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1 14:12:39

신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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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 태조 후 혜종 후 [ruby(정종, ruby=定宗)] 후 광종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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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녕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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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비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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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비 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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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제1왕후
신혜왕후 | 神惠王后
파일:external/www.kyeongin.com/484693_117623_2513.jpg
현릉 전경
출생 880년대 추정
신라 정주 류천궁의 사저
(現 경기도 개풍군)
사망 연대 미상
능묘 현릉(顯陵)
재위기간 고려 제1왕후
918년 7월 25일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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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정주 류씨
부모 부친 삼중대광 류천궁
(三重大匡 柳天弓, ? ~ ?)
배우자 태조
종교 불교
작호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 → 왕후(王后)
시호 신혜왕후(神惠王后) }}}}}}}}}
1. 개요2. 생애
2.1. 정주 류씨의 배경2.2. 왕건과의 만남과 결혼2.3. 왕후가 되다
3. 기타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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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태조, 왕건의 첫 번째 아내로, 태조 왕건의 제1비다. 성은 류씨, 본관은 정주로, 왕건을 도와 초창기에 힘이 되었던 정주 호족 류천궁의 딸이다. 생몰년 미상.

2. 생애

2.1. 정주 류씨의 배경

“정주(貞州)는 본래 고구려의 정주인데 현종 9년에 개성현(開城縣)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문종 16년에 본 부(府)에 소속되었으며 예종 3년(1108)에 승천부(昇天府)로 고쳐 지부사(知府事)를 두었다. 충선왕 2년(1310)에 낮추어서 해풍군(海豐郡)이 되었다.” - 고려사 권65, 지리지 1, 왕경개성부조

901년 궁예는 “옛날에 신라가 당(唐)에 청병(請兵)하여 고구려를 멸하였기 때문에 평양(平壤)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리라.”(삼국사기 권50, 궁예전, 천복(天復) 원년) 하면서 국호를 후고구려라 했지만(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 궁예, 재유년조(宰酉年條))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꾼다.
“천복(天復) 3년 계해(903) 3월 태조는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光州) 지경에 이르러 금성군(錦城郡)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10여 개의 군현(郡縣)을 공격하여 이를 쟁취하였다. 이어 금성을 나주(羅州)로 고치고 군사를 나누어 수비하게 한 후 개선하였다.” - 고려사 권1, 태조세가
나주목(羅州牧)은 원래 백제의 발라군(發羅郡)인데 신라 경덕왕은 금성군(錦城郡)으로 고쳤다. 신라 말 견훤이 후백제 왕이라 자칭하고 이 지역을 모두 점령하고 있었으나 얼마 있지 않아 이 군 사람이 후고구려 왕 궁예에게 귀부(歸附)하러 왔으므로 궁예는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임명하여 해군을 거느리고 가서 이 지역을 빼앗아 나주羅州로 하였다.” - 고려사 권57, 지리지2, 전라도 나주목조

즉, 금성군(錦城郡)은 후백제 영역이었으나 호족들이 견훤이 아닌 궁예에 귀부하기를 청해 궁예는 왕건을 보냈고, 왕건이 금성군을 점령한 뒤 나주로 승격시켰다. 이는 천복 3년(903)으로 국호가 후고구려였던 시절이다. 이 무렵을 전후해 정주도 귀순해서 정주의 지명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6월, 정사(丁巳)일 하지현(下枝縣) 장군 원봉(元奉)이 귀순하여 왔다.” - 고려사 권1, 태조세가 5년(922)조
“봄 3월 갑신(甲申)일에 하지현 장군 원봉에게 원윤(元尹)의 품계를 주었다.” – 고려사 권1, 태조세가 6년(923)조
“풍산현(豐山縣)은 원래 신라의 하지현(下枝縣)인데 경덕왕은 빙안(氷安)으로 고쳐서 예천군(禮泉郡) 관할 하의 현(縣)으로 만들었다. 태조 6년(923) 이 현 사람 원봉(元逢)이 귀순한 공이 있으므로 순주(順州)로 승격시켰다.” – 고려사 권57, 지리지2, 경상도 안동부 풍산현조

이외에도 왕건이 호족포섭을 위해 호족의 영지를 주(州)로 승격시킨 사례는 많지만, 굳이 고구려라 표현한 점을 보아 궁예의 통치 시기인 901~904 사이일 가능성이 높다.

