가 산스크리트어 다라니(dharani)의 음역으로, 번역하면 '총지(摠持)'이며, ‘정신을 통일하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

5. 발음에 대하여

गते गते पारगते पारसंगते बोधि स्वाहा(범어 원문)
竭帝竭帝 波羅竭帝 波羅僧竭帝 菩提僧莎呵(쿠마라지바 번역)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현장 번역)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넘어가자. 깨달음이여, 영원하여라.

다라니 가운데 하나인 반야심경의 말미에 등장하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의 경우는 현대 한국의 표준 반야심경 번역의 경우 현장의 번역을 따른다. 현장 이전에도 이미 쿠마라지바가 반야심경을 한역하여 소개한 바 있었다. 한국 학계 일각에서는 도올 김용옥을 비롯하여 한역된 다라니 역시 인도의 원음을 중국 한문으로 옮긴 번역문이므로, 이러한 다라니들도 인도의 원음에 가깝게 산스크리트어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스와하'로 읽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도올의 주장에 대해서 한국의 역술인들의 반응은 "웃기고 있네"였다고 한다. 한국의 자현 비구도 이에 동의했는데, 현장이 한역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는 발음은 7세기 현장이 방문했던 인도 지역에서 현장 자신이 수학한 날란다 대사원의 승려가 사용하던 말을 번역한 것인데, 21세기에 쓰이는 산스크리트어 기준의 '가떼가떼 바라가떼 바라송가떼 보디스와하' 발음과 7세기 현장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번역할 때 귀로 들었던 현지 산스크리트어 발음 중에 어느 쪽이 더 석가모니 부처의 시대에 더 가깝겠는냐는 것이다.

어떤 하나의 언어가 7세기에서 21세기에 걸치는 거의 1400년에 걸치는 시간 동안에 변화가 전혀 없다는 믿음은 망상에 가깝다. 인류문화학에서는 지역연대가설이라고 해서 어떤 문화는 그 발상지보다 그것이 전파된 지역에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다는 지적이 있다. 당장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쿠마라지바나 현장이 한역했던 5세기와 7세기 사이에도 그 가변성은 엄연히 존재했다.[5]

혹자는 "고대의 아리아 종교에서는 종교의례를 단 하나의 실수도 없이 올바르게 거행하면, 제사를 받는 신들은 반드시 그 의례의 목표를 이루어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만약 의례에 하나라도 실수가 끼어든다면 의례가 효력을 잃거나, 심지어 제사장이 실패한 의례의 부작용을 뒤집어 쓴다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브라만 제사장들은 온갖 종교의례들을 올바르게 거행하기에 극도로 주의를 기울였다."며 기원전 1500년 무렵 옛 산스크리트어 발음을 보존하기 위해 벌인 노력들을 열거하고 그 노력들을 근거로 제시하여 현대 인도 산스크리트어는 기원전 1500년 당시의 산스크리트어 발음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애초에 기원전 1500년 당시의 발음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를 확실하게 검증하기는 어렵다. 거칠게 말하면 기원전 1500년 당시 사람이 타임머신 타고 돌아와서 발음하고 이걸 산스크리트어와 대조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은 이상 '기원전 1500년 당시 산스크리트어와 현대 산스크리트어는 완전히 같다'는 명제는 성립될 수 없으며, 산스크리트어 발음 보존에 이만큼 기술을 개발하고 전승에 노력했으니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일 뿐이다.

산스크리트어의 불변함을 주장하면서 "일반론에 기대어 특이사례를 무시한다"는 일각의 주장도 마찬가지로 그 '특이사례'로서 혹자가 근거로 드는 '기원전 1500년 당시의 발음'으로 된 베다 산스크리트어가 과연 현재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대조 검증할 자료가 현재 남아있지 않다는 점에서 근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산스크리트어는 이렇게 전승하며 발음 자체를 중시하고 엄격하게 암송하니까 기원전 1500년 당시의 발음도 그대로 전해진다"라는 논리는 '지금도 저렇게 완벽하게 하는데 옛날이라고 달랐을까'라는, 현재의 상태를 가지고 과거의 상태를 짐작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잘못된 유추의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6]

