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18:17:46

김봉모

<colbgcolor=#670000><colcolor=#fedc89> 고려국 평장사 정평공
김봉모
봉모(鳳毛)
시호 정평(靖平)
본관 경주 김씨(慶州 金氏)
생몰년도 ? ~ 1209
출생지 고려국 동경
(現 경상북도 경주시)
국적 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
가족 부 김세린(金世麟)
자녀 1남 김태서(金台瑞)

1. 개요2. 생애3.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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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경주 김씨 평장사공파의 파시조이다. 전주 김씨의 시조 김태서의 아버지이다.

2. 생애

김봉모의 묘지명에 따르면 김봉모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 김한공(金漢公)은 공부시랑(工部侍郞)이었고, 할아버지 김경보(金景輔)는 북면도감판관(北面都監判官)인데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 김세린(金世麟)은 문장으로 그 이름이 세상에 떨쳤는데 누차 추증되어 사공 상서좌복야(司空 尙書左僕射)[1]가 되었다.

1155년 고려음서 제도인 문음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명종 때는 내시[2]를 지냈다. 이후 1176년 그 시대 여러 번 발생한 초적[3]의 난을 진압해 공을 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명복궁녹사, 군기주부[4], 상식국직장[5]과 춘방통사사인[6]등으 종7품~정7품 관직을 거쳤다. 정7품에 머물다 종6품의 감찰어사[7]로 승진했고, 곧이어 대부경이 되었다. 다시 많은 벼슬을 거쳐서 동북면지병마사[8]를 역임했다.

중세 중국어여진어를 통달해서, 동각이라는 곳에서 계속 거처했다. 이 외국어 실력이 인진사에서 판합문사에 제수되게 도와줬다.

말년인 1203년에는 추밀원[9]의 정3품 부사[10]를 재임했고, 후에는 중서문하평장사와 태자태부라는 관직으로 명예직이면서도 태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6년 뒤인 1209년 음력 6월 29일 사망했다.

3. 후손


김봉모의 아들 김태서 역시 평장사를 지냈는데, 글을 좋아하지는 않았고 탐욕스러웠다. 그 장남 김약선이 무신집권자 최우의 딸과 결혼했기에 아무도 김태서를 탄핵하지 못했다. 최항이 오승적(吳承績)의 죄를 무고한 뒤 강에 던져 죽일 때 연좌돼 가산이 적몰됐다. 일부 후손들은 김태서를 시조로 하여 전주 김씨로 분적하였으나, 다른 후손들은 경주 김씨 문선공파(文宣公派)[11] 등 주요 분파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


[1] 상서성의 장관.[2] 고려 때는 조선과 다르게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문관들이었다.[3] 한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도적떼.[4] 오늘날의 방위사업청인 군기감의 관직.[5] 왕의 수라상을 관리하던 상식국의 정7품 관직.[6] 태자부의 정7품 관직.[7] 현재의 감사원과 정부 내 경찰, 검찰.[8] 태조 이성계도 역임한 직위로써, 동북면의 병력을 관리하는 관직.[9] 국방위원회+대통령비서실의 역할.[10] 국방위원회인 추밀의 관직.[11] 이들의 파시조는 김의진의 4세손 김인경의 둘째 손자라는 김요(瑤)가 아니라, 사실 김경손의 손자 김자흥의 둘째 아들이자 김정윤(正潤)의 아버지인 김상보(上珤)이다. 근현대가 아닌 조선시대에 편찬된 족보들을 놓고 대조해보면 잘못된 부분을 밝혀낼 수 있다. 김요라는 인물과 관련하여 현대의 족보나 인터넷에서는 충숙왕이 김요의 글솜씨를 칭찬했다는 일화를 드는데, 김자흥의 생년으로부터 추산되는 김상요의 생년은 1300년 전후로 충숙왕과 동년배인 반면, 김요의 조부 김인경은 충숙왕보다 130년 전 사람이므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