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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최씨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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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무신 집권자 / 제3대 최씨 집권자
최항 | 崔沆
시호 <colbgcolor=white,#191919>광정공(光正公)[1]
작위 우봉군 개국공(牛峯郡 開國公)[2] / 진평군 개국공(晋平郡 開國公)[3]
본관 우봉 최씨
이름 만전(萬全) → 항(沆)
아버지 최우(崔怡)
아들 최의(崔竩)
사망지 고려 강도(江都) 견자산(見子山) 별장
묘소 고려 강도(江都) 진강현(鎭江縣) 서창지(西昌支) 북쪽 언덕
생몰연도 ? ~ 1257년 5월 24일[4](음력 고종 44년 윤4월 2일)
1. 개요2. 생애
2.1. 후계자 정쟁2.2. 정권 계승2.3. 반대파 숙청2.4. 몽골의 침입과 항전2.5. 말년과 최후2.6. 사후2.7. <최항 묘지명>
3. 평가4. 대중매체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려의 관료. 무신정권의 제7대 집권자.

초명은 '만전'(萬全)으로 아버지 최우로부터 '항'(沆)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아버지의 권력을 독차지해 강도에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최항은 8년 동안 집권했으며 무신정권 안정기의 마지막 집권자이다. 갈수록 엉망진창이 돼 가던 국가를 위해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본인 사후 후계자 최의가 다락방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으면서 최씨 정권이 몰락하고(무오정변) 고종의 붕어와 맞물려 정국이 급변해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2. 생애

2.1. 후계자 정쟁

만전의 어머니는 폐출 기생이었던 서련방이라는 여인으로 미천한 창기 출신 천민이었다.[5]

고려시대 당시에는 원칙적으로 남자 후손이 대를 이어야 했지만 최항은 어머니가 천민인 폐출 기생으로써 그의 신분 자체가 서얼에 차남이었기 때문에 최우의 사위인 김약선이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그리하여 그가 정권을 잡기 이전에는 송광사의 승려 생활을 하면서 쌍봉사의 주지로 있었다.

자기 형인 만종과 마찬가지로 송광사의 승려일 때 문도들을 모으거나 재산을 모으는 데만 열중해 많은 액수의 금, 비단, 무려 50만 석에 해당하는 쌀을 고리대로 가혹하게 모았다.

쌀들을 백성들에게 대여하면서[6] 이자를 만들어 추수가 되면 독촉하고, 도적을 고용해 백성들을 폭행과 협박 등으로 위협하여 백성들의 재산을 마구 걷어갔으며, 가렴주구하여 백성들은 낟알이 남지 않아 조세를 바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그가 거느린 문도들은 서로를 '관인'이라 호칭했으며 예쁜 유부녀를 강간하거나 역마를 자신의 것처럼 타는 등 제멋대로 불법적인 행위를 실행했는데 그의 제자였기 때문에 각처 부서에서는 감히 간섭하지 못했다고 한다.

원래는 정권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매부 김약선이었지만 최항(만전)의 음모와 최항의 누이이자 김약선의 아내였던 최씨의 무고로 김약선이 억울하게 최우에게 숙청당하면서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다.

아버지인 최우가 대제 임익에게 글, 시랑 권위에게 예법을 가르치게 하여 이를 배웠으며 아버지에게서 가병 500명을 받았다고 한다. 제23대 고종 35년인 1248년 승려 신분인 '공자'라는 지위에서 환속하면서 환속한 이후부터 좌우위 상장군, 호부상서 등을 거쳐 추밀원지주사 등의 벼슬을 하게 되었다.

