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9:13:22

동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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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93호
구리 동구릉
九里 東九陵
East Nine Royal Tombs, Guri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소재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면적 1,969,675㎡
지정연도 1970년 5월 26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1408년
관리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파일:구리 동구릉 경내도.jpg
동구릉 안내도

1. 개요2. 상세3. 역사4. 왕릉(王陵)
4.1. 건원릉(健元陵)/단릉4.2. 현릉(顯陵)/동원이강릉4.3. 목릉(穆陵)/동원이강릉4.4. 휘릉(徽陵)/단릉4.5. 숭릉(崇陵)/쌍릉4.6. 혜릉(惠陵)/단릉4.7. 원릉(元陵)/쌍릉4.8. 경릉(景陵)/삼연릉4.9. 수릉(綏陵)/합장릉
5. 교통6. 기타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행정동 동구동)에 위치해 있는 조선시대 왕릉군(群).

조선시대를 통하여 총 9개의 능이 모여 족분을 이루는 곳으로, 서울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9개의 능(陵)이라 하여 훗날 동구릉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본래 조선왕조 대에는 무덤 한 개가 늘어날 때마다 이름이 바뀌며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으로 불려오다가 효명세자가 안치된 이후로 더 이상 이곳에 새로 생기는 능이 없는 채로 조선왕조가 문을 닫으며 동구릉으로 이름이 굳었다.

조선왕조의 창업군주인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健元陵)부터 시작하여 제5대 왕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顯陵), 제14대 왕 선조와 그의 정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가 함께 묻힌 목릉(穆陵), 제16대 왕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徽陵), 제18대 왕 현종과 그의 비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崇陵), 제20대 왕 경종의 정비였던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惠陵), 제21대 왕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인 원릉(元陵), 제23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문조익황제로 추존)와 그의 비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綏陵), 제24대 헌종과 그의 정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景陵)까지 총 9개의 능, 15개의 봉분이 구릉산 동쪽 기슭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동구릉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재실은 없고, 9개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또, 단릉(單陵), 쌍릉(雙陵),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합장릉(合葬陵), 삼연릉(三連陵)과 같이 모든 형식의 왕릉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삼연릉은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며, 오직 동구릉에서만 볼 수 있는 신기한 형식이기도 하다.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오릉과 마찬가지로 2009년 2월 27일 유네스코세계 문화 유산으로 공식 등재되었다.[1]

2. 상세

동구릉이 자리잡은 산은 되려 동구릉의 이름을 따서 구릉산(九陵山)이라고 이름이 붙었다. 본래는 검암산(儉岩山)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본래는 한양과는 거리가 조금 있는 곳이었지만, 서울이 확장됨에 따라 지금은 서울시계가 구릉산에 걸치게 되었으므로 동구릉 바로 뒤를 지나가고 있다. 때문에 서울 내에 있지는 않지만 서울과 접하고 있어, 접근하는 것 자체는 힘들지 않다.

사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많은 왕들의 릉이 있는 곳 치고는 지역주민들이나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인지도가 그렇게 높지 않았었는데[2] 지하철역 개통으로 인지도는 물론이고 (원래도 접근성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한민국 명당터 중에 상당한 네임드로, 명당만 쓴다는 왕릉 9개가 한곳에 모여있는 걸로 설명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자춘의 묏자리 야사처럼 이곳도 무학대사가 직접 터를 발견하고 정했다는 야사가 있다. 더불어서 이성계 입장으로도 아버지의 묏자리 → 한양 천도 → 자기 묏자리의 풍수지리 삼단 테크를 완성하고 서울로 돌아가면서 근처 고개를 넘다가 "이제 근심(憂)을 잊게(忘) 되었다"라고 하여 그 고개가 망우(忘憂) 고개가 되었다는 야사도 있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고개는 새로 낸 길이고 조선 시대에는 지금의 북부간선도로 신내동에서 구리시계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다만 기록상으로는 이방원하륜[3]을 시켜 묏자리를 알아보라고 하여 양주에 있는 명당을 찾아 그곳에 묻었다고 한다.

현재 문화재청이 관리 감독하고 있으며 24세이상부터 65세까지는 1,000원의 입장료를 받고있다. 구리시민은 인근에 살고 있으므로 지역 할인을 받아 5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으며, 주민등록상 만 24세 미만이면 신분증 제시하고 무료 입장 가능하다.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도 무료 입장이 가능하다.

