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2 21:19:58

양길


후삼국고려호족과 군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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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4.1. 영화 <왕자 미륵>4.2.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4.3. 만화 <태조 왕건>4.4. 김성한의 소설 <왕건>

1. 개요

梁吉 (良吉)
생몰년도 미상

통일신라 말기(후삼국시대) 899년 북원경(원주)의 호족. 한반도 중부의 패권을 가지고 국원(충주) 등 30여 성을 장악한 대호족으로서 한반도 중부세력의 패권을 가진 세력가였다.
투항해 온 궁예를 거느리고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황해도 토호 세력이었던 왕건의 항복을 받아 한 때 그의 영토는 동해와 서해를 연결할 정도였다. 그러나, 부하인 궁예와 패권을 다퉜으나 비뇌성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몰락한다.

2. 생애

신라 말기인 진성여왕 시대 왕실의 부패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자연재해가 잇달아 일어났다. 889년 국고가 텅 비게 되자 전국에 세금을 독촉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상주에서 원종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에 반란군이 잇달아 일어나게 되었다. 양길은 5소경 중 하나로 당시 큰 도시였던 북원경을 기반으로 한 호족인데 세력이 컸는지 훗날 후고구려의 왕이 되는 궁예도 892년에 양길의 부하가 된다.

삼국사기 견훤전에 의하면 견훤이 무진주를 차지하고 칭왕할 무렵인 892년 양길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892년 이후에는 견훤과 양길 간에 별다른 기록이 없는 점과 활동 지역도 달라서[1] 양길이 무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894년 양길은 궁예에게 큰 규모의 병력을 맡겨 지금의 강원도 지역 대부분을 정벌하도록 했고 궁예는 기대에 부응해 연전연승을 거두며 급기야 명주까지 제압하고야 만다. 그 소식을 들은 왕건을 비롯해 지금의 개성시, 황해도, 평안도 쪽의 패서 호족이 잇따라 투항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자신의 힘으로 차지한 강원도 지역을 기반으로 이후 장군을 자칭하며 자립해 양길에 맞섰고 양길은 899년[2] 궁예와 비뇌성 전투에서 싸우나 대패하고 만다. 여기서 양길이 죽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900년 왕건이 궁예의 명령을 받아 광주, 충주, 청주 등 양길의 본거지 일대를 일거에 정벌했고 이 때 남아있던 양길의 잔여 세력이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영원성(鴒原城)은 치악산(雉嶽山)의 남쪽 등마루에 있다. 돌로 쌓았다. 둘레는 3천 7백 49척이다. 안에는 1개의 우물과 5개의 샘이 있다. (중략) 말로서 전하기를, 이 성은 양길(梁吉)이 근거하던 곳이었으며, 후에 원충갑(元冲甲)이 이 곳에 근거하여 거란의 병사(丹兵)를 격파했다.
鴒原城。在雉嶽山南脊。石築。周三千七百四十九尺。內有一井、五泉。今廢。 (중략) 諺傳此城梁吉所據,後元冲甲據此,破丹兵。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강원도 원주목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주 영원성(오늘날 원주시 영원산성)이 양길이 근거했던 곳이라는 전승이 있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후삼국시대 군주들인 궁예, 견훤, 왕건과 모두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다만 왕건이 양길의 잔여 세력을 정벌할 시점에 양길이 살아있었는지는 불명. 궁예와의 전투 이후 양길과 그 세력은 몰락했지만 기록상 북원경을 비롯해 중원경 등 30여 성(또는 10여 성)을 차지하고 있던 강력한 호족이었다.

원주시 문막읍 지역에는 왕건과 견훤이 다투었다는 전승(건등산 전설, 견훤성 전설)이 조선시대부터 기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당시 견훤의 영향권은 전라도 지역(무진주, 완산주)에 한정되어 있던 상황이라 왕건이 양길의 잔여세력을 토벌한 일화가 잘못 전해졌을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

4.1. 영화 <왕자 미륵>

1959년 영화 왕자 미륵에서 배우 최남현(1918~1990)이 연기했다.

신라의 장군으로, 경문왕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딸 백화와 함께 서라벌로 향했다. 서라벌행 도중 도적 떼를 만나서 곤경에 처했는데, 궁예를 모티브로 한 애꾸 청년 ‘미륵’의 도움을 받아 구출되었다.

결말부에서 양길의 딸 백화와 미륵이 결혼하면서 끝난다.[3]

4.2.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파일:양길(태조 왕건).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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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만화 <태조 왕건>

궁예와 결투를 벌여서 패배한 후 깨끗하게 자살한다. 다른 어린이용 만화나 왕건 위인전에서도 궁예와 결투를 하다가 살해당했다는 묘사가 은근히 자주 나온다. 아마 궁예의 무서움과 용맹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듯.

4.4. 김성한의 소설 <왕건>

궁예의 스승인 허공 스님의 부탁 덕분에 궁예는 비교적 쉽게 양길 휘하에서 한자리 차지하게 된다. 소설의 양길은 큰 비전도 없고 큰 공을 세운 궁예에게 그만한 상도 주지 않는 쩨쩨한 인물이지만, 그래도 각지에서 장군이라 칭하며 착취를 일쌈는 건달들이나 각종 인간쓰레기들과 달리 호인에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양길의 마지막 모습을 본 왕건은 그가 순박한 성품을 지녔다고 평했다.

비뇌성 전투 이후 왕건이 북원성에 쳐들어오자, 양길은 천운이 기울었는데 더이상 희생은 늘여선 안된다며 군대를 해산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선 자신은 동생을 비롯한 일가 몇몇과 함께 자결하고만다.
[1] 견훤은 무진주 일대, 양길의 경우 한주와 삭주 남부[2] 삼국사기 궁예전은 897년,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899년 7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3] 후일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양길의 막내딸과 궁예가 혼인하는데, 영화 왕자 미륵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