2.2. 정권 계승

무신 정권 기구
<rowcolor=#fff> 정치 기구 사병 기구 친위 겸 정규군 기구
<rowcolor=#fff> 연립 ~ 최충헌 최충헌 최우 ~ 임연 경대승 ~ 임연 최우 ~ 임유무
중방(重房) 교정도감(敎定都監) 교정도감 & 정방(政房) & 서방(書房) 도방(都房) 삼별초(三別抄)


1249년 11월에 아버지인 최우가 사망하자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 태자빈객, 동•서북면 병마사'를 겸하는 교정별감이 되어 할아버지 최충헌과 아버지 최우에 이어 최씨 정권의 제3대 집권자가 되었으며 아버지가 사망한 지 이틀 만에 상복을 벗고 아버지의 첩[7]과 간통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집권 초기에는 민심을 얻기 위해 무당들을 성 밖으로 내쫒고,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과 선박세를 면제했으며, 가렴주구를 일삼는 교정별감의 수획원을 소환하면서 안찰사에게 그 임무를 맡겼고, 선지사용별감으로 임명한 나득황, 하공서, 이경, 최보후 등이 백성들을 착취하자 이들을 파직했다.

하지만 수 년 후에 이들을 임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분개했으며, 아버지 최우에게 물려받은 사택(私宅)의 확장 공사를 하는 등 점차 사치와 향락에 빠져서 민심을 잃었다.

2.3. 반대파 숙청

고종의 명으로 재상에 임명되면서 이미 사망한 그의 어머니 서련방은 정안택주에 봉해졌으며, 이후 고종이 최우의 식읍이었던 진주의 녹전세포, 요역, 공납 등을 바치려고 하자 이를 사양했다. 장봉택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견자산 진양부로 옮겨간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다고 한다. 대경 최온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가 병이 있었고 나이가 한참 어린 것 때문에 이를 버리고 고려군 총사령관 조충의 아들인 조계순(趙季珣)의 딸을 취했다.

대경 최온의 딸 대신에 조계순의 딸에게 장가를 들자 고종이 견룡, 중금도지, 순검백감, 내시, 다방 등에게 최항을 호위하도록 명령하면서 어좌의 견여와 등불 뿐만 아니라 황금경렴과 장구 등을 하사하자 여러 왕족들과 신하들도 금을 바치면서 축하했다. 또 조부 최충헌의 초상화, 부친 최우의 초상화를 각각 창복사와 선원사에 옮겼을 때 참상별감, 참외별감 및 문관, 무관 등 각 20명이 인도하여 따랐는데 태조 신성대왕 왕건의 초상화를 옮기는 의식과 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본래 승려였을 때 보주부사 조염우, 도강감무 박장원 등에게 원한이 있어서 이들을 섬으로 귀양보냈는데, 평소에 두 사람과 친하게 지내던 시어사 이선이 경상도 안찰사에 임명되자 두 사람을 불러 잔치를 하여 현령 권신유도 이에 참여했다. 그런데 어떤 승려가 "이선이 권신유와 더불어 조염우 등을 불러 반란을 모의한다"고 고변하자, 자초지종을 따져보지도 않고 이들 4인을 붙잡아 강에 던져 죽였다.

1250년에 정적인 송국첨을 우산기상시로 삼았으며, 평소에 마찰을 빚던 김지대를 죽이려고 했지만 죽이지 못하였다. 강화도 중성을 쌓은 공으로 고종이 문하시중에 임명하면서 진양후에 봉하려고 하자 이를 사양하면서 받지 않았다.

달이 상상성(上相星)을 침범하자 사천대(司天臺)에서 아뢰기를,
“달이 상상성을 침범한 것은 점서(占書)에서는 ‘임금님께 우환이 있을 징조이다. 상상성이 없어지면 난신(亂臣)이 나타나 신하가 임금을 대신한다.’라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당시 고종이 장차 몽골 사신을 영접하기 위하여 제포궁(梯浦宮)으로 행차하려는 중이었으므로, 사천대가 왕이 행차를 중지하고 수신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불쾌감을 느낀 최항은 어사대를 통해, 사천대에서 별의 변화를 함부로 아뢰었다는 이유로 이들을 탄핵하여 판대사 최윤단, 태사승 오안구 등을 파면시켰다.

