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5:10:20

공예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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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종의 제1왕후
공예왕후 | 恭睿王后
고려 의종, 신종, 명종의 모후
공예태후 | 恭睿太后
출생 1109년 10월 2일
고려 전라도 장흥군
(現 전라남도 장흥군)
사망 1183년 11월 22일 (향년 74세)
고려 개경 개성부 연덕궁 후덕전
(現 경기도 개성시)
능묘 순릉(純陵)
재위기간 고려 제1왕후
1129년 5월 10일 ~ 1146년 2월 28일
고려 왕태후
1146년 2월 28일 ~ 1183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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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장흥 임씨(長興 任氏)
부모 부친 정안문충공 임원후
(定安文忠公 任元厚, 1089 ~ 1156)
모친 진한국대부인 부평 이씨
(辰韓國大夫人 富平 李氏, ? ~ 1138)
형제자매
6남 2녀 중 장녀 [ 펼치기 · 접기 ]
공예왕후
임극충(任克忠)
임극정(任克正)
임부(任溥)[1]
임극인(任克仁) → 임유(任濡)
임항(任沆)
정안 임씨(定安 任氏)[2]
임충빈(任忠贇)[3]
배우자 인종
자녀
5남 4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의종(懿宗, 1127 ~ 1173)
차남 - 대령후 왕경(大寧侯 王暻, 1130 ~ ?)
3남 - 명종(明宗, 1131 ~ 1202)
4남 - 원경국사(元敬國師, ? ~ 1183)
5남 - 신종(神宗, 1144 ~ 1204)
장녀 - 승경궁주(承慶宮主, ? ~ 1157 이전)
차녀 - 덕녕궁주(德寧宮主, ? ~ 1192)
3녀 - 창락궁주(昌樂宮主, ? ~ 1216)
4녀 - 영화궁주(永和宮主, 1141 ~ 1208)
종교 불교
관저 연덕궁(延德宮)
후덕전(厚德殿) 선경부(善慶府)
작호 연덕궁주(延德宮主)
시호 공예태후(恭睿太后) }}}}}}}}}
절일 곤녕절 (坤寧節)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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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인종의 제1왕후. 시호는 인종 恭효대왕과 恭 자 돌림이다.

본관은 정안(定安),[4] 출생지는 전라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이다. 문하시중을 지낸 정안공(定安公)[5] 임원후(任元厚)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6] 이씨의 딸이며, 인종과의 사이에서 고려 18대 왕 의종, 대령후 왕경, 원경국사 충희, 19대 왕 명종, 20대 왕 신종, 승경궁주,[7] 덕녕궁주,[8] 창락궁주,[9] 영화궁주[10] 이렇게 5남 4녀를 보았고, 고려 21대 왕 희종, 22대 왕 강종의 할머니가 된다.