3. 역사

9개의 능(陵), 정확히는 7명의 왕(추존 왕 포함)과 10명의 왕후(추존 왕후 포함)가 안장되어 있으며, 봉분(능침)은 총 16기에 달한다. 그렇게 많은 능으로 이루어진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왕릉군인 만큼, 조성 역사도 굉장히 길다. 1408년부터 시작되어 1904년까지 무려 496년 동안 지속된 대역사인데, 조선왕조가 1392년에 창건되어 1910년에 멸망한 것을 생각해 보면 조선 왕조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대략적인 동구릉 조성역사는 아래와 같다.
  • 1513년(중종 8년) 현덕왕후의 능을 천장(이장)해와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조성
  • 1630년(인조 8년) 건원릉 서쪽 산줄기(지금 헌종경릉 자리)에 있던 선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로 천장(이장)하고, 유릉(裕陵)과 합하여 목릉(穆陵)이라고 함
  • 1632년(인조 10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를 지금의 자리에 안장하고 혜릉(惠陵)이라고 칭하였으나, 목릉과 합하여 능호를 붙이고, 지금과 같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가 됨
  • 1720년(경종 즉위년) 경종이 즉위후 단의왕후로 추숭하고 능호를 혜릉(惠陵)이라 함. 단릉(單陵)의 형태.
  • 1849년(철종 즉위년) 헌종을 안장하고 조성
  • 1855년(철종 6년) 용마산 아래에 있던 익종(효명세자, 문조)의 수릉(綏陵)을 지금의 자리로 천장(이장)

4. 왕릉(王陵)

4.1. 건원릉(健元陵)/단릉

조선 왕조의 시조 태조 고황제[A]의 능이다. 자세한 내용은 건원릉 해당 문서로.

4.2. 현릉(顯陵)/동원이강릉

파일:excellent_unesco9_1.jpg
조선 왕조 5대 임금인 문종현덕왕후가 안장되어 있는 능이다. 현덕왕후는 단종이 폐위되고 역시 폐위되었다가, 중종 때에 복위되었는데 이때 문종의 옆으로 이장되었다. 이때 이장되면서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을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다른 언덕에 각각 자리잡게 하는 동원이강릉의 형태로 조성하였다.

4.3. 목릉(穆陵)/동원이강릉

조선 왕조 14대 임금인 선조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세 사람의 능이다.

자세한 내용은 목릉 해당 문서로.

4.4. 휘릉(徽陵)/단릉

조선 왕조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능침이 있는 언덕의 면적이 상당히 좁은 편이며 경사까지 있기 때문에 석물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4.5. 숭릉(崇陵)/쌍릉

조선 왕조 18대 현종과 정비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정자각이 특이하게도 맞배지붕이 아닌 팔작지붕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4.6. 혜릉(惠陵)/단릉

조선 왕조 20대 경종의 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무인석의 코가 유난히 크고, 움푹 들어간 눈에 이를 드러내고 웃는 등 다른 왕릉의 무인석에 비해 유달리 이국적인 모습이 특징적이다. 또한 특이한 점으로 다른 조선 왕릉들의 침향[5]이 대부분 북쪽에 머리를 두고 남쪽을 바라보는 북침(北枕)의 형태를 취하는 데 비해 혜릉의 단의왕후는 서쪽에 머리를 두고 다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4.7. 원릉(元陵)/쌍릉

조선 왕조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참고로 이 곳은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파묘 자리를 다시 쓴 왕릉이다. 본래는 효종의 영릉이 이 곳에 있었는데 왕릉 석물에 금이 가고 파손되는 사태가 계속 발생하자 현종 14년인 1673년에 지금의 자리(경기도 여주시 능서면)로 천장[6]했는데, 손자인 정조가 이곳에 자신의 할아버지(영조)를 안장한 것이다. 참고로 일반 백성들조차도 자신의 조상들은 파묘(破墓) 자리에 모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정조의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정조실록 즉위년 4월 11일자의 기사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는데 정존겸이 원릉의 자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정조도 대략 마음에 헤아려지는 바가 있었다며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원릉의 자리에 대해 대신과 비변사 당상들에게도 두루 물어 이의가 없자 능을 결정하였다는 언급이 있는 등 정조의 복수라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듯하다.

그리고 정순왕후 김씨의 눈치도 보이지 않을 수 없었을 터 결국 이 때문에 영조의 정비였던 정성왕후 서씨는 서오릉에 있는 홍릉(弘陵)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심지어 영조가 그 옆에 묻히기 위해 직접 자리까지 비워두었으나[7], 묻히지 못하여 홍릉은 옆자리는 있으나 능침이 없는 조선왕릉 전부를 통틀어 거의 유일한 형태가 되어버렸다.

고양시의 지명 원릉(元陵, 고양시청 일대)과는 상관없다. 이쪽은 원당동능곡동의 사이에 있어 붙여졌다.

4.8. 경릉(景陵)/삼연릉

파일:헌종경릉1.jpg
조선 왕조 24대 헌종성황제[A]과 정비 효현성황후[B] 김씨, 계비 효정성황후[B] 홍씨의 능.

사진의 제일 왼쪽이 헌종릉, 가운데가 효현왕후릉, 제일 오른쪽이 효정왕후릉이다.

경릉은 조선시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삼연릉[11]이다. 사람들은 흔히 가운데가 왕의 봉분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정자각에서 바라볼 때 제일 왼쪽부터 헌종, 효현왕후, 효정왕후의 능이다. 이는 유교식 장례 예법에서 서쪽을 높게 치기 때문이다. 무덤이 남향하므로, 아래에서 바라보기에 제일 왼쪽이 제일 서쪽이 되어 가장 높은 자리가 된다. 왕의 무덤이 가운데 있다면, 왕릉의 서쪽에 있는 왕비릉이 왕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비슷하게 종묘에서도 왕의 위패는 위계 순으로 서쪽부터 동쪽으로 배열한다.