1251년에 계모인 대씨가 경쟁자였던 김약선의 아들이자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외조카 김미를 돕자 이를 원망하여 대씨의 작호인 '택주'를 빼앗으면서 그녀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 다음엔 야별초의 황보준창을 시켜서 대씨의 전 남편의 아들인 의붓동생 오승적을 바다에 던져 죽이려 돌을 묶었으나 처형을 집행하려던 도방 군사 중 한 명(황보준창)이 최항에게 원한을 가져 죽이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돌을 대충 허술하게 묶는 바람에 오승적은 살아남아서 강도를 천신만고 끝에 빠져나와서 금강산에 들어가 숨었다가 어머니 대씨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집의 노비가 밀성에서 이를 누설하면서 부사 이서에게 이를 보고받자 분노한 최항은 오승적을 다시 붙잡아 강에 던져 죽이고, 황보준창 등 6명을 처형했으며, 대씨를 해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강제로 독약을 먹여 독살했다. 또한 대씨의 족당, 여러 노비 등 70여명을 죽이거나 귀양보냈다.

게다가 지추밀 민희, 추밀원부사 김경손[8] 등이 민심을 얻자 이를 시기했는데 이들을 해도로 귀양을 보냈고, 김경손은 후에 대장군 송길유를 보내 배소의 바닷물에 빠뜨리는 방법으로 처형시켰다. 그 밖에도 좌승선 최훤, 장군 김안, 지유 정홍유, 부친 최우의 시첩 13명을 방자하다는 이유로 귀양보냈으며, 남도로 귀양보낸 자들 중에 참지정사 정안[9] 등 대다수를 이유불문하고 물에 빠뜨려 살해했다.

부친 최우의 남동서이자 전(前) 추밀원부사인 주숙이 일찍이 자기에게 붙었기 때문에 대우를 후하게 하면서 자문을 구하였는데, 최항이 견자산(見子山)의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주숙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니, 이때부터 서로 의심하고 꺼리게 되었다. 나중에 최항은 낭장 임경을 보내 주숙을 섬으로 귀양을 보내던 와중에 무참하게 때리고 웅천에서 물에 빠뜨려 살해했다.

특히 주숙은 귀양지에서 죽기 전에 장군 김효정이 왕에게 정권을 회복시켜 주고자 모의했다고 하자 김효정도 자초지종을 따져보지 않고 똑같이 귀양보냈다가 죽이고, 주숙의 사위인 장군 최종필, 나주부사 이윤 등을 귀양보냈다. 고종이 후에 봉하자 최항은 이를 사양했다.

2.4. 몽골의 침입과 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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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반대파들을 숙청하던 1251년에 몽골에서 제4대 몽케 칸이 출륙 및 개경 환도와 고려 국왕의 입조를 요구하자 1252년에 이현을 몽골로 보내면서 그에게 금년 6월에 출륙하겠다고 얘기하도록 지시했다. 이현이 몽골에 이르면서 몽케 칸에게 최항이 지시한 바에 따라 대답했으며, 몽골에서는 출륙을 확인하기 위해 이현을 몽골에 머물도록 하면서 도케, 아투 등을 보내 고종이 육지에서 나오지 않으면 그들 사신들이 돌아오는 대로 군사를 보내겠다고 얘기했다.

몽골에서 국왕의 출륙을 요구해오자 응하는 척하면서 승천부에 새로운 궁궐을 짓고, 도케 등을 따라온 이현의 서장관인 장일이 이를 고종에게 비밀리 알리면서 고종이 이를 묻자 최항은 "강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면서 몽골 사신 접견을 강력하게 반대하자 공경들 모두가 최항의 뜻에 맞추었다. 고종이 이를 따라서 신안공 왕전을 육지로 나가게 했으며, 이에 도케, 아투 등은 왕이 명을 듣지 않았다고 분노하며 몽골로 돌아갔다.

