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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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貴 |
1. 개요
후삼국시대의 인물. 증성(甑城)[1] 일대에서 활동했다.삼국사기 열전 궁예편에서 그의 기록이 나오는데, 905년 평양성주 검용(후삼국시대)이 궁예에게 투항하자 증성 일대에서 활동했던 황의적(黃衣賊), 적의적(赤衣賊)과 함께 귀부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2. 기타
그가 궁예에게 귀부한 이유는 나오지 않았으나, 평양과 강서지역 간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검용의 투항이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측된다.검용과 마찬가지로, 궁예에게 투항하기 전에 통일신라의 지배 하에 있던 지방 세력 출신인지조차 알 수 없는데, 삼국사기 지리지 기록상 대동강 이북쪽으로는 신라가 군현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
하지만 별 의미는 없는 게 결국 명귀 또한 발해가 됐든 신라가 됐든 당시 무너져가던 각국의 중앙정부를 무시하고 변방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한국계 호족이었다는 점에서는 타 호족들과 대동소이하다. 결국 궁예에게 귀부했기 때문에 정치적 성향으로 따지자면 태봉계 인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