2. 생애

고려사》에 따르면 공예왕후가 태어나던 날 밤 외조부인 문하시중 이위(李瑋)가 큰 황색 깃발의 꼬리가 고려 본궐의 정전인 선경전(宣慶殿)을 감싸고 도는 을 꾸자 외손녀가 왕후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본래 문종의 왕후를 배출했던 명문가인 경주 김씨 김인규(金仁揆)의 아들 김지효(金之孝)와 혼인할 예정이었으나, 혼인하는 날 저녁에 김지효가 문에 이르자 공예왕후가 갑자기 아파 죽을 지경이 되어 혼사가 무산되었다. 이에 딸의 병세가 걱정이 되었던 부친 임원후가 점을 치니 그녀의 귀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니 반드시 국모(國母)가 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기록의 면면을 따져보면 병으로 혼사가 무사된 뒤 점을 쳤다는 이야기로 두루뭉술하게 써 있지만 사실상 정략적으로 왕후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임원후의 부친인 임의는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까지 올랐기에 정안 임씨(定安 任氏)도 충분히 왕후를 배출할 수 있는 가문이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당대의 실력자 이자겸이 임원후를 개성부사(開城府事)로 좌천시키는 등 견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자겸은 권력을 넘어 임금의 자리를 노리고 이자겸의 난을 일으켰으나 곧바로 진압당한 탓에 실각한다. 이후 인종은 이모이기도 한 이자겸의 을 폐비시키고, 1126년 공예왕후와 혼인하면서 이 길몽은 현실이 된다. 마침 인종 또한 꿈을 꾸자 이에 대해 척준경은 "장차 임씨 성의 후비를 들일 것이며 왕자는 5명을 얻을 것이고 그 중 3명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꿈풀이를 했는데 이 내용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척준경이 단순히 꿈풀이를 해준 것이 아니라 공예왕후를 들이는 과정에서 척준경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했음을 암시한다는 주장도 있다.# 처음에는 연덕궁주(延德宮主)로 불리다가 혼례한지 10개월만에 훗날 의종에 오르는 장자를 출산하고, 1129년에 정식으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5남 4녀를 낳은 것으로 보아 부부의 금슬은 꽤 좋았던 것으로 보이며, 인종은 왕후를 특히 총애해 왕후의 고향을 부(府)로 승격시켜 주기도 했다. 공예왕후는 자신의 본관인 장흥(長興)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본래 장흥의 고려 시절 이름은 정안현(定安縣)이었고, 공예왕후의 가문 역시 정안 임씨(定安 任氏)였으나 인종이 직접 '길이 길이 번창하라'는 의미로 장흥으로 개칭하며 장흥부로 승격시켰다. 이 장흥부라는 지명이 지금까지 이어져 대한민국전라남도 장흥군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인종이 붕어한 후 아들인 의종 대에는 왕태후에 올라 왕실의 큰어른이 되었고, 거처 역시 후덕전(厚德殿)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의종과 갈등을 겪으며 마음 고생을 하는 일이 많아 왕후 시절에 비하면 굉장히 불우한 삶을 살았다. 공예왕후는 의종이 왕자였던 시절에 장자인 의종보다는 차남인 대령후 왕경을 총애해 왕태자로 삼고자 했는데, 이로 인해 의종은 등극 후 대령후 왕경을 의심하여 유배를 보내게 된다. 공예태후가 의종에게 대령후 왕경을 살려줄 것을 청하자, 의종은 지난 날의 섭섭함을 표출하며 이를 거절한다. 결국 공예태후는 버선발로 궁전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이때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자 의종 또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한다. 그렇게 의종과의 갈등이 잘 마무리 되었으나, 무신정변이 일어나 의종이 폐위되고 유약한 셋째 아들 명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무신정권의 난세가 열린다. 무신정변으로 한창 살육이 일어나는 와중에 의종의 태손(공예태후에게는 증손자)까지 살해당하는 등 왕실마저 피바람을 피하지 못한 탓에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병을 간병하던 넷째 아들 원경국사 충희가 죽었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지자 무신들에게 살해되었다고 생각하여 마음의 병도 얻었다. 훗날 신종이 되는 다섯째 아들 평량공(平凉公) 역시 치질로 오랫동안 문안 인사를 오지 못하자 평량공 역시 무신들에게 죽었다고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공예태후의 친가 사람들도 무신들의 핍박을 받았는데 특히 이의방의 형 이준의가 귀법사(歸法寺)의 난[11] 직후 "이의방에게 3가지의 잘못이 있다."며 꾸짖을 때 언급했던 것 중 하나가 무려 공예태후의 여동생을 겁간한 것이라고 한다.[12] 그래도 여동생을 제외한 남자 형제들[13]은 가문의 후광도 있거니와 다들 성품이 올곧고 무신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은 덕분에 비교적 순탄하게 관직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태후가 된 뒤로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하던 공예태후는 명종 13년인 1183년 75세의 나이로 결국 세상을 떠났고 순릉에 안장되었다. 《고려사》 예지 기록에 의하면 명종은 어머니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직접 별궁에 빈소를 차렸고 별궁에서 공예태후의 원찰까지 직접 걸어갔다. 명종은 재궁(梓宮)[14]을 실을 가마를 보내고, 공예왕후의 장례식을 인예태후의 전례에 따라 국왕의 장례식과 동등하게 하였다. 공예태후의 장례식이 끝나지 않았을 때 금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왔는데, 당시 금나라는 고려의 상국이기 때문에 비록 공예태후의 장례식이 끝나지 않았더라도 연회를 열고 풍악을 울려 웅장하게 맞이해 주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는 끝까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3. 대중매체

파일:무인시대_공예태후.jpg}}} ||
[1] 溥는 부,보,박 이 세가지로 훈음된다.[2] 동래 정씨 정사문(鄭嗣文) → 정서(鄭敍)의 부인[3] 이복형제로 파평▨대부인 파평 윤씨 소생[4] 현재는 장흥(長興)[5] 공작위로 정안후(定安侯)에서 진작되었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6] '국대부인(國大夫人)'은 왕실의 외척 여성에게 수여하는 외명부 최고의 작위로서 작위 앞에 삼한(三韓)인 마한,진한,변한과 같은 국명을 붙이거나 또는 어떤 글자를 붙여 '~국(國)대부인'으로 호칭했다. 고려 후기에는 국대부인의 봉작 범위가 넓어져 신하의 가족에게까지 작위를 수여했다. 국대부인 작위는 조선 초까지 이어졌으며 세종 대에 이르러서야 '국(國)'을 '부(府)'로 개칭하여 '부부인(府夫人)' 작위를 수여했다.[7] 공화후 왕영의 부인[8] 강양공 왕감의 부인[9] 신안후 왕성의 부인으로 원덕태후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외할머니[10] 소성후 왕공의 부인[11] 1174년 무신정권이 교종을 탄압하자 귀법사의 교종 승려들이 이에 반발해 난을 일으켰다.[12] 나머지 둘은 의종을 폐위한 뒤 그 사저와 을 취한 것, 국정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한 것이다.[13] 공예태후에게는 동복으로 여동생 1명 외에 5명의 남자형제가 있었다. 이 중 남동생인 것이 확실한 4남 임유, 5남 임항을 제외한 임극충, 임극정, 임부는 생몰년이 확실치 않다.[14] 왕과 왕후의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