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12:01:08

박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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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사
博文寺 | はくぶんじ
파일:박문사 본당 공덕비 국립민속박물관 수정.jpg
<colbgcolor=#ff0000><colcolor=#fff> 위치 경기도 경성부 츄구 니시시켄초 산4-5
창건일 1932년 10월 26일
건립 주체 재단법인 이토 히로부미공 기념회
(財団法人伊藤博文公記念会)
종파 조동종(曹洞宗)
역대 주지 스즈키 텐잔(鈴木天山): 1932~1934
우에노 슌에이(上野舜穎): 1935~1944
면적 약 42,000평(138,842m²)

1. 개요2. 건립 과정3. 역사4. 참고 문헌5.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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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서사헌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오늘날 서울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었던 일본 조동종 소속 사찰이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세웠는데, 일본어로는 '히로부미데라'라고 훈독하지 않고 '하쿠분지'라고 음독한다. 본존불은 석가모니였다.

2. 건립 과정

"난리에 뛰어들어 나라를 위해 죽은 자에게 반드시 제사를 지내어 보답하는 것은 귀신을 위안시키고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군사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한 것이다. 갑오년(1894) 이후로 전사한 사졸들에게 미처 제사를 지내주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생각건대, 원한 맺힌 혼령들이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없어 슬프게 통곡하는 소리가 구천에 떠돌지 않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짐의 가슴이 아프다. 제사지내는 일을 원수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전 남소영(前南小營)의 유지(遺址)에 장충단(奬忠壇)을 세웠다. 원수부에서 조칙을 받들어 나랏일을 위해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7년(1900년) 5월 31일#, 10월 27일#
박문사 자리에는 대한제국 시기 전몰 장병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장충단이 있었다. 장충단에는 을미사변 때 사망한 홍계훈, 이경직 등이 모셔졌으며 정기적으로 제향행사가 열렸다. 고종의 명에 따라 제사 업무는 원수부가 담당했다. 그러나 1909년 안중근에게 저격당해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회가 그해 11월에 열린 것을 기점으로 장충단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후 장충단 부지에서는 군사 훈련, 불교의 천도 의식, 백일장 등이 열렸다.

박문사 건립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 사망 20주기인 1929년부터였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던 코다마 히데오(兒玉秀雄)[1]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이 사업은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가 만들어지자 구체화되었다. 건립 목적은 이른바 내선융화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념회의 이사장은 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이 맡도록 했는데, 기념회의 성격은 설립시부터 철저한 관변단체였음을 보여준다. 참여한 인사들 역시 이사장인 정무총감을 비롯해 경무국장, 경성부윤, 학무국장, 재무국장이자 식산은행 이사 등 총독부 관료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았거나 재산이 많은 조선인들도 있었다.

기념회는 사찰 건립과 운영을 위해 일본, 조선, 만주 등지에서 기부금을 걷어 거금 40만 원을 마련했다. 그러나 말이 기부금이었고 사실은 조선 8도에 액수를 할당하여 걷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모은 40만 원 가운데 건축에 25만 원, 제반 비용으로 5만 원,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의 기본 재산으로 10만 원이 사용되었다.

건립 후보지는 삼청동, 사직단, 장충단, 장충단 동편 부지, 옛 통감부 근처 등 다섯 군데였다. 최종적으로는 남산 기슭의 장충단 동편 부지로 결정되었다. 이미 공원화되어 광장을 만들기 용이하고 지형이 완만함이 장점이었다. 박문사는 이후 조선신궁 등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의 기념물로서 남산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정계의 위인으로 조선통치에 커다란 공로를 남긴 고 이등박문공의 공덕을 불도의 고원한 표시로서 영원히 염하려는 춘묘산 박문사의 낙성과 입불식은 박문공의 24주기의 청명한 가을날인 26일에 성령이 깊이 잠든듯한 남산 밑 장충단 성지에서 삼엄히 거행하였다. 위대한 업적을 기념하고 고인의 명복을, 불멸의 족적을 엿보기에 너무도 찬연하고 청정하고 엄숙하였다.
春畝山博文寺의 入佛式壯嚴盛大, 『매일신보』, 1932.10.27.#
사찰 이름은 춘묘산박문사(春畝山博文寺)[2][3]로 정했다. 사찰의 종파는 조동종이었다.

