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23:33:57

자랄타이

Jaraltai
(? ~ 1259)

1. 개요2. 침입 일대기

1. 개요

여몽전쟁 시기 몽골 제국의 장수로, 고려 측 사서에는 차라대(車羅大), 《원사》와 《몽올아사기》(몽골사기)에는 살리타이로 쓴 이름인 찰랄태(札刺台), 《해동역사》에는 차라대(箚刺䚟)로 기록되어 있다.

《원사》 권 133 열전 20 <탑출[1]전>(塔出傳)에 따르면 몽골 잘라이르부 출신의 자랄타이는 태조 칭기즈 칸 때부터 몽골 제국을 섬긴 역전의 용장으로 1254년부터 제4대 헌종 몽케 칸의 명령에 따라 고려 방면의 경략(經略)을 맡게 되었으며, 자랄타이가 결국 고려를 항복시킨 것에 대해
"기미년(1259년) 정월, 고려의 계획이 막혀 마침내 몽골에 내부(內附)했다. 고려의 내부에 대하여 자랄타이의 공이 참으로 크다."
라고 호평하고 있다.

여몽전쟁에서는 제5차 침입부터 제9차 침입까지 단골로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의 총사령관으로 사실상 여몽전쟁 후반부를 모두 담당한다. 후술하지만 전쟁이 끝난 다음 귀국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여몽전쟁으로 인생을 불사른(?) 인물이었다.

침입의 일대기를 보면 주로 침입한 후에 전투를 벌이면서 지속적으로 고려 조정에 개경 환도와 왕의 입조를 요구하며, 고려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철수했다가 약속을 안 지키면 다시 침입하는 도돌이표 같은 모습을 보인다. 이는 자랄타이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원래 목적이 고려의 항복이었기 때문이다. 즉, 자랄타이를 전담관으로 임명한 시점에서, 몽골고려의 멸망은 포기하고 고려의 항복 수준에서 전쟁을 마감하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애초에 고려의 강화도를 함락시키려면 대규모의 수군이 필요한데, 몽골군은 여몽전쟁 끝까지 수군을 대규모로 편성하지도 않았으며, 이를 고려에 투입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자랄타이가 주도한 침입이 형식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고려 조정에서 항복한다는 거짓말이라도 직접 말하게 하려면 몇 개 지역을 황폐화하는 것은 기본으로 들어가야 가능하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공격 범위를 확대하는 데 전혀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잦은 침입으로 인해 고려의 본토 지역은 총체적인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2. 침입 일대기

1253년에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임명된 뒤 1254년 7월 22일(9월 5일)[2]에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으며, 8월 22일(10월 5일)에 고려의 대장군인 이장이 사신으로 오자 선물을 받으면서 고려인들이 모두 육지로 나와 몽골식으로 머리를 깎을 것을 요구했다. 이를 거부할 경우에 국왕을 데리고 돌아가는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이 제시한 것을 하나라도 응하지 않는다면 철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9월 10일(10월 22일)에 고려에서 어사 박인기를 사절로 보내자 선물을 받았으며, 14일(10월 26일)에 충주산성을 공격했다가 폭풍과 비가 온 상태에서 성 안의 사람들의 공격을 받자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10월 19일(11월 30일)에 상주산성을 침공했지만 황령사의 승려인 홍지 등의 저항을 받아 반 이상의 사상자가 나오자 철수했으며, 합주의 단계현에 주둔하고 있을 때 11월이 되기 전 고려에서 참지정사인 최린을 파견하여 철군을 요구하자 최항이 왕을 모시고 육지로 나온다면 철수하겠다고 응답했다.

고려 조정에서 몽골군이 제시한 요구 중 어떤 것도 듣지 않자 압록강 남쪽 해안 일대, 경상도 남부, 전라도 등으로 진출했다가 1255년 1월 5일(2월 13일)에 몽케 칸의 명령에 따라 철수했다. 그러나 2월이 되기 전에 개경의 보정문 밖에 진을 쳤으며, 2월 4일(3월 13일)에 아도우(阿豆), 렝푸(仍夫) 등 4명을 사절로 보냈다.