1253년에 고종이 문하시중 판리부 어사대사에 임명하자 이를 사양했으며, 고종이 후로 봉하였다. '구요당'을 대궐 서쪽에 지어 완성하자 고종이 이를 관람했는데 친시 20인, 구사 20인, 진배파령 20인 등에게 처음으로 벼슬을 주었으며, 또한 감독관인 상장군 박성재의 아들 1인에게 진배파령을 허락하면서 공장들도 차등에 따라 상을 주었다.

이때 천도하면서 몽골이 출륙을 독촉했으며, 예케, 아무칸 등이 홍복원을 대동한 몽골군이 제5차 침입을 단행하면서 가는 곳마다 잿더미가 되었다. 이때 영녕공 왕준과 이현 등이 몽골의 대칸이 크게 노했기 때문에 출륙 요구에 응하라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대부분이 "태자 또는 안경공을 보내어 출영하자"는 의견을 내세우자 "출영하면 태자나 안경공을 잡아서 항복을 요구할 것"이라 설득하여 출영하자는 의견을 중지하도록 했으며, 충주성 전투에서의 몽골군의 패배, 예케의 병으로 인한 철수로 몽골군이 불리해지자 안경공 창을 인질로 보내어 몽골군을 철수시켰다. 계엄령이 끝난 뒤에는 이현을 기시형에 처하고 그 아들들은 바다에 던져 죽였으며 그 사위와 처는 유배보낸 뒤 조방언, 정신단은 유배를 보낸다.

1254년 음력 7월에 냉혹함이 차가울 정도로 잔인한 자랄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제6차 침입을 개시했다. 최항은 북계병마사의 보고를 받자 전국에 계엄령을 내리고 5도 안찰사, 3도 순문사에게 지시하여 각 지방의 백성들을 독촉하여 산성이나 해도로 들어가게 했다. 몽골군은 계속 남진을 하면서 고종의 출륙과 항복을 요구했으며, 이에 회의에서는 태자나 안경공 창을 보내자는 의견이 다시 나왔지만 실권자였던 최항이 이를 반대하고, 계속 사신을 보냈다.

이 때문에 몽골군에게 "철수하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했으며, 몽골군은 "고려가 우리의 요구를 실행해야 철수하겠다"는 등의 외교적인 마찰이 계속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몽골군의 공격으로 고려 본토는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나중에 충주성, 상주산성의 승리로 강화를 체결하게 되는데 이 해에 몽골이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수령을 처벌하고 이현을 처형한 걸 구실로 삼아 다시 출륙을 요구하자 최항 자신을 비롯한 이응렬, 주영규, 유경 등은 이를 가지 않고, 오로지 국왕인 고종만이 잠시 출륙하게 되었다.

이렇게 몽골군이 출륙을 요구하면서 침입하는 와중에 최항은 집에서 잔치를 열고는 재상과 추밀원이 격구를 태평하게 관람했으며 왕족, 재상과 추밀원, 승선, 문•무 4품 이상 등을 대접했다. 1255년에 고종이 식읍을 더 봉하면서 박성재 이하 공장에 이르기까지 상을 내리자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후 중서령 감수국사에 올랐으며, 신급제 곽왕부 등이 자신을 만나자 누각에 올라가 그에게 화주를 주었다.

그러나 1255년에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한 몽골군이 부장인 예수타이, 보포타이와 홍복원, 영녕공 왕준을 대동하여 제7차 침입을 하여 여러 곳을 공격하자 몽골에 갔던 김수강이 몽골군이 철수하면 출륙 환도와 국왕의 입조를 한다는 조건으로 몽케 칸을 설득하여 이 해에 몽골군이 철수했다.

2.5. 말년과 최후

몽골군이 철수한 1256년에 고종이 '제중강민공신'호를 하사했으며, 전(前) 서해도 소복 별감인 송극현으로부터 낭실 309곡을 뇌물로 받자 송극현을 어사로 임명하면서 사람들이 이를 '낭실어사'라 비아냥거렸다. 전(前) 학록 정성이 이르기를 '하동 감무 노성이 향인 이규, 이창과 의형제를 맺고, 부사 설인검, 남해현령 정고, 급제 유여해, 중 명취 등을 불러모아 국정을 비방한다'고 하자 노성, 이규, 이창 등을 참수하고, 설인검, 정도 등을 해도에 유배시켰는데 사람들이 정성을 '식인자'라 비난했다.

