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 제정 재상지종 15가문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 태후 가문 | ||||
경주김씨 신성태후家 | 정안임씨 공예태후家 | 경원이씨 인예태후家 | 안산김씨 원성태후家 | 당성홍씨 명덕태후家 | |
재상 가문 | |||||
파평윤씨 윤관家 | 해주최씨 최충家 | 청주이씨 이자림家 | 언양김씨 김취려家 | 황려민씨 민영모家 | |
동주최씨 최유청家 | 평양조씨 조인규家 | 횡천조씨 조영인家 | 평강채씨 채송년家 | 공암허씨 허재家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인종의 폐비 폐비 이씨 복창원주 | 福昌院主 | |||
출생 | 12세기 초반 추정 | ||
이자겸의 사저 | |||
사망 | 1195년 11월 27일(향년 80대~90대 추정)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 고려 제2비 - 복창원주 | ||
1125년 1월 18일 ~ 1126년 6월 2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 인주 이씨[1] | |
부모 | 부친 한양공 이자겸 (漢陽公 李資謙, ~ 1126) 모친 변한국대부인 해주 최씨[2] (卞韓國大夫人 海州 崔氏) | ||
형제자매 | |||
배우자 | 인종 | ||
작호 | 복창원주(福昌院主) | ||
관저 | 복창원(福昌院) | ||
시호 | 폐비 이씨(廢妃 李氏) |
[clearfix]
1. 개요
인종의 제2비였다가 폐비되었음.본관은 인천 이씨로 조선국공(朝鮮國公) 이자겸의 넷째 딸이다. 어머니는 해주(海州) 출신으로 문하시중을 지낸 최사추의 딸이다.
2. 생애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였지만 다른 가문의 여자가 인종의 후비가 되면 자신의 권세가 흔들릴까 두려워 인종에게 자신의 딸 둘을 후비로 삼도록 강요했다. 이에 언니인 연덕궁주에 이어 1125년 1월 18일 조카인 인종과 혼인하였다. 《고려사》 후비 열전에 따르면 이자겸이 반역을 꾀하여 떡에 독약을 넣어 왕에게 보내자 폐비가 몰래 왕에게 알렸고, 왕이 그 떡을 까마귀에게 던져 주었더니 까마귀가 먹고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자겸은 또다시 폐비로 하여금 독약이 든 약사발을 왕에게 보냈는데, 폐비가 독약이 든 약사발을 들고 가다가 일부러 넘어지면서 쏟아버렸다.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후 1126년 6월 20일에 폐비가 되었으나 이후에도 인종은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고 토지와 저택, 노비를 하사하는 등 후하게 대우하였다. 인종 사후 의종과 명종도 극진하게 대우하였다. 1195년 11월 27일(음력)에 사망하자 명종은 왕후의 예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3. 기타
1146년에 38세로 죽은 인종보다도 49년을 더 산 것으로 보아, 인종과 비슷한 나이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근래인 1970년대까지도 다섯 정도의 자녀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만큼, 첫째와 막내의 나이차가 부모자식급으로 많이 나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 고려시대에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인종의 모후인 문경태후는 15세에 예종과 혼인하고 아들인 인종이 7세 되는 해에 사망했다. 혼인하고 10달 뒤에 바로 인종을 낳았다고 해도 16세였고, 7년 뒤인 23세에 사망했다고 본다면 문경태후의 동생이였던 복창원주는 조카인 인종의 나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인종과 복창원주가 동갑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인종이 죽은 해에 복창원주의 나이가 38세 정도이고 그러면 87세에 사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만 60세만 넘어도 장수하였다하여 온 동네가 환갑 잔치를 할 정도로 평균 수명이 낮았던 시대에 87세까지 살았으니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복창원주가 1125년 입궁했을 당시 인종의 나이가 17세였는데 당시 기준으로 여성이 20세까지 미혼이면 혼기를 놓쳤기 때문에 보통 15세 정도에는 혼인을 시켰다. 또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복창원주가 초혼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 인종과 비슷한 연령대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만약 이자겸에게 친손녀가 있었다면 딸보다는 친손녀를 인종과 혼인시키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항렬로 따지면 어린 딸보다는 친손녀를 왕비로 삼는 것이 왕의 외조부이자 왕비의 친조부라는 어마무시한 위치에 올라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딸을 혼인시킨 것으로 보아 친손녀가 아예 없었거나 설사 있었더라도 외손자인 인종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기에, 쉽게 후사를 이을 수 있는 10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어린 딸들을 왕비로 들이는 무리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