압록강 남쪽 해안 일대에 병력을 집결시킨 후, 8월에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9월 14일(10월 15일)에 영녕공 왕준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경에 도착했으며, 이후 낙동강 연안 일대와 경상도 남부로 진출했다. 1256년 3월에 담양에서 왕준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했으며, 사신으로 왔던 대장군 신집평을 1256년 4월 11일(5월 7일)에 고려 조정으로 돌려보내면서 철군의 조건으로 국왕이 돌아와서 사신을 맞이하고, 왕태자를 대칸에게로 보내는 것을 요구했다.

14일에 고려 조정에서 신집평을 또다시 보내면서 철군한다면 어떠한 요구라도 듣겠다는 답변을 받았으며, 6월에 해양현(광주)의 무등산 꼭대기에 진을 치면서 군사 1,000명을 남쪽으로 보내어 노략질을 하도록 시켰다(《고려사절요》 권17 고종 4). 8월 23일(9월 13일)에 왕준, 홍복원 등과 함께 갑곶강 밖에 이르렀다가 수안현에 진을 쳤으며, 몽골로 간 고려의 김수강이 몽골군을 철수하도록 몽케 칸을 설득하자 9월 23일(10월 12일)에 몽케 칸의 명령으로 철수했다.

1257년 5월에 청천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면서 남하했으며, 6월 29일(8월 10일)에 고려 조정에서 김식을 사절로 보내자 7월 3일(8월 14일)에 사절 18명을 고려 조정에 보냈다. 19일(8월 30일)에 시어사 김식을 고려 조정으로 돌려보내면서 국왕이 오는 것을 회군의 조건으로 내세우면서 함께 왕자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8월이 되기 전에 고려 조정에서 영안공 왕희를 보내자 선물을 받았으며, 왕희에게 태자를 보내면 봉주로 퇴각하겠다면서 고려 조정으로 돌려보냈다. 고려 조정이 김식을 보내 군사가 철수하길 기다리면서 태자를 몽케 칸에게 보낼 것을 얘기하자 이를 받아들이면서 태자와 함께 쑹샨을 보낼 것을 얘기했으며, 휘하 몽골군에게 승천부 갑곶강 바깥과 모든 섬의 백성들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고려 조정에서 몽골군을 전송하면서 그 의향을 떠보기 위해 김식을 보내자 선물을 받았으며, 9월 7일(10월 15일)에 염주로 철수하면서 푸보타이(甫波大)에게 철수하도록 독촉했다. 1258년 4월에 또다시 고려를 침공하면서 4월 30일(6월 3일)에 고려 조정에 파양(波養) 등 9명을 사절로 보내 출륙에 대한 동향을 알아보도록 했다.

6월 17일(7월 19일)에 보후지(波乎只) 등 6명을 고려 조정에 사절로 보내면서 국왕과 태자가 서경에 나와서 항복한다면 철수하겠다고 전하자 고려 조정에서 왕희와 지중추원사 김보정을 보냈다. 8월 6일(9월 5일)에 왕희를 돌려보냈으며, 8월 13일(9월 12일)에 개경에 주둔하여 휘하 기병들에게 여러 곳을 침공하도록 지시했다.

8월 21일(9월 20일)에 몽케다이 등 15명을 고려 조정에 사절로 보냈으며, 10월 4일(10월 31일)에 고려 조정에서 전광재를 보내자 음식 대접을 받으면서 군사를 철수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후 경상도에 진출했다가 고려 군민들의 항쟁으로 경상도에서 물러났으며, 또한 서해도, 경기도, 충청도 등지의 항전에 부딪히면서 남진하지 못하다가 고려에서 일어난 반란 덕분에 점차 몽골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자 강화도 연안 일대의 경기도와 서해도 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1259년 3월, 고려 조정에서 별장 박천식, 박희실, 조문주 등을 보내어 무신정권의 집권자들 때문에 몽케 칸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것과 함께 최의의 참살로 우봉 최씨 무신정권의 타도를 알려 국왕 입조와 출륙환도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를 듣고 박천식을 돌려보내면서 웬양케다(溫陽加大) 등 9명을 사절로 보내 태자의 입국을 4월 초하룻날로 요구했다.

이후 고려군과의 강화가 이루어지면서 몽골로 철수하던 도중, 4월에 갑자기 사망했다.


[1] 타추(tǎchū). 자랄타이의 아들이다.[2] 이하 괄호 안은 모두 양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