정주 호족 류천궁이 궁예에게 귀부한 것은 왕건의 영향으로 보인다. 896년 철원에 도읍한 궁예는 왕륭 – 왕건 부자가 귀순하여 도읍을 자신의 본거지 송악으로 옮기기를 청하자 898년 송악에 도읍하였다.(고려사 권1, 태조세가, 광화 원년) 이후 904년 철원으로 천도할 때까지 수도였던 송악은 왕건의 본거지였다. 정주는 송악에서 15리~17리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전시과의 시지(柴地)를 지급할 때도 정주는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지역으로 구별되었다.

또 성종 14년 개성부가 적현(赤縣), 기현(畿縣)을 관할할 때 적현 속에 들어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종 9년 개성부를 개편할 때도 정주는 개성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현종 9년(1018)에 부(府)를 없애고 개성현령(開城縣令)을 두어 정주(貞州), 덕수(德水), 강음(江陰)의 3개현을 관할하고 장단현령(長湍縣令)은 7개현을 관할하면서 모두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켰는데, 이를 경기(京畿)라 했다.

이런 관계와 해안에 위치한 지리적 요건 때문에 정주는 태봉이나 고려의 해군기지 역할을 했다. 909년 왕건이 전라남도 영암의 덕진포(德眞浦) 전투를 수행할 때 전함을 고쳐 떠난 곳이 정주였다. 즉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은 정주에서 전함을 수리한 뒤 2500을 거느리고 덕진포에 이르러 견훤의 수군을 무찔렀던 것이다. 913년 궁예의 심복을 처단해 심기를 건드리자 스스로 외방에 나가기를 청해 914년 나주로 갔다. 이때 왕건은 정주 포구에서 70여 척의 전함을 수리해 2천 병사를 싣고 나주로 갔다. 이를 보아 정주에는 태봉의 전함과 해군이 주둔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궁예 말기 왕건이 사방 10보이며 누각이 있는 큰 배 10척을 포함해 전함 백 척을 건조한 곳도 정주로 추정된다. 태조 13년(930) 고창군 전투에서 패배한 견훤이 고려의 수군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정주를 공격한 것으로 보아 이 역할은 왕건 즉위 이후에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해 견훤은 수군을 거느리고 예성강으로 쳐들어와서 3주의 백 척을 불사르고 3백 필의 말을 약탈했다.

그 때문에 신라 말 도선은 “서강(西江) 가에 성인이 말을 타고 있는 형상인 명당자리가 있는데 태조가 국토를 통일한 병신년(936)부터 120년에 이르러 이곳에 정자를 지으면 고려왕조가 오래 유지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문종이 태사령(太史令)에게 명당자리를 잡게 해 서강에 장원정(長源亭)이라는 별궁을 건설하게 했다. 문종 10년에 건축되었는데 14년, 17년, 21년에 이곳에 행차하고 숙종 5년, 9년에 장원정에 행차했다. 장원정은 바닷가에 있었으며 누대와 연못이 조성되어 있었다. 정주의 백마산(白馬山)도 중시되었으며, 신사(神祠)가 많아 제사의식이 행해지기도 했다. 의종 3년 7월 정주에서 7일간 기우제를 지냈으며 우왕 5년 5월 을유(乙酉)일에 기우제를 지냈다. 여기서 개성의 대정(大井)은 작제건의 아내 용녀가 처음 왔을 때 개성 동북 산기슭에 땅을 파고 은그릇으로 물을 떠 썼다고 해서 불렀다.

정주는 지금의 개풍군 일대로, 왕건과 같은 고구려계 패서호족 출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2. 왕건과의 만남과 결혼

“태조가 궁예의 부하로서 장군이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다 오래된 버드나무 밑에서 말을 쉬게 하고 있었는데 후(后)가 길옆의 시냇가에 서 있었다. 태조가 그의 얼굴이 덕스러움을 보고 그에게 ‘누구의 딸이냐?’고 묻자 처녀는 대답하길 ‘이 고을의 장자(長者)집 딸입니다.’라고 했다. 따라서 태조가 그 집으로 가 유숙했는데 그 집에서는 군대 일동에게 아주 융성하게 음식을 차려 대접했다. 그리고 후(后)로 하여금 태조를 모시고 자게 했다. 그 후로 서로 소식이 끊어져서 정절을 지키고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불러다가 부인으로 삼았다.” – 고려사 권88, 후비전1, 태조 신혜왕후 류씨 조

