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5-07 16:13:34

능창

후삼국고려호족과 군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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能昌
? ~ 910년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3.1. 태조 왕건

1. 개요

후삼국시대해적이자, 호족.

2. 생애

신라 행정구역 기준 무주(武州) 압해군(壓海郡), 고려 행정구역 기준 전라도(全羅道) 나주목(羅州牧) 압해현(壓海縣)의 해적. 즉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도 출신이다.

후삼국시대 압해를 비롯한 다도해 일대에는 수천 명의 대병력으로 일본 규슈 지역을 공격할 정도로 군벌이나 다름없는 해적이었던 신라구가 많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능창도 그 해적 집단 중 하나의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능창은 섬에서 일어나 유랑하는 자들(亡命)을 끌어모아 세력을 이루었다.

910년에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이 나주(신라 금산군(錦山郡))를 점령하기 위해 무주 서남 지역의 반남현 포구에 이르러 첩자를 보내 적의 동정을 살피게 했는데, 능창은 수전에 능하여 '수달(水獺)'이라 불렸으며[1] 도망친 자들을 불러모으는 한편 갈초도라는 인근 섬의 또다른 해적단과 힘을 합쳐 왕건의 목숨을 노렸으나 되려 왕건의 계략에 속아 붙잡혔다. 이후 궁예가 얼굴에 침을 뱉고는 이내 목 베어졌다고 전해진다.

단순한 해적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견훤 휘하의 해적이었다는 설도 학계에서 많이 제기되고 있는데, 고려사에 능창과 견훤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기사가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에 대한 이설이 나뉘고 있다.

먼저 견훤의 수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에서는 견훤이 나주 바로 옆인 무주에서 떡 하니 대놓고 버티고 있는 강한 독립 세력을 눈앞에 두고 왕을 자칭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궁예가 직접 심문하며 침을 뱉었다는 것 역시 견훤의 직속 부하는 아니었더라도 나주 지역의 관할권을 거의 통째로 부여받았던 강력한 세력가였을 것으로 여긴다.

반면 독자적인 세력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당시 서남해는 하나의 세력이 패권을 잡은 상태가 아니라 여러 군소 세력이 난립한 형국이었고 능창의 세력권도 압해현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추정한다. 즉 신라의 9주 중 하나인 무주를 손에 넣은 견훤 입장에서 지방의 군소 해적에 불과한 능창을 강하게 의식했을 리가 없다는 것. 더구나 견훤은 왕건이 나주를 차지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고 상주나 대야성 방면의 전선에 더 신경을 썼는데, 이는 그가 서남해를 직접 지배하는 대신 군소 세력들과 서로 간섭하지 않는 선에서 대치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2] 왕건이 서남해를 공격했을 때도 따로 견훤이 나섰다는 기록은 없고 능창이 포로로 붙잡혔던 전투도 견훤과는 전혀 무관했다. 궁예가 능창에게 침을 뱉었다는 기록 역시, 포로로 잡힌 것을 조롱한 정도이지 강력한 세력가로 보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해주지는 않는 대목이다.

현재의 압해현인 신안군에서 "천년의 바다, 수달 장군"이라는 이름의 마당극을 제작하는 등 대대적으로 띄워주었다. 장보고와 엮을 계획도 있다고 한다.

왕건이 능창을 붙잡아 제거한 뒤에도 서남해 나주 앞바다에는 해적단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능창 사후 4년이 지나 914년에 다시 왕건이 태봉국 수군을 이끌고 출진했는데 이 때 현지의 해적들(海上草竊)을 다시 제압했다고 한다. 이들은 활동한 지역이 겹치므로 능창 해적단의 잔당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진 않고, 기록이 소략해서 능창 때보다는 쉽게 승리한 듯 하다.

3. 대중매체에서

3.1. 태조 왕건

파일:수달이1.jpg 파일:수달이.jpg[3]
파일:능환능창추허조.png[4]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능창(태조 왕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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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이 아니다. 수달은 귀여워 보이지만 민물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이며 날쎈 동물이다. 이런 동물에 비견되었다면 굉장히 교활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용맹하다는 평까지 이어지는 것은 애매한데, 옛사람들에게 족제비과의 흉폭함은 교활함에 가깝게 여겨졌다. 용맹함의 상징으로 쓰기에는 수달이란 동물 자체가 워낙 작아서...[2] 본래 한 사람의 지배권이 명확한 지역보다는 군소세력이 난립한 지역이 훨씬 평정하기 어려운데다 서남해는 많은 섬들이 난립해서 한 번 평정에 나섰다가 장기전으로 빠져서 발이 묶여버릴 위험성이 많아 들어가는 비용보다 얻는 이익이 적기에 견훤이 서남해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신라 공격에만 집중한것도 타당해보이는 선택이다. 궁예의 의심과 궁중의 암투를 피해 일부러 변경에 머무를 목적이 강했던 왕건과는 달리 견훤은 자기가 왕이었기에 왕건과는 달리 서남해에 집착할 이유도 별로 없었다.[3] 사진은 나주 공방전에서 왕건의 군대가 기습하자 급하게 군사를 소집하고 방어전에 돌입하는 모습이다.[4] 오프닝에서의 능환, 수달(능창), 추허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