1257년 4월 2일에 중서령 - 감수국사의 벼슬을 지내다가 병이 위독하여 고종이 그를 위해 감옥의 죄수들을 석방했으며, 병든 몸을 부축하여 후원 소정에 올라 사세구를 지은 후 침석에 돌아와 죽었다.
복사꽃 향기는 수천 집을 감쌌는데
비단 휘장 향취는 10리에 빗겼구나.
난데없는 미친 바람 좋은 자리에 불어와
붉은 꽃잎 마구 몰아 긴 강을 지나가네.
桃花香裏幾千家,
錦幄氤氳十里斜.
無賴狂風吹好事,
亂驅紅雨過長河.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죽어갈 때 쓴 사세구. 최항은 아비인 최우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꽤나 감성적으로 멋들어진 시를 남겼다. 《고려사》 <최항 열전> 중 발췌.
향년 48세였고, 사후에 시호 '광정공', 작위 '진평군 개국공'에 추증되었다. 본처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승려가 되면서 송서의 여종과 사통하여 낳은 최의를 후계자로 삼고 그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2.6. 사후

1257년 8월 26일, 고려 강도 진강현, 현 대한민국 강화도 진강산 일대에 안장되었다. 사후 김준무오정변을 일으켜 최항의 서자 최의를 살해하자 공신전 회수를 비롯한 재산 전체가 몰수되었다.

1963년 강화도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의 야산에서 최항 묘지석이 발견되었고, 그의 묘소 근처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된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가 출토되어 국보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1963년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어 부장품으로 나온 고려청자일본으로 반출되었으나 다행히 경매를 통해 다시 돌아왔다.

2.7. <최항 묘지명>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도에서 <최항 묘지명>이 발견됐다. 현재 <최항 묘지명>은 삼성호암미술관에 있다. 묘지명 상단 기록상 최항의 최종 관직은:
  • 공신호: 강민제세공신(康民濟世功臣)
  •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10] - 특진(特進)[11] -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12]
  • 수직: 수태사(守太師)[13]
  • 직위: 중서령(中書令) - 상장군(上將軍) - 감수국사(監修國史) - 판이부어사대사(判吏部御史臺事)
  • 태자삼사: 태자태사(太子太師)
  • 훈위: 상주국(上柱國)
  • 작위: 우봉군 개국공(牛峯郡 開國公)
  • 식읍: 3,000호
  • 식실봉: 1,000호
  • 시호: 광정공(光正公)
이다. 정말 어마어마하다.

<최항 묘지명>엔 특이하게 작위가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묘지명 상단에는 '우봉군 개국공'(牛峯郡 開國公)으로 되어 있다. 정작 묘지명의 마지막엔 고종이 '진평군 개국공'(晋平郡 開國公)으로 추봉했다고 한다.