고려사에 의하면 왕건은 909년 해군대장군(海軍大將軍)이 되었다가 913년 태봉의 시중(侍中)의 자리로 올랐다. 하지만 궁예의 심복 아지태(阿志泰)의 처단으로 914년 장군으로 강등되어 다시 외방으로 나갔다. 이처럼 고려사에는 왕건이 장군이 되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삼국사기 후량(後梁) 건화(乾化) 원년 왕건으로 하여금 금성을 치게 하고 나주로 개칭한 뒤 그 공으로 왕건을 장군에 임명했다고 한다.(삼국사기 권50, 궁예전, 건화 4년) 건화 원년이면 910년인데 나주는 903년의 일이며, 909년에 해군대장군인데 910년에 장군으로 강등되었다는 것도 논리에 맞지 않다. 따라서 왕건이 장군이 된 시기는 903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왕건이 금산군을 공격하려는 과정에서 정주를 지나다 부인을 만난 것이다. 장자라는 말은 여러 뜻이 있는데 ①연장자나 나이 먹은 사람 ②윗사람 ③덕망 있는 사람 또는 관대한 사람 ④신분 높은 사람 ⑤부족(富族) 또는 부자(富者) 등이 있다. 즉 신혜왕후의 아버지는 부호이자 존경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며 류천궁 입장에서도 장군과 인척을 맺는 건 좋은 일이었다. 이때 왕건의 나이 27세로 결코 이르지 않았지만 여자를 잊자 여자는 비구니가 되어버린다. 그러다 왕건은 909년 덕진포로 출정하기 전 정주에서 전함을 수리했는데, 이때 그 여자가 비구니가 된 걸 알고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제2비 장화왕후와 만난 건 왕건이 수군장군으로 있을 때로, 해군대장군(909~913)과 같은 뜻이다. 909년 덕진포 전투 승리 이후 다시 전함을 수리하고 나주를 점령해 주둔한 것과 혜종이 912년에 태어난 걸 보면 911년 무렵에 장화왕후와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신혜왕후와 결혼한 게 909년이고 장화왕후와 911년에 만났다면 태조 생전 제1비 신혜왕후, 제2비 장화왕후인 것은 결혼 시기를 보아 타당하다.

2.3. 왕후가 되다

918년 태봉 궁예 말년에 4기장(배현경, 복지겸, 홍유, 신숭겸)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하려 할 때, 왕건은 이를 거절했다. 이 때, 신혜왕후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왕건의 갑옷과 칼을 내어주어 왕건을 독려하였으며, 결심을 굳힌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 태조 16년 중국 후당(後唐)에서 신혜왕후를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책봉했는데, 후당 명종은 책봉과 함께 조서도 보내왔다.

그 해 후당에서는 4통의 조서를 보냈는데 2통은 태조를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는 조서고 1통은 삼군의 장병에게 보낸 조서다. 나머지 1통이 제1비 신혜왕후를 하동군부인으로 책봉하는 조서다. 이는 고려에서 제1비 또한 책봉해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국왕과 부인을 동시에 책봉한 예는 이것이 유일하다. 하동은 하(河)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일대를 말한다. 당 태종이 전국을 10도로 나눌 때 그 일대를 하동도河東道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왕건이 중국 출신이라는 뜻은 아니고, 하(河) 동쪽의 번성한 나라 출신이라고 해서 붙은 말이다.

신혜왕후는 자녀 없이 죽었기 때문에 왕건은 신혜왕후와 같은 집안의 여자와 혼인했다. 이 여자가 제6비 정덕왕후다. 정덕왕후의 아버지는 시중이었기에 중앙정계에서 활약한 사람으로 보인다. 정덕왕후는 4남 3녀를 낳았고, 성종 남매가 이 정덕왕후의 외손이다.

사망한 이후 신혜왕후라 시호를 올렸으며 이후 왕건의 능인 현릉(顯陵)에 합장되었다. 고려시대 대왕 – 왕후의 시호는 한 글자가 동일한 관습법(慣習法)이 있는데, 신혜왕후는 생전부터 정실로 이 사례의 시작이었으며 적실로서 태조와 합장되었다. 제2비 장화왕후는 생전부터 왕비였음에도 혜종계통이 배제되면서 이 사례에서 제외되었으며, 추존왕후로는 제3비 신명순성왕후, 제4비 신정왕후, 제5비 신성왕후가 여기에 속한다.