현재는 접근을 통제하는 울타리가 상당히 아래쪽에 쳐져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삼연릉을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4.9. 수릉(綏陵)/합장릉

조선 왕조 23대 순조의 세자 추존 왕 문조익황제[A]와 비 신정익황후 조씨[B]의 능이다. 합장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동구릉 중 가장 마지막으로 조성된 능이기도 하다.

5. 교통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가려면 노원구[14],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등지에서 경기 버스인 10-5, 88, 202, 1번, 1-1번, 78번, 92번 등을 타면 된다.[15] 도심지에서 보기 힘든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고, 소나무숲이 울창해서 그저 산책, 산림욕이 목적인 사람들도 많이 온다. 버스를 타고 내릴때 광고인가 싶을 수 있는데 정류장 이름이 '우리나라최대왕릉군인동구릉'이다. 2024년 하반기에 서울 지하철 8호선동구릉역으로 코앞에 개통한다.

6. 기타


동구릉 앞 버스 정류장 명칭은 "우리 나라 최대 왕릉군인 동구릉"이다. 진짜로. BIS, 즉 경기도 시내버스 전산망에도 우리 나라 최대 왕릉군인 동구릉(22072/22078)으로 등록되어 있다. 원래는 그냥 동구릉이었는데, 어느샌가 바뀌었다. 덕분에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정류장 안내 음성을 들으면 아스트랄함을 느낄 수 있다.

구리시는 시내의 다른 지역에는 왕릉이 없음에도 단지 이 왕릉군 하나 덕분에 '조선왕릉이 가장 많이 소재한 도시' 타이틀을 가지게 됐다.[16]

2000년대 초반까지 능 출입을 막지 않아서 봉분이나 각종 석물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지만 2020년대 중반 현재는 모든 릉의 능침 출입이 금지되어있다. (능침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울타리로 막혀있다)
일반 관람객이 능침에 출입하는 방법은 매년 열리는 몇몇 행사에 누리집을 통해 선착순으로 신청하는 방법이 거의 유일하다. 다만 3인3색을 제외한 나머지 행사는 오로지 건원릉에 한정해서 개방한다.

1. 청완예초의 (매년 한식날)
문화재청 주최. 티오가 한자리수 경쟁률이 매우 높다.
2. 건원릉 능침 특별개방(매년 10월 말~11월 초)
문화재청 주최. 매년 개방일수가 유동적이다. 오전 10시∼11시 20명, 오후 2시∼3시 20명 제한
3. 3인 3색 (매년 4~11월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구리시 소속 구리문화원 주최. 평일에 열리는 행사라 경쟁률이 그나마 낮다. 하루 20명 제한

음료수를 제외한 음식물 반입이 전면금지. 2010년대 중반부터 금지되었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다가 직원들과 마찰이 생긴다.

여름, 가을에는 뱀과 말벌이 많다. 관람로에는 풀이 없어 거의 다니지 않으니 안심해도 좋지만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는 들어가지 않는것이 좋다.

7. 관련 문서



[1] '동구릉'이 아닌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로 명명되어 있다.[2] 왕릉치고라기보다는 애초에 왕릉 자체가 말이 좋아 왕릉이지 볼 거라곤 숲과 무덤뿐이다보니 워낙 유명한 세종대왕릉, 국립수목원으로 유명한 광릉 정도를 빼면 그다지 인기있는 관광지가 아니다.[3] 이 사람은 나중에 함흥에 조선 왕조 조상 묘자리를 보러 가서 죽었다.[A] 대한제국 때 황제로 추존되었다.[5] 枕向. 시신의 머리를 두는 방향.[6]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이야기가 숨어있는데, 효종의 영릉 병풍석이 갈라져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인하여 무덤 안쪽에 물이 찼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무덤을 팠으나 예상과는 달리 물이 전혀 없었고, 괜히 무덤을 파버렸기 때문에 관계자 몇명에게 처벌을 내리고 효종의 능을 옮기게 되고 이 자리는 버려졌다가 그래도 명당이라 하여 영조의 능으로 재활용된 것이다. 능자리는 좋았으나 허위신고로 파묘당한 것.[7] 이를 허우지제(虛右之制)라고 하는데 영조의 아버지였던 숙종이 인현왕후가 먼저 죽자 명릉을 조성하면서 자신도 인현왕후의 곁에 묻히겠다며 오른쪽 자리(우왕좌비)를 비워두라고 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A] [B] 대한제국 때 황후로 추존되었다.[B] [11] 능 3기가 나란히 있는 것[A] [B] [14] 당고개역이나 석계역에서 타면된다.[15] 마을 버스는 2번, 2-1번, 6번이 해당하며, 구리역에서 환승하면 된다. 또한 석계역에서도 65-1번을 타서 동구동사무소에서 내리고 10~15분 정도 걸어가면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16] 2위는 8개를 가진 고양시서울특별시이다. 다만 폐왕, 폐비된 연산군의 묘인 연산군묘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를 계산에 넣는다면 고양시, 서울특별시와 동점이 되어 공동 1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