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2:50:38

능침사

능침 사찰
봉국사 | 봉선사 | 용주사 | 신륵사 | 정릉사 | 봉은사 | 흥천사 | 개경사 | 흥교사 | 연경사 | 보덕사


陵寢寺

1. 개요2. 상세3. 역사4.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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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왕릉 근처에 승하한 왕과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정기적으로 승하한 왕과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나 예불을 올리는 사찰을 설치했던 제도이다. 전주경기전과 같은 진전(眞殿)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왕릉을 조성하면 그 바로 옆에 새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고, 왕릉 인근의 사찰을 지정하여 중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2. 상세

본래 누군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은 원찰(願刹), 혹은 원당(願堂)이라고 하는데, 왕릉을 모시는 경우는 따로 능침사라고 한다. 그러니까 능침사는 원찰에 포함되는 말이다.

후궁이나 왕자, 공주의 무덤은 능(陵)보다 격이 떨어지는 원(園)이나 묘(墓)라고 하는데, 이런 무덤을 모시는 경우는 그냥 원찰이라고 한다.

능침사에는 승하한 왕이나 왕비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신 어실이 따로 마련되었고, 조석예불(朝夕禮佛)[1]초하루, 정월대보름, 추석, 청명, 한식, 단오, 기신(忌晨) 때마다 재가 치러졌다. 능에서 제사가 있을 때는 능침사에서 제수를 마련해 공급하였다.

왕릉을 모시는 절이기 때문에 왕실에서 후히 대접하였고, 절에 땅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이러한 사찰들이 왕실의 지원으로 세를 불려 현대까지도 큰 사찰로 남을 수 있었는데, 특히 선정릉의 능침사찰이었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봉은사가 그러한 예이다. 이때문에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절 소유의 토지를 두고 스님들끼리 깡패까지 동원하여 싸우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와 같이 왕실의 지원을 받아 불사를 진행하다 보니 조선시대에는 조정이나 유림에서 크게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릉을 모시는 사찰이었기 때문에 왕실에서 특별히 보호하여 유생들이 함부로 훼철할 수는 없었다.[2]

현재 한국에 남은 능침사는 대개 수도권에 몰려있다. 능침사는 왕릉 가까운 데에 세워져야 했고, 왕릉은 수도였던 한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왕릉의 모든 능침사는 서울특별시, 경기도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려왕릉의 능침사들도 있었는데, 대개 경기도 개성시, 개풍군, 황해도 지역에 있었다. 현재는 고려 이전의 능침사들은 모두 사라졌거나, 문화재로 복원은 되었을지언정 사찰의 기능을 하지 않는 곳이다.

3. 역사

왕릉 근처에 절을 세워 왕릉을 모시게 하는 것은 본래 중국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삼국시대부터 일찍이 능침사를 건립하였는데, 신라에서는 동해 바다에 문무대왕릉을 세우고 그 앞 감포 앞바다에다가 감은사를 세웠다. 감은사 금당 지하에는 용왕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에 들어와 쉴 수 있도록 바다로 통하는 공간을 조성해 놓았다.

고려시대에는 왕릉의 경내에 사찰을 세우고 그 안에 영전이 딸린 형태로 능침사를 세웠는데, 이게 조선시대로 가면 영전이 사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고, 사찰은 부속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주객전도가 된다. 조선 태종 대까지는 고려시대의 형식을 따랐으나 세종 대부터는 능역 안에 능침사를 새로 세우지 않고, 왕릉 인근의 절을 능침사로 지정하게 되었다. 이는 태종의 유언으로, 자신의 능에는 절을 세우지 말라는 데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은 분명 숭유억불을 했던 나라였지만, 조선 초까지만 해도 왕실 내에서는 왕비나 왕대비 같은 왕실의 어른들이 불교를 믿기도 했다. 이에 따라 조선 초까지만 해도 능침사 제도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불교에 심취하여 스님 보우를 불러들이는 과정에서 유생들은 불교에 심한 적개심을 가지게 된다. 문정왕후가 승하한 후에는 유생들이 절에 찾아가 불상의 목을 베고, 절을 불태워 없애버리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 영향으로 선조 이후로는 능침사를 따로 정하지 않게 되었고, 다만 조포사(造泡寺)라고 하여 왕릉에 지내는 제사에 쓸 두부를 만들거나, 제수용품을 공급하는 일을 하는 사찰을 따로 지정하게 되었다.

기존에 능침사였던 절들도 모두 재나 제사를 폐하면서 조포사로 강등되었고, 왕과 왕후를 추모하는 역할은 사라졌다. 능침사가 모두 조포사가 된 뒤로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조포사로 불리게 된다.

4. 목록

왕릉 사찰 사찰 위치
고구려
동명왕릉(東明王陵) 정릉사(定陵寺) 평양 력포구역
신라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감은사(感恩寺) 경북 경주시
고려
현릉(顯陵) 대봉은사(大奉恩寺) 경기 개성시
신명왕후릉[3] 불일사(佛日寺) 경기 장단군
유릉(幽陵) 진관사(眞觀寺) 위치 미상
조선
정릉(貞陵) 흥천사(興天寺) 서울 성북구
제릉(齊陵) 연경사(衍慶寺) 경기 개성시
동구릉(東九陵) 개경사(開慶寺) 경기 구리시
후릉(厚陵) 흥교사(興敎寺) 경기 개성시
헌인릉(獻仁陵) 회암사(檜巖寺) 위치 미상
영녕릉(英寧陵) 신륵사(神勒寺) 경기 여주시
서오릉(西五陵) 정인사(正因寺)
수국사(守國寺)
서울 은평구
광릉(廣陵) 봉선사(奉先寺) 경기 남양주시
선정릉(宣靖陵) 봉은사(奉恩寺) 서울 강남구
융건릉(隆健陵) 용주사(龍珠寺) 경기 화성시

[1] 불가에서는 아침과 저녁에 부처님께 예배하는 의식[2] 유생이 왕릉을 모시는 사찰에 훼철한다는 것은 왕권 도전으로 받아들어서 반역죄로 처단당했다. 게다가 지방 관청 또한 능침사에 각종 잡역이나 잡세를 부과할 수 없었다. 능침사 입구에는 왕실에서 하마비를 설치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도 했다.[3]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