묘지명의 기록은 《고려사》 <열전> 기록과 얼추 비슷하다. 다만 몇 가지 차이가 있는데:
  • 《고려사》엔 '제중강민공신'(濟衆康民功臣)호를 받았다고 되어 있지만 본인 묘지명엔 '강민제세공신'(康民濟世功臣)으로 나온다.
  • 《고려사》엔 최항의 시호 '광정공'(光正公)이 나오지 않는다. 고종이 추봉한 작위의 약칭 '진평공'(晋平公)만 나온다.
  • 묘지명엔 최항이 쌓은 강도중성(江都中城)을 '황도중성'(皇都中城)이라고 표현했다.
  • 묘지명엔 할아버지 최충헌, 아버지 최우, 장인 사홍기를 설명할 때 모두 '황'(皇) 자를 앞에 붙혔다.
  • 묘지명은 최항의 죽음을 '훙'(薨)으로 표현했다. '훙'은 제후왕의 죽음에만 쓰는 단어인데 이걸 최항한테 쓴 것이다. 당시 최항의 강력한 권세를 느낄 수 있다. 조부인 <최충헌 묘지명>에도 최충헌의 죽음을 '훙'(薨)으로 표현했다. 《고려사》엔 '졸'(卒)보다도 낮은 '사'(死)라고 하여 두 사람을 비난했다.
  • 묘지명에 자기 아버지 진양공 최우의 죽음을 '졸'(卒)로 표현했다. 《고려사》엔 '사'(死)라고 하여 어떤 대우도 해주지 않았다.
  • 묘지명엔 당시 몽골을 '적'(狄), '몽사'(蒙使)라고 부르며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 묘지명엔 최항이 외궐(外闕)을 지어 몽사(蒙使)를 받았다고 한다. 이 외궐은 고려궁지에 지은 제포관, 제포궁이나, 강도 밖 개경 승천부에 지은 승천궐(昇天闕) 중 하나일 수 있다.

3. 평가

최항의 집권은 집권 과정부터 꽤나 진통이 심했는데, 당장 부친 최우의 경우에도 동생 최향과의 권력 투쟁이 있었지만, 최항 본인의 경우에는 이보다 더 심한 권력 투쟁을 겪어야 했다. 최항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승려 생활 때 했던 불법 행위들로 인해 관리들로부터 그의 자질을 의심받았기 때문. 앞서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최우의 사위 김약선신종(제20대) 대에 문하시랑평장사를 하던 김봉모의 손자이면서 동시에 평장사 김태서의 아들이었던 지체 높은 신분의 자제였던 것에 비하면 최항은 어머니 서련방이 천민(창기) 출신이라는 점이 치명적인 컴플레인으로 작용했다. 이는 고려 신분 사회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었으며, 이러한 약점으로 인해 그는 정권을 이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히 최씨 정권 내부 인물들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정적 송국첨을 우산기상시로 삼거나 1251년 내부 반대파들을 제거했는데, 이 때문에 세력이 약화되어 아들 최의가 뒤를 잇지만 곧 김준을 포함한 반대파에 의해 목숨을 잃으면서 최씨 정권은 막을 내렸다.

조부 최충헌과 부친 최우 시대의 문제점[14]들이 최항 본인 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항은 부친 최우로부터의 권력 승계 과정에서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김약선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후에 김약선의 아들 김미가 외숙부 최항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전 추밀원부사 주숙도 최우가 사망하자 왕정 복고를 노리며 거병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죽임을 당했다. 문제는 최항이 자신의 권력 독점을 위해 제거해야만 했던 이들이 모두 선대 최우 정권의 핵심들이었다는 점으로, 이들의 제거는 최씨 정권의 분열을 의미하였다.

실제로 최항의 권력은 할아버지 최충헌과 아버지 최우에 비해 매우 약화된 상태였다. 최우에게 힘을 실어준 여몽전쟁이 매우 장기화되면서 고려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몽골과의 강화를 통해 전쟁을 그만 빨리 끝내자는 여론이 서서히 일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정적으로 권력 기반과 능력치 모두 최우에 비해 심각하게 딸렸기에 여러가지 뻘짓을 저질렀다.[15] 최우가 실시했던 '해도 입보책'[16]을 재실시하면서 해안 주민이 아닌 내륙의 청주 주민들을 억지로 섬으로 옮기고 반항하는 자는 재산을 파괴하는 희대의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몽골군에 항복하는 고려인들이 매우 늘어났는데 지방관들을 살해하고 몽골에 투항하는 사례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이 때부터다. 물론 집권 8년만에 사망해서 두번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사실상 최씨 정권의 붕괴를 예고함은 물론, 더 나아가 무신정권 종말의 밑밥을 깔아놓은 시대였다.

