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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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允雄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삼국시대의 인물. 오늘날 울산광역시인 계변성의 호족이었다.2. 생애
고려사에서 그의 기록이 나오는데,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가까운 울산 지방의 호족이었다. 경주에서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거나 더 멀리 있는 소율희, 왕봉규 등 다른 호족과 교류하기 위해선 울산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는 신라 조정에 상당히 협조적이었던 호족으로 추정된다.그러나 927년 견훤의 서라벌 침공으로 신라 중앙정부의 위신이 크게 꺾였고, 930년 고창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하자 그 역시 대세가 고려에 있다고 판단해 부하 최환(崔奐)을 보내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했다. 그리고 박윤웅이 울산 일대 여러 호족의 귀부에 공을 세웠으므로 울산의 행정구역 격을 올려 흥례부(興禮府)로 삼았다. 이후 박윤웅은 울산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와 미질부(포항시)의 호족 훤달이 고려에 투항하면서 경주시의 신라 조정은 멸망 직전의 동로마 제국이나 무굴 제국처럼 수도 인근밖에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결국 5년 후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면서 신라는 천 년에 근접한 역사를 마무리짓게 된다.
3. 여담
- 신령스럽게 생긴 커다란 학이 날아온 자리에 성을 지어 신학성이라 일컬었는데 이게 울산 학성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 울산 박씨에서는 경애왕의 아들 박교순의 6대손, 혹은 박교순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애왕은 927년 사망 당시 30대로 추정되며 이 경우 경애왕은 890년대 출생이 유력하다. 박윤웅이 박교순의 아들이란 설을 채택하고 러프하게 경애왕 890년생, 15세 득남 후 장자 세습으로 계산할 경우, 박교순은 905년생, 박윤웅은 920년생이 된다. 그렇다면 930년 고려 조정에 귀부할 당시 11살(!)이다. 때문에 고려사를 놓고 봤을때 박교순 후손설은 시조를 어떻게든 왕족과 엮으려는 족보 윤색으로 보인다.
- 박윤웅 가문의 영지와 관련한 곽암(미역바위) 전설이 전해진다. 940년 왕건이 역분전을 분배할 때 박윤웅은 식읍 700호와 강동, 농서지역 및 곽암 12구의 미역 채암권을 받았다. 이 채암권이 중앙집권이 강화된 조선시대에도 살아남아 박씨 문중에게 대대로 이어졌는데 미역이 곽암에서만 잘 자라는데다 박씨 문중만 채암하다보니 미역을 채암하지 못한 어민들의 원성이 이어졌다. 마침 어사로 울산에 있던 박문수가 곽암 12구를 모두 국가에 환수시켰는데 이후 3년간 곽암에서 미역 흉작이 이어지자 박윤웅이 노했기 때문이라 생각한 어민들이 울산부사에게 간청하여 결국 환수한 곽암 중 1구를 박씨 문중에 돌려주었고 이후 다시 미역이 잘 자랐기에 그 바위를 윤웅바위라 불렀다고 전한다.
- 울산광역시 차원에서 신라 마지막 기녀라며 밀고 있는 전화앵과 엮어 스토리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다. 정작 사료가 존재하고 전승이 많은 박윤웅 보다 전화앵을 더 밀어주고 있다는 데에서 사학계는 비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