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70000><colcolor=#fedc89> 고려국 평장사 정평공 김봉모 | |
휘 | 봉모(鳳毛) |
시호 | 정평(靖平) |
본관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생몰년도 | ? ~ 1209 |
출생지 | 고려국 동경 (現 경상북도 경주시) |
국적 | 고려 |
가족 | 부 김세린(金世麟) |
자녀 | 1남 김태서(金台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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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경주 김씨 평장사공파의 파시조이다. 전주 김씨의 시조 김태서의 아버지이다.2. 생애
김봉모의 묘지명에 따르면 김봉모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 김한공(金漢公)은 공부시랑(工部侍郞)이었고, 할아버지 김경보(金景輔)는 북면도감판관(北面都監判官)인데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 김세린(金世麟)은 문장으로 그 이름이 세상에 떨쳤는데 누차 추증되어 사공 상서좌복야(司空 尙書左僕射)[1]가 되었다.1155년 고려의 음서 제도인 문음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명종 때는 내시[2]를 지냈다. 이후 1176년 그 시대 여러 번 발생한 초적[3]의 난을 진압해 공을 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명복궁녹사, 군기주부[4], 상식국직장[5]과 춘방통사사인[6]등으 종7품~정7품 관직을 거쳤다. 정7품에 머물다 종6품의 감찰어사[7]로 승진했고, 곧이어 대부경이 되었다. 다시 많은 벼슬을 거쳐서 동북면지병마사[8]를 역임했다.
중세 중국어와 여진어를 통달해서, 동각이라는 곳에서 계속 거처했다. 이 외국어 실력이 인진사에서 판합문사에 제수되게 도와줬다.
말년인 1203년에는 추밀원[9]의 정3품 부사[10]를 재임했고, 후에는 중서문하평장사와 태자태부라는 관직으로 명예직이면서도 태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6년 뒤인 1209년 음력 6월 29일 사망했다.
3. 후손
김봉모의 아들 김태서 역시 평장사를 지냈는데, 글을 좋아하지는 않았고 탐욕스러웠다. 그 장남 김약선이 무신집권자 최우의 딸과 결혼했기에 아무도 김태서를 탄핵하지 못했다. 최항이 오승적(吳承績)의 죄를 무고한 뒤 강에 던져 죽일 때 연좌돼 가산이 적몰됐다. 일부 후손들은 김태서를 시조로 하여 전주 김씨로 분적하였으나, 다른 후손들은 경주 김씨 문선공파(文宣公派)[11] 등 주요 분파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
[1] 상서성의 장관.[2] 고려 때는 조선과 다르게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문관들이었다.[3] 한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도적떼.[4] 오늘날의 방위사업청인 군기감의 관직.[5] 왕의 수라상을 관리하던 상식국의 정7품 관직.[6] 태자부의 정7품 관직.[7] 현재의 감사원과 정부 내 경찰, 검찰.[8] 태조 이성계도 역임한 직위로써, 동북면의 병력을 관리하는 관직.[9] 국방위원회+대통령비서실의 역할.[10] 국방위원회인 추밀의 관직.[11] 이들의 파시조는 김의진의 4세손 김인경의 둘째 손자라는 김요(瑤)가 아니라, 사실 김경손의 손자 김자흥의 둘째 아들이자 김정윤(正潤)의 아버지인 김상보(上珤)이다. 근현대가 아닌 조선시대에 편찬된 족보들을 놓고 대조해보면 잘못된 부분을 밝혀낼 수 있다. 김요라는 인물과 관련하여 현대의 족보나 인터넷에서는 충숙왕이 김요의 글솜씨를 칭찬했다는 일화를 드는데, 김자흥의 생년으로부터 추산되는 김상요의 생년은 1300년 전후로 충숙왕과 동년배인 반면, 김요의 조부 김인경은 충숙왕보다 130년 전 사람이므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