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之美
(? ~ ?)
1. 개요
고려의 문신.본관은 인주 이씨.[1] 고려문벌 귀족으로 이자겸의 장남이다.
2. 생애
예종 13년인 1118년 정극영(鄭克永)과과 함께 송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이 둘을 위한 연회가 연경궁 연친전(宴親殿)에 마련되었으며, 예종은 물론 여러 종친들과 재신(宰臣),[2] 추신(樞臣)[3]들이 참석한다. 사행(使行)[4]의 목적은 바로 전 해에 송휘종이 직접 고려인 권적(權適) 등을 급제시키고 귀국길에 친필 조서를 내렸기 때문에 이에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였다. 이지미 등이 들고 간 표문 역시 예종이 직접 짓고 쓴 것이다. 예종 16년인 1121년 부친 이자겸이 좌리공신(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소성군 개국백(邵城郡 開國伯)에 봉해졌을 때 동생 이공의(李公儀)와 함께 관직이 올라간다.고려도경에 따르면 인종 원년인 1123년의 관직은 '정의대부 수상서병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同館伴 正義大夫 守尙書兵部侍郞 上護軍 賜紫金魚袋)'였다. 이자겸이 조선국공(朝鮮國公)에 오른 인종 2년인 1124년 4월에 비서감 추밀원부사(秘書監 樞密院副使)에 임명되고 7월 시예부상서 동지추밀원사(試禮部尙書 同知樞密院事)로 승진한다. 인종 3년인 1125년 5월 지주사(知奏事) 김부일과 과거시험을 감독해 이양신(李陽伸) 등 37명을 선발한다. 12월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한다.
인종 4년인 1126년 2월 25일,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과 여러 장군들[5]이 이자겸·척준경 주살을 시도한다. 지녹연 등은 초저녁에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가 먼저 그 당여(黨與)[6]들을 잡아 죽이고 시체를 성 밖으로 던진다. 당여(黨與)들 중 내직기두(內直旗頭) 학문(學文), 낭중(郞中) 왕의가 성을 넘어 도망쳤고, 이자겸과 척준경, 이자겸의 아들들에게 변고가 일어났음을 전한다. 이지미는 당황한 이자겸으로부터 여러 관료들에게 대책을 물으라는 지시를 받는데, 소집된 백관 모두 대책을 내놓지 못한다.
척준경에 의해 지녹연 등이 진압된 다음날 26일, 척준경은 날이 저물면 미처 잡아내지 못한 적들이 다시 일어날 것을 우려해 궁궐을 불살라 잔당을 색출할 것을 제안한다. 이지미는 이자겸의 지시에 따라 평장사 이수(李壽) 등에게 자문을 구했고, 서로 붙어있는 궁궐 건물 구조의 특성상 불이 번지면 진압하기 어려우니 옳지 않다는 답변을 받는다. 그러나 이지미가 들은 바와는 관계 없이, 척준경은 답변이 돌아오기 전에 궁궐을 태워버렸다. 이날 궁궐이 모두 불타버리고 산호(山呼)·상춘(賞春)·상화(賞花)의 세 정자와 내제석원(內帝釋院)의 회랑 수십 간(間)만이 겨우 남았다.
같은 해 3월 이자겸(李資謙)이 인종을 강제로 자신의 집인 중흥댁(重興宅) 서원(西院)으로 옮기게 한다. 인종이 남궁에 이르자 인종을 부축해 북문으로 모시려는 낭장(郞將) 지석숭(池錫崇)과 이자겸·척준경의 명령에 따라 지석숭을 끌고 나가려는 낭장(郞將) 이적선(李積善)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다. 왕의 옷이 찢어지고 복두(幞頭)가 망가지는데도 이지미는 동생 이지보와 함께 멀리 떨어진 문가에서 층계를 내려오지 않고 실랑이를 관망한다. 같은 달 인종이 금에 사대(事大)[7]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를 백관에게 묻는다.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이 이를 찬성해 둘의 의견에 따르고, 이지미에게 명하여 태묘에 가서 금을 섬기게 된 것을 고하고 그 가부를 점치게 하였다.
동생 이지언(李之彦)의 노비가 척준경의 가노와 불화를 빚는데[8], 척준경이 그 말을 듣고 대노하여 이자겸을 찾아온다. 이에 이자겸의 명에 따라 동생 이공의(李公儀)와 함께 척준경에게 가 화해할 것을 청한다. 척준경은 이전의 난리는 모두 너희들이 한 짓인데 어찌 유독 나의 죄만 죽어 마땅하다고 하느냐고 반문하며 받아주지 않고 인종에게 사직할 것을 청한다. 그러자 인종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김부일(金富佾)을 보내어 속히 사무를 보라고 하면서 안마(鞍馬)[9]를 하사한다. 이후 4월에 척준경(拓俊京)은 문하시랑 판병부사(門下侍郞 判兵部事)로 이지미는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로 승진한다.
5월, 이자겸과 사이가 틀어진 척준경이 이자겸을 체포해 팔관보(八關寶)에 가두고 당여(黨與)들을 처형한다. 이자겸이 구금된 것을 모르고 있던 이지미는 변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휘하 100명을 이끌고 광화문(廣華門)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광화문에서 이지미의 진입을 막자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이자덕, 김인규와 함께 병부로 들어간다. 저녁이 되자 이지미는 병부에 도착한 순검(巡檢)에 의해 체포되고 그 무리들은 흩어진다. 이자겸 일가는 서로 다른 지역으로 유배됐고, 이지미는 합주(陜州)[10]로 유배된다. 이자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영광에서 죽었고, 3년 후인 인종 7년 1129년에 왕이 사면을 내려 이지미와 형제들은 어머니와 함께 한 곳에서 모여사는 것을 허락하였다.
[1] 현재는 인천 이씨. 예전에는 경원 이씨, 인주 이씨 라고도 불렀다. 인천의 과거 지명이 경원(慶源), 인주(仁州)였기 때문이다.[2] 중서문하성의 종이품 이상의 관원으로 일명 재상(宰相)이라고도 한다.[3] 중추원과 추밀원의 종이품과 정삼품 관원으로 일명 추상(樞相)이라고도 한다.[4] '사신 행차'를 줄여 이르던 말.[5] 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오탁(吳卓), 대장군(大將軍) 권수(權秀), 장군(將軍) 고석(高碩) 등[6] 같은 편에 속하는 사람들. 조선시대 당파와 같은 의미다.[7] 약자가 강자를 섬기는 일[8] 너의 주인은 저위(宁位)에 활을 쏘고 궁궐을 불태웠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너 또한 관노(官奴)로 적몰되어야 마땅한데 어찌 나에게 모욕을 주느냐? 라는 내용이었다.[9] 안장을 얹은 말[10]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