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17:20:24

명선공주


조선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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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 추존 국왕 · 왕비 · 추존 왕비 · 왕세자 · 왕세자빈
후궁 : 환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왕자 : 목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왕녀 : 익조 ~ 연산군 · 중종 ~ 철종
※ 작호가 있거나 성년까지 생존한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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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현종의 왕녀
명선공주 | 明善公主
파일:서삼릉명선공주묘.jpg
명선공주묘 전경
출생 1659년(효종 10년) 12월 28일(음력 11월 15일)
사망 1673년(현종 14년) 9월 12일(음력 8월 2일)
(향년 13세)
능묘 명선공주지묘(明善公主之墓)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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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부왕 현종
모후 명성왕후
형제자매
1남 3녀 중 장녀 [ 펼치기 · 접기 ]
남동생 - 숙종
여동생 - 명혜공주
여동생 - 명안공주
부군 신안위 맹만택(新安尉 孟萬澤)
봉호 명선공주(明善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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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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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18대 국왕 현종과 왕비 명성왕후의 장녀. 동복 동생들로 명혜공주, 숙종, 명안공주가 있다.

2. 생애

1673년(현종 14) 4월 27일 동생 명혜공주가 떠나고, 마치 뒤를 잇는 것처럼 3개월 여만에 명선공주가 천연두로 사망하였다. 명선공주는 이미 7월부터 천연두의 증상이 나타나 현종과 명성왕후, 세자 등이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겨간 상황이었는데[1], 8월 2일 사망 소식에 현종은 "연이어 애통한 상을 당하여 애통한 마음이 지극하고 심신(心神)이 황폐하여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표현하였다.[2] 같은 날 공주의 상여는 창경궁 선인문으로 나가게 된다.

특히 명선공주는 현종의 적장녀로 매우 사랑하는 딸이었다. 1669년(현종 10)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온 동지사가 에서 은자와 비단을 받아서 가져왔다. 동지사가 가져온 은자가 1천 냥이었는데, 현종이 은자와 비단을 명선공주에게 하사한 것이다. 이에 동춘당 송준길이 "공적으로 얻은 것을 사적으로 사용하여서는 안됩니다" 라고 말하자 현종이 부끄러워했다는 기록도 있다.[3] 딸바보

그런데 당시 두 공주는 모두 정혼하여 부마 예정자가 있는 상황이었다. 명혜공주의 부마로 간택되었던 신요경은 납채조차 하지 않아서 부마의 위호를 삭제하였으나 명선공주의 부마로 간택된 맹만택은 가례 절차를 이미 진행 중이었다.

맹만택은 우승지 맹주서의 아들로 1671년(현종 12) 12월 26일에 명선공주의 부마로 정해졌었다. 이때 바로 가례를 올리지 못한 건 맹만택의 어머니 남양 홍씨의 사망으로 삼년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4] 그래서 삼년상이 끝난 1673년(현종 14)에야 가례청을 설치하고 길일을 집아 납채(納采)·납폐(納幣)·명복(命服)의 순서대로 거행했는데, 날짜까지 정해둔 친영을 치르지 못하고 공주가 사망한 상황이 된 것. 현종은 맹만택을 불러 상복을 입게 하고, 그의 아버지 맹주서를 불러 공주의 장례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는 '부인을 위해 상복을 입은 남편'이니 부마라고 확정 짓는 뜻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앞의 절차를 다 거쳤어도 친영까지 못하면 부부가 되지 못하는 것이 고금을 통한 예법"이며, "한평생을 영원히 홀아비로 늙을 것을 민망히 여기시라"고 말했다. 공주는 이미 죽었고, 부마의 축첩은 금지되어 있으니 이대로라면 맹만택은 평생 총각으로 살아야 하는 셈이다.

기나긴 논쟁 끝에 다행히 현종이 뜻을 꺾어 부마의 위호를 거두었고, 맹만택에게는 좋은 방향으로 일이 마무리 되었다. 하마터면 총각귀신 될 뻔

3. 여담

  • 1674년(현종 15) 명성왕후금강산에 있던 승려 축존(竺尊)을 불러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 근처에 있는 성부산[5] 아래에 두 공주의 명복을 비는 법당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내관을 보내 공사를 감독하고 '봉국사'[6]라는 사액을 내렸다. 봉국사에서는 두 공주를 위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으나 일제강점기에 공주의 묘가 이장되면서 중단되었다.
  • 뒷날 연잉군숙빈 최씨의 장지를 정할 때,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무덤이 있는 산의 청룡 터라고 해서 질책 받았다.
  • 숙종 대에 이르러, 인현왕후가 사망하고 새 왕비를 간택하게 되었다. 이때 부마가 될 뻔 했던 맹만택의 딸이 숙종의 마음에 들었으나 딸의 외조부 이홍일[7]이 사치스럽고 교만해서 평판이 안 좋았던 터라 탈락했다.

[1] 현종실록 21권, 현종 14년 7월 23일 경인 3번째기사. #[2] 승정원일기 235책 (탈초본 12책) 현종 14년 8월 2일 기해 7/10 기사. #[3] 현종실록 16권, 현종 10년 3월 11일 갑진 3번째기사. #[4] 명선공주는 사망 당시 14세로 맹만택의 삼년상 때문에 유예되고 있었을 뿐, 조선의 공주, 옹주들은 대부분 10세에서 12세 사이에 부마가 정해지고 가례를 올렸다. 그래서 정명공주 같은 케이스가 특이한 것이다.[5] 오늘날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영장산을 말한다.[6] 서울에 있는 동명의 사찰과는 다른 사찰이다.[7] 덕흥대원군의 5대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