4. 대중매체

  • 2003년 KBS 드라마《무인시대》에서는 아역으로 마지막 회에 잠깐 나온다. 최우가 최향을 이기고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어 후계 구도가 정립되고 난 후 한가로운 일상을 보내는 최충헌에게 문안을 올리는 모습으로 등장. 할아버지인 최충헌에게 재롱을 떨면서 "금강야차를 벤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하는데 이 때 최충헌은 "충수진재를 비롯한 인물들과 거병했던 일이 벌써 20년도 더 지났는데 아직도 생생하다"며 옛 생각에 젖어든다. 최충헌 정권을 총정리해야 하는 마지막 회에서 최충헌이 옛 생각에 젖어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지만[17] 최항이 천출로서 한동안 후계자의 '후' 자도 말하지 못할 사람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고증오류였다.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484519_STD.jpg* 2012년 MBC 드라마《무신》에서는 배우 백도빈[18]이 연기했다. 대체적으로 이 작품에서는 등장 인물들을 미화하는 경향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대로 인간 말종으로 그려진다. 얼자 중 차남이다 보니 아버지 최우를 아버지라고 하지 못하고 "영존(令尊) 어른"[19]으로 부른다. 아버지가 숙부와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형 만종과 함께 한가롭게 기방이나 출입하며 주색잡기에나 전념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며[20] 항상 최우의 골치를 썩이는 존재로 그려진다. 주인공 김준의 첫사랑인 월아를 노렸지만 선을 넘지는 않았으며 형 만종이 계속해서 월아에게 집적대다가 최양백 때문에 월아를 시기하고 있던 여종 춘심의 꼬드김으로 일을 저지르게 된다. 결국 월아는 겁탈을 당한 충격으로 비상이라는 독약을 먹고 자결했고 이 일로 최우의 노여움을 제대로 사서[21] 형 만종과 함께 처형당할 위기에 놓이지만 자신들을 제외한 가담자들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그치고 삭발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쫓겨났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에도 개과천선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고리대금업으로 평민들을 쥐어짜내고 있었는데 최우의 명령을 받은 김경손에 의해 부하들은 처형당하고 다른 로 보내지지만 이 때 김경손에게 나중에 반드시 죽여주겠다고 저주를 남기기도 한다. 이후 후계자 논의에 고심한 최우의 밀지를 받은 김준을 만날 무렵에는 "꿈에서 백성을 구제하라는 부처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우며 평민들에게 빼앗은 쌀을 공짜로 나누어 주는 등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강화도로 돌아온 뒤에는 김준이 아닌 최양백을 수하로 끌어들이는 등 세력을 키운다. 최우가 세상을 떠나고 정권을 이어받은 직후에는 2일만에 상복을 벗고 놀자판을 벌이는 등 막 나가는 모습이 역사 기록에 충실하게 재현되었으며 위험 인물로 판단되는 사람이 있으면 가차없이 역모로 모는 숙청극 역시 그대로 재현했다. 하지만 일이 돌아가는 꼴을 보다 못한 김준이 최항과 독대를 한 자리에서 검을 겨누고 꾸짖으면서 최우의 유언과 김준에게 최우의 후계자로 낙점받았을 때 했던 약속[22]을 되새겨주며 "조조는 미천한 환관의 아들이었음에도 열등감을 벗어버리고 난세의 영웅이 되었다"며 격려하게 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최항은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김준에 의해 독살당했다. 최항은 천출 출신인 아들 최의에게 대를 잇게 했으며 김준이 자신에게 독을 먹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숨을 거두기 직전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면서 "그를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눈물을 흘린 채 숨을 거둔다.[23]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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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12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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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위제 · 이녕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송길유 · 심우경 }}}