3. 기타

광종의 아내 대목왕후신정왕후의 딸이고 경종은 대목왕후의 아들이라서 가세는 한동안 유지되었다. 목종은 경종과 성종의 여동생 헌애왕후의 아들이었으며 경종은 정덕왕후의 아들 원장태자의 딸을 제5비 대명궁부인(大明宮夫人)으로 삼았다. 대명궁부인의 어머니는 제3비 신명순성왕후의 딸 흥방궁주(興芳宮主)지만 류씨(柳氏)인 걸 보아 어머니가 아니라 할머니인 정덕왕후의 성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현종도 성종의 둘째 누나[1] 헌정왕후의 아들이었다.

한동안 중앙정부에서 위세를 떨치던 정주 류씨 가문은 한동안 묻히다 숙종이 왕자였던 시절 결혼한 아내가 명의태후가 되면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가세는 다시 기울게 되었다.

어린이 위인전엔 아무래도 일부다처제를 넣기가 좀 그랬는지 왕건의 유일한 부인으로 등장하는데, 장화왕후 항목에 있는 버드나무 에피소드와 류씨 성을 더해 버들꽃 아가씨/부인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4. 대중매체에서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박상아가 연기했다. 극중 이름은 부용. 왕건나주 침공을 성공시키는 와중에 류씨의 아버지인 류천궁이 자기 딸과 장가들기를 권했으나 왕건은 이를 거절했는데 류천궁은 왕건을 만취를 시켜놓고 딸인 류씨에게 밤시중을 들게 하여 결국 왕건은 혼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첫째 부인으로 삼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사소한 오해가 있어서 왕건이 정혼은 류씨와 먼저 해놓고 혼례는 나주부인 오씨와 먼저 해버리는 바람에 이에 실망한 류씨가 가출을 하여 자살 시도를 하였으나 때마침 지나가던 석총이 류씨를 설득해 자살을 막는다. 이후 제64화에서 류씨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으나 왕건을 잊지 못했고 어차피 류씨가 비구니 생활을 오래할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한 석총은 허월과 함께 왕씨 집안에 찾아가 왕건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다. "정혼을 류씨와 먼저 했으니 마땅히 류씨를 큰 부인으로 모셔야 한다"는 나주부인 오씨의 양보로 류씨는 왕씨 집안의 첫째 부인이 된다.[2] 왕건의 첫째 부인이기는 하지만 당시 집안의 대소사는 오씨 부인이 관장하였고 오씨 부인이 나주로 내려간 뒤에서야 류씨 부인이 집안의 어른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역사적인 내용대로 제119화에 4기장이 왕건의 집에 찾아와 왕건을 새로운 군주로 추대하였고[3] 이들 외에도 군사 태평, 사촌동생인 왕식렴왕신 형제가 끈질기게 설득해도 왕건은 신하의 도리를 내세워 완강히 거절한다. 그 때 뒤에 온 복지겸, 배현경, 홍유가 오기 전에 류씨와 충주부인[4]이 그 방으로 들어서다가 이들의 목소리에 멈칫하였는데 배현경이 "술안주로 삼게 후원에서 오이를 몇 개 따다 달라"는 식으로 돌려 말하면서 부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다가 류씨가 곧 왕건의 갑옷을 들고 들어와 "꾸중을 들을 각오를 하고 서방님과 장군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분들의 간절한 청을 외면하심은 책임있는 신하로써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뜻도 져버리는 것입니다."라 대답한다. 왕건은 부인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며 다소 화를 내는데 "의병을 일으켜 포악한 군주를 몰아내고 백성에게 희망을 주는 일은 마땅히 장부가 해야할 일입니다. 하물며 신하 중 제일 윗자리인 서방님이 아니십니까?"하며 설득해 이에 결심을 굳힌 왕건은 역성혁명을 일으켜 태봉을 멸하고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