현장이 번역한 불경의 다라니 발음은 현장이 살았던 당송 시대 무렵의 한자어에 기반하며, 혹자가 말하는 "중국어의 변천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재구성한 당송 시대의 한자음으로 읽은 진언의 발음이 현대 한국어보다도 오히려 현대 인도 산스크리트 화자의 발음과 더 비슷하단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말은 산스크리트어가 변화하지 않았다는 주장의 근거가 아니라, 도리어 현장 번역의 생명력이 현대 산스크리트어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음을 증명하는 근거이며 "한문이 아니라 현대 산스크리트어로 읽어야만 석가모니 부처 당대의 발언에 더 가깝다"는 '인도 산스크리트어 본토 발음으로 읽어야 진짜'라는 일각의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로 제시되어야 마땅하며, 또 이걸 가지고 "산스크리트어는 다른 언어와 달리 기원전 1500년경에 쓰던 산스크리트어와 결코 달라지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언어의 가변성에 따라 5세기(혹은 7세기) 당대의 원음으로부터 상당히 많이 바뀐 말을 단순히 '인도 본고장의 언어'라는 이유만으로 당대 번역보다 높게 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원본'의 자리에까지 추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과연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느냐는 의문은 단순히 학문적인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종교의 경우 그것이 '정통성' 문제까지 건드리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 흔히 이슬람이 기독교를 공격할 때에 쓰는 레퍼토리가 쿠란은 원래의 뜻이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해서 외국어로의 번역을 엄격하게 금지했다는 것이다. 무함마드 당대의 원전을 거의 고스란히 보존한[7] 쿠란과 달리 유대교의 토라나 기독교의 성경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가필되고 윤문 내지 삭제, 단어가 왜곡되는 과정을 거쳐 원전과는 달라져 버렸으며, 애초에 성경을 기록한 라틴어나 그리스어는 유대인이었던 예수 본인이 사용한 언어도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 이슬람의 논지이다. [8][9][10]

동아시아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 본인이 사용했던 언어로부터 한문, 팔리어, 티베트어 등 현지 언어로 번역된 경론을 '원전'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세계 그리스도교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동서 교회 즉 가톨릭정교회는 기존의 라틴어, 그리스어로 이루어지는 의식과 전례들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싹 바꾸는 등의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그러한 의식과 전례, 나아가 거기에 사용된 언어 역시도 종교로서 천년이 넘는 세월을 기독교가 걸어온 역사의 일부이자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인종적으로 어떤 인종이며 어떤 언어를 썼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리스어 70인역(셉투아진트)이나 라틴어 불가타 역시 엄연히 성경의 '정본'으로 인정되는 이유가 현장의 반야심경의 경우처럼 언어의 가변성 문제와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현행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성경을 본다고 한들 그게 당대 히브리어, 당대 아람어를 과연 얼마나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건가라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아람어를 썼다고 해서 아람어로 주기도문을 읽어야 가장 원문에 가깝지 않느냐는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원문에 가까운 것'과 '원문 그 자체'인 것은 분명히 별개의 문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이므로. 사해문서가 집필된 이후에도 아람어도 그리스어도 라틴어도 계속해서 변화를 겪었는데[11] 단지 현지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가치를 높게 쳐서 번역본보다 낮춰 보는 견해는 위험하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이러한 문제와는 상관없이 불경의 다라니를 범자(梵字) 즉 산스크리트어 문자로 표기한 범자진언을 일종의 부적으로 여기고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인식은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이미 고려 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범자진언이 새겨진 석조물이 꾸준히 발견되며, 양주 회암사지에서도 범자진언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굴된다. 그 유형은 종자진언, 육자대명왕진언, 준제진언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육자진언과 준제진언이 성행했는데, 이는 관음신앙의 성행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된다. 불교가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왕실의 후원으로 교세를 유지하던 조선 초기에 인수대비인혜대비가 세조 등 선왕을 기려 1485년에 간행한 오대진언집(五大眞言集)도 있고, '실담자' 즉 산스크리트어 문자를 중세 한국어로 표기하고 발음하는 법을 부기한 진언집(眞言集)도 전하고 있다.

6. 대중문화에서

라틴어처럼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이 있어서인지 동양을 무대로 하는 판타지[12]에서 동양적인 느낌의 주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공작왕.

불경을 읽기 전에 개경게에 이어서 읽는 개법장진언 '옴 아라남 아라다' 흔히 알려진 '수리수리 마하수리'도 원래는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13]가 전문이고 천수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다라니 '정구업진언'이다. 그리고 이쪽 분야(...)로 가장 잘 알려진 옴 마니 반메 훔도 다라니의 일종이기도 하다. '사바하' 역시 다라니에서 나온 말이다.

50mang쏘망의 곡 어둑시니에도 츰부다라니의 일부가 도입부와 말미, 그리고 중간에 피처링으로 잠깐 쓰였다.
(한문) 滸盧、滸盧、滸盧矩盧、窣都
弭肄、彌李第、彌李綻、叛茶陀、喝羅▼(戶+欠)梨
(발음) 후루 후루 후루 규루술두
미리 미리 미리디 미리대 허리 히리
(번역) 속히 속히 영원의 세계에 이르게 하소서.
적들을 파괴하고 행복케 하소서, 망상을 소멸 근절케 하소서.