완공 6개월 전인 1932년 4월 열린 상량식에는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참석했다. 낙성식은 이토 히로부미의 기일에 맞춰 그해 10월 26일에 열렸으나, 그때까지도 아직 본존불상이 없었다. 당시 일본의 저명한 불모(불상 제작자)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이 제작한 목조 석가여래 좌상을 이듬해(1933) 9월 17일 박문사 본당에 봉안하고 개안식을 거행하였는데, 이 자리에는 불모 다카무라 고운,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 清徳) 조선총독부 정무총감[4], 그리고 척무대신(拓務大臣)이자 박문사를 건립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장본인인 코다마 히데오(児玉 秀雄) 백작 등이 참석하였다. 석가여래상은 뒤쪽에 화려한 광배를 두고 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여원인을 취하는 흔한 형태였다.
파일:박문사 본당 내부 1931년 국립민속박물관 수정.jpg
박문사 본당 내부

조선의 왕실 건축물을 가져다 쓴 것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경희궁 흥화문을 가져다가 이름을 경춘문(慶春門)으로 바꾸고 정문으로 사용했다. 경복궁 선원전도 이곳으로 옮겨와 승려의 거주공간인 고리(庫裏: 요사채)로 사용했다. 원구단 석고전은 박문사의 종루가 되었다. 박문사 본당은 조선과 일본은 하나라는 내선 융화의 목적으로 일본 선종 양식과 조선 양식이 뒤섞여 있었다. 본당은 철근 콘크리트로 된 2층 건물이었다. 박문사 사진들은 여기를 참고.

3. 역사

박문사에서는 매년 이토 히로부미 기일인 10월 26일에 법회가 열렸다. 조선총독부는 이토 히로부미의 30주기인 1939년 법회가 가까워오자 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아들 중의 한 사람은 30년 전 10월 어느 날 하얼빈 역두에서 흉탄을 맞고 쓰러진 고 이토 히로부미 공의 아들 분키치씨요, 또 한 사람은 흉탄을 쏜 범인 고 안중근의 아들 준생 군으로 3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우연히도 이 두 아들은 감개무량한 중에 극적회견을 한 것이다...
안준생: 어제도 박문사에 참배하고 고인의 영전에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속죄하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더니 오늘은 훨씬 마음이 가볍습니다.
이토 분키치: 3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잘잘못을 가리면 무엇하겠나? 두분은 이미 저승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들을 공양하며 서로 협력하여 국가를 위해서 노력이나 바치지... 하여간 이번 이렇게 만난 것은 모두가 신령님의 지시이니 이번 기회에 군은 일본의 역사를 이해하고 일본인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함으로 성공할 것을 바라마지 않네.
그 아버지들에 이 아들들이 있다, - 劇的對面, 如兄若弟 吳越三十年 氷釋! 昨日 朝鮮호텔 一隅의 明朗景, 『매일신보』, 1939.10.17.#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상하이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꾸린 ‘만선시찰단’에 끼어 1939년 10월 1일에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10월 15일에 박문사를 찾아 아버지 안중근의 위패를 모시고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빌었다. 여기에 총독부 외사부장과 통역관이 동행한 점에서, 안준생의 박문사 방문에는 안중근의 의거로 촉발된 민족 의식을 희석시키고 조선인을 일본의 충직한 신민으로 동화시키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준생은 이튿날인 16일에 조선에 와 있던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伊藤文吉)를 만났고, 17일에는 둘이 함께 박문사를 찾았다. 신문지상에서 안준생과 이토 분키치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고 포장되었으나 실은 총독부가 기획한 선전이었다.
일한합병의 30주년을 맞이하여 메이지(明治)의 원훈 이토 히로부미공을 비롯하여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씨들과 반도의 지사 이용구, 송병준, 김옥균, 박영효, 이완용 제씨를 일한합병의 공로자로 그들의 영을 위로하는 추도식은 흑룡회 주최로 11일 오후 3시부터 박문사에서 엄숙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가츠오(勝尾) 보도부장, 윤덕영 자작, 한상룡, 정광조, 최린, 이광수 제씨 그리고 이용구씨의 미망인 이화사 여사와 영식 석규, 현규 양씨들 1백여 명의 인사가 모여 식장 안은 고인들을 추도하는 애수에 잠긴 가운데 순서에 따라 식이 엄숙히 진행되었고... 오후 4시 가까이 식을 마쳤다.
併合功勞者들에 感謝와 慰靈의 祭 博文寺서 嚴肅히 執行, 『매일신보』, 1939.11.12.#
같은 해 11월에는 조선합병 공로자 합동 위령제를 지냈다. 이때의 위령 면면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중일전쟁 등으로 사망한 군인들에 대한 추도 행사도 꾸준히 열렸다. 1939년 8월에는 장고봉 사건으로 사망한 군인들을 위한 위령제가 있었다. 1938년 이완용의 형 이윤용, 1939년 박영효의 장례식도 여기에서 거행되었다. 1940년에는 박문사 건립을 주도한 이마이다 키요노리(今井田清徳) 정무총감의 추도식이 열렸다. 종교행사보다는 유력 인사 또는 군인의 추도식 장소로 주로 이용된 셈이다.
오전 9시 1주일 전 타계한 이윤용의 성대한 불교식 장례식이 거행되는 박문사(博文寺)로 갔다. 나에게는 무의미하기만 하던 불교 주문, 향 피우기, 불경 암송 따위가, 듣고 있자니 마음속에서 결코 끝나지 않을 질문이 생겨나게 한다. "어떻게 이 무지한 중들이 자신들이 행사하는 거창한 장례식이 죽은자에게 이렇게든 저렇게든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안단 말인가?"
윤치호 일기》 1938.9.12.#

