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子興
(1264 ~ 1323)
1. 개요
고려의 인물.2. 생애
아버지 김혼의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다.충렬왕 30년(1304) 좌부승지를 지내고 있었는데, 왕명을 받고 위구르 문자로 된 표문의 초고를 고려에 파견된 원 병부상서 백백(伯伯)에게 전달한다.
앞서 충렬왕 29년(1303) 11월, 충선왕을 모함해 왕위 계승을 막으려던 계획이 들통났다. 왕은 표문을 올려 스스로 송분 등 간사한 신하들의 말을 들은 것을 후회고 있음을 밝히며 선왕이자 아들인 충선왕의 귀국을 요청했다. 그러나 충렬왕과 송분 등은 충선왕의 귀국을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는데, 귀국을 다시 막아달라는 문서를 위구르 문자로 만들어 올린 것도 그 일환이었다. 원 중서성에서는 충렬왕의 표문에 따라 충선왕을 고려에 돌려보내려 했는데, 서명도 인장도 없는 위구르 문자 문서가 다시 나오니 환국을 중지시켰다.
심문을 위해 파견된 백백은 왕에게 앞서 표문을 보내 충선왕의 환국을 요청한 것이 사실인지를 물었고, 왕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다시 위구르 문자로 이를 막을 것을 요청했냐고 물을 때 왕은 모른다고 답했다. 충렬왕이 행성에서 심문을 마치고 궁궐로 돌아갔는데, 송분과 송방영, 한신이 왕에게 진술을 번복하라고 설득했다. 그리고는 김자흥에게 전할 말과 함께 문서 초고를 건네고, 혹 실수할까 한신이 따라서 행성으로 간다.
내가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아 곧 모른다고 답한 것이지, 이제 이 문서를 상자 속에서 얻고 보니 실로 나는 알았던 것이고, 다만 잊었던 것 뿐이다.[1]
김자흥이 백백에게 대신 전한 충렬왕의 말.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을 감싸려는 듯한 충렬왕의 번복에 백백은 화를 내면서도, 김자흥에게 이 문서 초고를 왕에게서 받을 당시 주변에 누가 있었는지를 묻는다. 김자흥은 송분, 송방영, 한신이 있었다고 답했고, 백백은 앞서 심문한 내용과 김자흥의 진술을 다시 정리한다. 송방영을 중심으로 심문하고 충렬왕이 변호하지 못하도록 한 끝에 초고는 송방영이 지었다는 것이 밝혀졌다.김자흥이 백백에게 대신 전한 충렬왕의 말.
김자흥은 김원상, 오현량 등과 함께 충선왕 반대파 처단에 일조한다. 훗날 충선왕은 무사히 귀국하고, 송린 등 충선왕을 음해했던 신하들은 모두 처형당한다. 충선왕 4년(1312) 계림군에, 충숙왕 3년(1316) 의흥군(義興君)에 봉해진다. 김자흥의 관직은 첨의평리에 이르렀다. 충숙왕 10년(1323) 6월 10일, 60세의 나이로 죽었다.
3. 가족관계
- 아들: 김상기
- 아들: 김상보
- 아들: 김상영
- 아들: 김상린
[1] 我倉卒承問, 輒以不知對, 今得此書箱篋中, 實我所知, 但忘之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