고려 건국 이후 황후에 책봉[5]되어 철원의 황후전에서 지내는데 며칠 못 가서 병을 얻게 되었다. 당시 왕건이 즉위한 이후 노비에서 면천받았던 백성들이 진귀한 물품을 싣고 자발적으로 공납을 해왔는데 이 중에는 무려 천 년 묵은 산삼이 있었다.[6] 이후 상주아자개가 중병[7]을 얻자[8] 상주에 큰 공을 들이던 왕건이 이 소식을 듣고 산삼을 보내기로 했는데 하필이면 산삼을 상주로 보내겠다고 공언한 이후에 왕건이 류씨의 병을 알게 된다. 류씨 부인이 처음 병세를 확인하고 나서부터 전의와 휘하 상궁들에게 입단속을 하면서 병을 숨겼고 무엇보다 산삼을 사사로이 쓰게 하지 않기 위해서 더욱 숨기는 바람에 왕건이나 다른 부인들이 황후의 병을 늦게 알게 된 것. 최응과 박유가 "약재를 황후를 위해 써야한다"고 간청했으나 왕건은 "약재를 쓰면 황후의 병은 낫지만 이미 공적인 일로 상주로 보내겠다고 한 이상 가슴이 아프더라도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한다"며 약재를 최응과 함께 상주로 보낸다.[9] 결국 류씨는 왕건과 아우들에게 "미안하다"면서 당시 작게나마 신경전을 벌이던 두 아우들에게 "잘들 지내면서 서로 도우라"는 말을 남기고 황궁을 떠나 피접을 선택한다. 이후에 피접한 곳(본행인 정주로 추정)에서 후궁들과 산책을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부친인 류천궁과 극 중에서 퇴장했다.[10] 이를 알게 된 박술희도 깜짝 놀랐고 그 얘기를 들은 아자개도 결심을 굳혀 아들이 있는 후백제 대신 고려로 귀부하게 되었다. 몇 년 후로 시간이 이동한 후 최응이 왕건과 대화를 하면서 "왕후가 피접 중"이라고 언급하는데 이후 전개에 딱히 사망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지만, 배우의 스케쥴 문제로 하차한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재등장하지 못한다.


[1] 현화사비 기록[2] 혹은 왕건이 잡무로 바빠 오랫동안 류씨를 보러올 시간을 내지 못하니 왕건이 딸을 잊었다고 생각한 류천궁이 류씨에게 새 남편을 맞을 것을 요구하자 류씨는 아버지의 요구가 오래갈 것을 예상하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 에서 지내며 왕건을 기다리는데 그 소식을 들은 왕건이 슬퍼하며 시종에게 급히 수레를 내주어 급히 모셔오게 해 재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3] 왕건의 극 중 의제였던 능산이 먼저 집에 가서 설득을 시도한 와중에 훈련장에서 훈련 중 내군 부장들의 방문으로 위기를 느낀 나머지 3인이 밤이 되어 찾아간 것이다.[4] 극 중에서는 첫째 부인과 셋째 부인 모두 유씨인 관계로 충주부인은 극 중 이름인 '수인'으로 자막에 처리하였다. 다만 첫째 부인은 柳씨이고 셋째 부인은 劉씨이다. 이후 그녀를 유씨라고 자막에 넣은 것은 첫째 부인 류씨가 극 중에서 퇴장하고 난 이후라 할 수 있다.[5] 제121화 나레이션에는 태조 16년에 후당에서 책봉했다고는 하지만 이미 황후로 책봉되었다고 한다.[6] 당시 창부에 있던 박수문, 박수경 형제가 그 산삼을 발견해 왕건에게 전해줬고 왕건은 흡족해하면서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라" 했지만 주인없이 놓은 물건이라 전의에게 맡겨두었다.[7] 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육종[8] 고려가 건국되던 제121화부터 내내 아파왔다. 누이동생에게 이 소식을 들은 견훤이 능애와 의원을 상주로 보내 "살펴보라"고 했으며(이 둘은 곧 쫓겨났다.) "천 년 묵은 산삼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그 의원의 말을 이흔암의 후임으로 충주에 왔던 박술희가 듣고 상주한 것을 최응이 본 것이다.[9] 이를 두고 오다련유긍달을 비롯한 다른 신료들은 병부나 광평성에서 갑론을박들을 펼쳤다. 특히 유금필은 "이 모든 게 박술희 탓"이라며 아주 화를 냈다.[10] 해당 배역이었던 박상아가 MBC 드라마 《결혼의 법칙》에 주연 급으로 캐스팅되었고 이후 그 드라마를 끝으로 아예 연예계에서는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