7. 관련 항목


[1] 일저가(波逸底迦) · 바약치(波藥致) · 바라일니가(波羅逸尼柯) · 바라야질지가(波羅夜質?迦) · 바야제(波夜提)라고도 쓰며, 타(墮)라 번역. 계율 가운데 가벼운 것으로, 이를 범한 이는 범계(犯戒)에 관련된 재물을 내놓거나, 혹 다른 이에게 참회함으로써 죄가 없어진다. 그러나 만일 규정에 따라 참회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죄업을 구성하는 것이므로 타(墮)라 한다.[2]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는 주술적인 의미의 기도도 엄연히 '의료 행위'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어떤 행위 여부가 사람의 건강 및 연명(延命)의 여부와 직결되는 경우 종교 교리의 적용을 최대한 느슨하게 해서 허용해 주는 정도의 융통성은 어느 시대, 어느 종교에나 존재했다. 대표적인 게 이슬람의 돼지고기 금지 및 라마단 관련 율법 적용으로, 쿠란에서는 정말 돼지고기 말고 먹을 게 없으면 일단 먹고 나중에 회개하라고 허용 조항을 두는가 하면, 라마단 기간에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했다고 건강이 악화되어 약도 안 먹으면 죽을 지경에서까지 안 먹고 버틸 필요 없고 그러다 죽는 건 자살이나 다름없다고 허용해 준다.[3] 반야심경의 마지막 부분인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다 함께 피안으로 건너가자 영원한 깨달음으로(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는 주문에 대해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비길 것이 없는 주문이니"라고 설명한 구절의 '무등등주'에 대한 풀이이다.[4] 이슬람의 경전인 쿠란의 번역이 금지되는 것과 비슷하지만 이유가 다르다. 쿠란의 번역이 금지되는 것은 쿠란의 소리 자체에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5] 현장은 인도에 직접 유학해서 날란다 대학에서 인도 불교를 배운 입장에서 인도 '원어민'인 쿠마라지바의 번역을 "발음을 옮길 때 틀리게 옮긴 것이 너무 많다"고 투덜댔지만, 쿠마라지바와 현장은 활동 시기가 2백 년이나 차이가 난다. 2백 년 동안 언어 변화가 전혀 없었다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현대에도 처음 번역할 때와는 사용된 언어의 뉘앙스가 많이 달라져서 예전 번역서를 읽으면서 위화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 새로 재번역을 하거나, 아예 10년 주기로 번역을 새로 하는 출판사도 있다.[6] 인도의 언어들 가운데 힘있는 편이면서 산스크리트어의 후손으로 평가되는 힌디어의 경우만 보더라도 현대에도 산스크리트어에는 있는 음소가 힌디어에는 없고, 왜 산스크리트어와 현대 힌디어의 악센트가 다르다. 산스크리트어가 지역마다 모어의 차이가 거의 없다고 하지만, 산스크리트어의 '후손'이라 불리는 힌디어는 분명하게 언어로서 시대에 따른 변화의 과정을 피해가지 못했다. 동시에 산스크리트어라고 베다 산스크리트어와 고전 산스크리트어 사이에 전혀 아무 변화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7] 쿠란의 경우는 산스크리트어와는 달리 편찬 당시부터 이미 그 언어를 '문자'로 표기해 기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막연히 초기 원전과 같을 것이라는 추론이 필요가 없다.[8] 예수 그리스도공생애열두 제자들 그리고 사도 파울로스의 행적을 엮은 신약성경의 '정본'은 당시 서구 세계에서 널리 쓰이던 그리스어로 기원후 1세기 무렵에 번역된 70인역(셉투아진트)이고, 이후 히브리어 성경 원본을 토대로 구약 전체를 성 예로니무스가 4세기 후반에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가 쓰였다. 이후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1세기에 쓰여진 히브리어 성경 이른바 사해문서가 발견되면서 성경에 대한 학술적 연구에 불이 붙었다.[9] 물론 여기에 대해서 당시 예수가 사용했던 언어는 아람어이므로 신약성경도 마땅히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것을 정본으로 치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실제로 현대 히브리어 번역 신약성경을 소개하는 곳도 있다. # 이거에 대해서 뉴스앤조이에서 지적하는 기사를 낸 적도 있다.[10]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예수는 히브리어를 썼다"고 한마디 했다가 "예수는 아람어를 썼는데?"라는 교황의 지적에 네타냐후 총리는 "아람어를 쓰기는 했지만 히브리어도 알고 있었다"고 한 발 물러선 일화가 있다.[11] 좀 더 극단적인 이들 중에는 셉투아진트가 원본이 그대로 전해진 것은 아니며 성경 변개의 상징이라고까지 몰아갔지만, 오히려 사해문서의 발견으로 셉투아진트가 또 다른 형태의 고대 히브리어 본문을 오롯이 보존하고 번역되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그 가치가 올라간 것이다.[12] 주로 일본발 퇴마물.[13] 그 뜻은 "길상하신 세존이시여 길상하신 세존이시여, 지극히 길상하신 세존이시여 원만성취하소서"이고, 더 쉽게 풀이하면 '좋은 일이 있겠구나, 좋은 일이 있겠구나, 대단히 좋은 일이 있겠구나, 지극히 좋은 일이 있겠구나' 정도이다. 불경에서는 구업이라고 해서 자기가 평소에 말로 지은 일체의 업(카르마)이 입에 남아 따라다니고 있으며, 이 진언을 세 번 외움으로서 불경을 입에 담기 전에 입을 '한번 헹궈 낸다'는 의미를 갖는다.[14]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을 말하는 것으로, ‘온 우주(om)에 충만해 있는 지혜(mani)와 자비(padme)가 지상의 모든 존재(hum)에게 그대로 실현되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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