박문사 완공 후 조선인은 물론 조선 내 거주 일본인들도 별로 관심이 없자 총독부는 조선을 방문하는 일본 고위 인사들이나 일본 학생의 조선 수학여행 코스에 박문사를 포함시켜 관광을 활성화했다.

해방 직후 미군이 들어오기 전 혜화전문학교의 학생들이 박문사를 기숙사로 활용한 적이 있다. 미군은 박문사를 접수하고 막사 등 군 시설을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미 군정청 법무국이 박문사를 종교시설로 여기고 보존하기로 결정하여 군 시설 건설안은 철회되었다. 이후 불교계 측이 이 일대를 사용하게 되어 박문사 부지에는 다시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의 기숙사가 들어섰다. 미 군정청은 최종적으로 박문사의 문제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위임했다. 여기에서 김법린은 박문사가 있는 장충단 일대를 사원 대신에 선열을 추도하는 기념공원으로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 결과 박문사 역시 적산에서 분리되어 서울시로 편입되었다.
시내 세 군데에 화재ㅡ23일 오전 두 시 쯤 군정청 구내에 있는 원총력연맹과 이등박문의 망령을 둔 박문사(博文寺)에서 불이 일어나서 전소되고 다시 경성역 뒤에 있는 『마루보시』 창고 3동이 전소되었는데 김구 선생이 환국하시는날 공교롭게도 일본 제국주의의 주구기관 세 군데서 불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흥미를 끌고 있다.
市內三處에 大火, 『조선일보』, 1945.11.25.#
한편,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박문사가 전소되었다는 기사가 있으나, 불탄 것은 경복궁 선원전을 옮겨다 지은 고리 건물이었고 정문과 본당 등은 살아남았던 듯하다. 1957년 촬영된 사진에서 고리가 있던 공간은 비어 있으나 다른 건물은 피해가 없는 것이 확인된다.장충단 항공사진이승만 시찰 사진
파일:bms01.jpg 파일:bms03.jpg
박문사 도면(1932년) 서울신라호텔 주변 지도(2023년)

이승만 정권은 박문사 자리에 영빈관을 신축하려 하였으나 4.19 혁명5.16 군사정변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67년 영빈관이 완공되었지만 해당 부지는 1973년 삼성그룹에 넘어가 현재의 서울신라호텔이 되었다.

4. 참고 문헌

  • 조선총독부(1932), 춘무산박문사창립원에관한건-경기(도면첨부),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04799
  • 안종철(2009), 식민지 후기 박문사(博文寺)의 건립, 활용과 해방 후 처리, 동국사학 제46호
  • 水野直樹(2011), 「博文寺の和解劇」と後日談 : 伊藤博文,安重根の息子たちの「和解劇」・覚え書き, 人文學報 第101号
  • 비온티노 유리안(2016), 日帝下 서울 南山 地域의 日本 神道 · 佛敎 施設 運營과 儀禮 硏究,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 윤기엽(2016), 장충단⋅박문사의 史的 변천과 그 의미­ -일제강점기 장충단의 공원화와 박문사 건립을 중심으로-, 한국사상과 문화 제85호

5. 같이보기


[1] 4대 대만 총독인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의 장남이자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사위이다. 이토를 따라 조선에 들어와 통감부 서기관으로 일했던 이토의 측근이었다. 타이베이에 고다마 겐타로의 명복을 비는 임제호국선사(臨済護国禅寺)가 있는 데서 박문사를 세울 발상을 얻었다고 스스로 밝혔다.[2] 춘묘는 이토 히로부미의 아호이고 박문은 그의 이름. 동아시아의 사찰명에는 사호(寺號) 말고도 흔히 산호(山號)가 앞에 붙는다. 이는 선종불교의 영향으로 티베트 불교나 상좌부 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명명방식이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도 흔히 '△△산 ◯◯사' 형식으로, 절이 있는 산 이름과 절 이름을 현판에 쓴다. '춘묘산 박문사' 역시 억지로 산호를 만들어 이 형식에 맞춘 것이다.[3] 한자 를 '무'라고 읽기도 하나, 이 문서에서는 당시 신문에서 '묘'라고 읽은 것을 따랐다.[4] 이 사람은 약초사 건립에도 관여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