123권 「폐행1(嬖幸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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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위와 더불어 추증됨. <최항 묘지명>의 기록이며, 《고려사》에는 역적으로 기록되어 작위나 시호는 정식 기록상 삭탈관직되었으므로 나오지 않음.[2] 아마 생전 작위인듯 하다. <최항 묘지명> 기록.[3] 시호와 더불어 추증됨. <최항 묘지명> 기록.[4] 율리우스력 5월 17일[5] 일명 일천즉천. 부모 중 한 쪽이 천민이면 자연스레 천민 신분이 된다는 개념으로 고려시대에 본격화되었다가 태종 대에 종부법, 세종 대에 종모법으로 전환되었으나 그 인식은 바뀌지 않아서 19세기 말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혁파된 후로도 사람들의 뇌리에서는 사라지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조선인들을 분열시키고자 아예 신분 차별을 묵인했었다. 해방 후로도 이러한 인식은 남아 있다가 6.25 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뒤집어지고 나서야 신분제 잔재가 사라졌다.[6] 이것도 백성들이 필요해서 빌려간 것이 아니라, 굳이 필요하지 않은데도 백성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빌려가게 했다.[7] 연화라는 기생이었는데, 그녀는 본래 아버지 최우의 애첩이었다.[8] 여몽전쟁(귀주성)의 영웅이었지만, 경쟁자였던 김약선의 동생이자 계모 대씨의 아들 오승적의 사돈이라는 이유와 송광사에서 행패를 부리는 만종, 만전 형제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핍박(?)했던 행태 때문에 최항의 원한을 사게 되어 죽임을 당했다.[9] 정안은 아버지 최우의 정실부인 정씨의 남동생, 즉 최항의 외삼촌이었다.[10] 종 1품. 문산계 중 최고위 품계.[11] 정 2품.[12] 종 2품.[13] 수직은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힌다. 태사는 정 1품, 최항은 종 1품이니 수태사가 된 것이다.[14] 교정도감 개설로 인한 국정 운영의 혼잡함과 삼별초(무신정권사병 집단)의 정예화로 인한 정규군의 질적 하락, 최씨 정권 구성원들의 부정부패 등이 있었다.[15] 최우 정권 시기에 중용받던 귀주성 전투의 전쟁 영웅인 명장 김경손을 죽여버린 것이 대표적인 실사례라 할 수 있다. 본래 최우는 탐욕스럽고 잔혹했을지언정 사리분별 능력은 있어서 김경손의 형 김약선을 최우의 딸이 한 모함을 듣고 처형해버릴 때에도 김경손을 딱히 연좌제로 처벌하지 않았다. 근데 최항은 김경손이 연루된 사건이 딱히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신임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죽여버렸다. 본시 김방경의 경우도 위도를 지켰으나 이 김경손 살해 사건을 계기로 훗날 대몽 주화파로 돌아서게 되었다.[16] 백성들을 섬에 거주하게 하면서 수전에 취약한 몽골군을 상대하는 계책이었다. 고려로 쳐들어왔던 몽골군은 해전 능력이 상당히 형편없었기 때문에 적잖은 효과가 있었다.[17] 이 장면 이후 최충헌은 쓰러지고 환각 속에서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에게 크게 혼이 난 후 일어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간다.[18] 아버지는 배우 백윤식, 아내는 배우 정시아, 남동생은 배우 백서빈.[19] 남의 아버지를 높이는 호칭[20] 이 때문에 최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가신 송길유와 노군의 중군장 이공주조차도 이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저것들도 사람이란 말인가!"라고 말할 정도다.[21] 최우가 추국장에서 한 말에 따르면 그들에게 보쌈당하고 겁탈당한 여인들이 셀 수가 없으며 죽은 여종도 2명이나 되었다고 한다.[22] 최우의 유언은 가신들을 버리지 말 것과 계모를 어머니, 그 아들인 오승적을 형제로 대하라는 것이었다. 한편 김준과의 약속은 후계자로 선택받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절박함을 잊지 않겠다는 것과 그 절박함으로 백성을 생각하고 가신들을 살핀다는 것이었는데 이를 지키지 않으면 목숨을 내놓겠다는 조항도 들어 있었다.[23] 실제 역사적으로도 김준은 최항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에도 최항의 심복으로 신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