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22:17:33

봉국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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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능침 사찰
봉국사 | 봉선사 | 용주사 | 신륵사 | 정릉사 | 봉은사 | 흥천사 | 개경사 | 흥교사 | 연경사 | 보덕사


파일:대한불교조계종 상징.svg 대한불교조계종
봉국사
奉國寺 | bongguksa
<colbgcolor=#ff8c00><colcolor=#ffffff> 설립일 태조 4년(1395년)
소속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주지 스님 현근
위치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로 202
외부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설명

[clearfix]

1. 개요

奉國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소속 조계사의 말사(末寺)로 행정구역상 주소는 서울 성북구 정릉2동 637번지이다. 정릉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흥천사와 함께 정릉의 능침사찰이다. 경내에는 현재 만월보전과 천불전, 용왕각, 명부전, 삼성각, 독성각, 연화원 등이 있다.

2. 설명

고려 공민왕 3년(1354년)에 나옹 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본격적으로 사찰의 규모가 불어난 것은 태조 4년(1395년) 무학대사 자초(自超)가 절을 중창하면서였다. 무학대사는 이곳을 한양의 비보사찰로 삼았고, 당시에는 약사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약사사(藥師寺)라 불렀다. 이후 세조 14년(1468년)에 사찰을 중건하였다.

'봉국사'의 이름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 처음 붙여졌다. 현종 10년(1669년) 정릉을 단장하면서 약사사를 흥천사와 함께 정릉의 원찰로 삼았고, 절의 이름도 '나라를 받드는 절'이라는 뜻으로 봉국사라 붙인다. 참고로 동명의 사찰성남시에도 존재하는데,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처음 지었던 사찰을 조선조에 이르러 현종이 자신의 딸 명혜공주명선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중창하여 금강산의 일축(日竺)이라는 존자를 주석하게 하고 공주의 원찰로 삼았다.

고종 19년(1882년) 임오군란 때 불에 탔으나 이듬해 청계(淸溪)와 덕운(德雲)이 중창하였고, 1898년에는 운담(雲潭)과 영암(永庵) · 취봉(翠峰) 등의 승려들이 나서서 명부전을 중건하였다. 1885년 3월 명부전에 지장탱화를 조성해 봉안했는데, 당시 금어는 금곡(金谷), 증명은 대응(大應)이라는 승려였다. 이때 봉안한 지장탱화가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봉국사는 의외로 축구와 인연이 있다. 1905년에 한성법어학교의 프랑스어 원어민 교사로 한국에 초빙되어 온 에밀 마르텔(Emile Martel)[1][2]이 한국에 오기 전에 영국에서 축구를 배웠는데, 이 사람이 한국에 온 뒤에 축구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서[3] 이듬해인 1906년 3월 11일 대한체육구락부가 조직되고, 5월 4일 봉국사 아래쪽 공터[4]에서 법어학교 운동회를 개최하면서 축구를 운동회 경기 종목의 하나로 채택, 두 팀으로 나누어 축구 시합을 열었다. 이 축구 시합이 한국 최초의 축구 경기로, 대한체육구락부는 한국사 최초의 축구팀으로 기록되고 있다(물론 이설도 있다). 이 축구경기가 있고 3개월 뒤에 외국어학교령(칙령 제43호)에 따라 한성법어학교는 한성외국어학교로 통합되었고,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총독부의 조선교육령으로 폐지되어 사라졌다.

1913년 칠성각, 1938년 염불당을 세웠다.

1977년에는 일주문 옆에 2층 누각을 짓고 아래층은 천왕문, 위층은 일음루(一音樓)라는 종루로 삼았다. 1994년 안심당을 짓고 현재에 이른다.

봉국사의 석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권속은 2013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55호로 지정되었다.

[1] 1874~1949. 한국식 이름은 마태을(馬太乙)이다. 이 사람은 묄렌도르프(Mollendorff,G.von) 밑에서 상해세관(上海稅關)에 근무한 경력도 있었고, 1894년 7월(1895년 5월이라고도) 조선에 와서 법어(프랑스어) 강사로 일했다. 프랑스어 강사 활동 뿐 아니라 대한제국 박문원찬의(博文院贊議)로 임명되는 등 미국의 헐버트처럼 고종 황제의 비공식 밀사로 활약하기도 했고, 러일전쟁 당시 전후 정보탐지활동 및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에도 참여했고, 제1차 세계 대전 터지자 잠시 군복무 문제로 귀국했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서 1924년에는 경성제국대학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일하기도 했는데, 일제강점기 말기에 자신이 쓴 <한국역사> 원고를 일본 경찰에 압수당하고 1942년에는 조선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해방 뒤인 1947년에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로부터 2년 뒤인 1949년 9월 19일에 세상을 떠났고, 양화진의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이 사람의 부인인 아멜리에 에케르트(Amelie Eckert)가 바로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의 딸이다. #[2] 참고로 식민지 조선의 민속학자 이능화가 이 사람의 첫 번째 프랑스어 제자였다. 마르텔 역시 훗날 회고에서 이능화를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라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에밀 마르텔은 조선의 골동품에도 관심이 많아서 조선에 있는 내내 조선 골동품을 많이 수집했는데, 조선일보이규태에 따르면 조선의 질그릇을 두고 "눈길을 확 끌지만 두 번 보고 싶지는 않은 것이 페르시아 도자기라면, 눈길을 별로 끌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도 다시 보고 싶게 하는 것이 조선의 질그릇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3] 다만 축구 자체는 이미 1882년에 제물포로 한양으로 들어오던 영국 군함 엥가운드 호의 수병들이 휴식 시간에 축구를 했고 경기를 마친 뒤에 구경 왔던 주민들한테 축구공을 주고 간 뒤로 마을 사람들끼리 조금씩 축구 비슷한 것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한성영어학교의 교장 허치슨이 상하이에서 축구공을 주문하여 들여와서 축구를 가르쳤고, 1902년에는 배재학당에 축구반 즉 축구 동아리가 세워지기도 했다. 다만 배재학당 축구반의 경우는 학교 내에서만 하는 정도였던 모양.[4] 지금은 주택가로 빼곡히 들어차 있고 봉국사 바로 앞으로 내부순환로가 나서 차도 막 다니지만 당시에는 공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