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하시중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670000,#fedc8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edc89,#670000> 고려 초기 (918~981) | <colcolor=#373a3c,#ddd> 광평시중 |
김행도 | 박질영 | 류덕영 | 공훤 | 왕철 | 권직 | ||
문벌귀족기 (981~1170) | 문하시중 | |
최승로 | 박양유 | 한언공 | 김승조 | 최숙 | 류윤부 | 위수여 | 유진 | 최사위 | 유방 | 강감찬 | 서눌 | 황주량 | 최제안 | 최충 | 이자연 | 김원충 | 왕총지 | 김원정 | 박성걸 | 최유선 | 이정 | 문정 | 이정공 | 소태보 | 최사추 | 위계정 | 윤관 | 김경용 | 이위 | 김인존 | 이공수 | 김부식 | 김약온 | 임원후 | 왕충 | ||
무신정권 (1170~1270) | 정중부 | 두경승 | 이의민 | 조영인 | 최충헌 | 이항 | 이연수 | 김취려 | 최종준 | 최항 | 김준 | 이장용 | |
원 간섭기 (1270~1356) | 김방경 | |
(도)첨의중찬 · 도첨의시중 · 도첨의정승 | ||
김방경 | 류경 | 송송례 | 원부 | 허공 | 김방경 | 홍자번 | 조인규 | 홍군상 | 홍자번 | 홍규 | 홍자번 | 조인규 | 정가신 | 조인규 | 김혼 | 송분 | 홍자번 | 설공검 | 염승익 | 송분 | 한희유 | 한강 | 한희유 | 송분 | 홍자번 | 한희유 | 채인규 | 한희유 | 안향 | 한희유 | 한희유 | 김혼 | 정인경 | 최유엄 | 김지숙 | 최유엄 | 최유엄 | 이혼 | 류청신 | 홍규 | 류청신 | 권부 | 김이용 | 김이용 | 민지 | 배정 | 김태현 | 윤보 | 최유엄 | 김심 | 민지 | 김이 | 김이 | 윤석 | 정방길 | 윤석 | 김심 | 한악 | 윤석 | 강융 | 권한공 | 조적 | 한악 | 윤석 | 채하중 | 이능간 | 기철 | 채하중 | 한종유 | 왕후 | 김륜 | 김영후 | 김영후 | 인승단 | 노책 | 김영돈 | 왕후 | 노책 | 노책 | 손수경 | 손수경 | 이암 | 이제현 | 손기 | 송서 | 조일신 | 정천기 | 송서 | 조일신 | 이제현 | 조익청 | 홍빈 | 조익청 | 인승단 | 채하중 | 염제신 | 염제신 | 류탁 | 채하중 | 채하중 | 이능간 | 이제현 | 홍언박 | 홍언박 | 윤환 | ||
여말선초 (1356~1392) | 문하시중 · 도첨의정승 · 도첨의시중 | |
홍언박 | 윤환 | 이제현 | 염제신 | 염제신 | 이암 | 홍언박 | 류탁 | 염제신 | 류탁 | 류탁 | 김일봉 | 김일봉 | 경복흥 | 경복흥 | 류탁 | 경복흥 | 김보 | 이춘부 | 이인임 | 이춘부 | 이인임 | 윤환 | 경복흥 | 염제신 | 경복흥 | 이인임 | 윤환 | 이인임 | 홍영통 | 이자송 | 조민수 | 임견미 | 최영 | 이성림 | 임견미 | 이성림 | 이인임 | 이성림 | 반익순 | 반익순 | 이성림 | 최영 | 이성계 | 최영 | 우현보 | 조민수 | 이성계 | 이색 | 이성계 | 이림 | 심덕부 | 이성계 | 정몽주 | 이성계 | 이성계 | 심덕부 | 배극렴 | 이성계 | ||
고려 국왕 · 무신정권 집권자 고구려 (좌우보 · 국상 · 대막리지) · 백제 (좌우보 · 상좌평) 신라 (대보 · 시중 · 상대등) · 발해 대내상 · 태봉 시중 · 고려 문하시중 조선 영의정 ·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 임시정부 부수반 · 대한민국 국무총리 | }}} }}}}}}}}} |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 광평시중 권직 權直 | |
출생 | ? |
사망 | ? |
본관 | ? |
재임기간 | ? ~ 947년 ~ ? |
관직 | 광평시중 |
1. 개요
고려 전기의 광평시중.2. 생애
태조 때 대상(大相)으로서 견서(堅書), 인일(仁壹) 등과 함께 항복해온 나주(羅州) 일대에 파견되어 위무하였다.[1]947년(정종 2)에 정종이 도참설을 따라 서경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하고 장정을 징발하여 궁궐을 건축할 때 당시 시중이었던 권직에게 공사를 맡겼다. 그러나 2년 뒤에 정종이 승하하면서 서경 천도는 백지화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