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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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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ff0000,#ff0000>생애<colbgcolor=#fff,#1f2023>생애
가족 현손자 마쓰모토 다케아키
사건사고 보신 전쟁 · 메이지 유신 · 청일전쟁 (시모노세키 조약) · 러일전쟁 · 을사조약 · 경술국치 ·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관련 정치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 이노우에 가오루
기타 입헌정우회 · 조슈 번 · 박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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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기2. 신정부 수립 이후3. 1차 이토 내각4. 구로다 내각의 붕괴와 원로로의 취임5. 초대 귀족원 의장 취임6. 오쓰 사건 수습7. 2차 이토 내각8. 3차 이토 내각9. 4차 이토 내각10. 러일전쟁 개전과 한국 통감 부임11. 암살 시도12. 한국 통치의 시작13. 통감 정치의 실패14. 대한제국 병합에 찬성15. 죽음16. 장례

1. 유년기

어릴 적 이름은 리스케(利助)였지만 천한 이름이라는 이유로 도시스케(利助), 슌스케(春輔)를 거쳐 히로부미(博文)로 이름을 바꿨다.

1841년 10월 16일, 하야시(林) 가문에서 출생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적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林利助)였다. 그의 아버지 하야시 주조(林 十藏)는 소작농 출신이었지만, 추겐 미즈이 다케베(水井 武兵衛)에게 근면함을 인정받아 그의 양자가 되면서 추겐 신분을 얻었다.[1] 이어 미즈이 다케베가 이토 야에몬(伊藤弥右衛門)의 양자가 되면서 아시가루가 되었고, 두 부자도 성을 '이토'로 바꾸고 하급 무사 아시가루 신분을 얻었다.

1857년, 16세 때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송하촌숙)을 찾아가 배웠다. 15세때부터 조슈번의 말단 공무원으로 에도만 경비직으로 파견갔는데, 윗 상관인 쿠루하라 료조가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을 추천하면서 거기 가보라고 해서 찾아갔다. 신분이 낮아서 교실 밖에 서서 수업을 들었다고도 한다. 쿠루하라 료죠, 카츠라 코고로[2]의 종자(하인) 일을 하면서 공부했다.

쇼인의 제자들은 후에 메이지 유신을 위해 크게 활동하고 근대 일본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기도 다카요시이노우에 가오루, 노기 마레스케를 제외한 조슈계 인사는 쇼인의 제자였다. 쇼인 문하의 천재로 불렸던 타카스기 신사쿠, 부정 선거의 달인 시나가와 야지로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있다. 요시다 쇼인은 이토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본인도 쇼인에게 큰 영향을 받지 않은 듯하다. 실제 요시다 쇼인은 이토를 가리켜
"능력은 없는데 성격이 좋아서 주선자 역할은 잘 해낼 것."

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타카스기 신사쿠이노우에 가오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이노우에 가오루와는 나이 차이도 있고, 계급 차이도 있었지만 절친한 평생의 동지였다.

이토가 몸담은 조슈 번은 막말기에 존황양이를 주도한 세력이었다. 에도 막부가 덴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 가장 격렬하게 막부에 반대하던 지역이었고, 존왕양이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막부의 정치가였던 이이 나오스케안세이의 대옥사를 일으켜 요시다 쇼인을 처형했다. 탄압받을수록 조슈 번은 외국인에 대한 테러와 막부 인사에 대한 테러를 더 자행했다. 이토는 그 일원이었다. 19세 때인 1862년, 다카스키 신사쿠, 이노우에 가오루 일당이 주도해서 일어난 영국 공사관[3] 방화 사건에서 불을 붙인 적도 있고, 이듬해 2월 천황의 퇴임을 외친 국학자를 암살하기도 했다.

조슈 번은 서양을 몰아내기 위해선 서양의 기술을 배워야한다면서 이토를 포함한 5명을 영국에 유학보냈다(조슈 파이브). 이토는 영국으로 가는 길에 들린 상하이에서 아편전쟁 이후의 중국의 실태를 실감하고, 영국에서는 칼리지 오브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영어화학을 공부했다. 이 때 배워놓은 영어 실력은 그가 크게 출세하게 되는 배경로 남는다. 그는 건축물, 공장, 증기기관를 견학하면서 압도적 국력 차이를 체감하고 쇄국에서 개항으로 돌아선다. 붙임성이 좋은 이토는 영국에서 외교관인 어네스트 사토(Ernest Satow)와 인연을 맺는다.
파일:external/0d4e8b2f3608aca454561d0453403de3f3d12735ca858a0eb4275720f2990dfb.jpg
조슈 파이브 (오른쪽 맨 뒤가 이토)

그러나 이들이 요코하마 항구를 출발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조슈 번이 영국 함선에 포격을 가하여 시모노세키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에서 이 소식을 알게 되고 영국 생활 6개월 만에 귀국을 결심, 전쟁을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전쟁은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귀국한 뒤에는 조슈 번에서 일하며 조슈번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벌인 시모노세키 전쟁의 영국과의 중재 회의에 통역으로 참여했다. 이때 수완을 발휘해서 조슈가 부담해야할 전쟁배상금을 막부 쪽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막부(幕府)와 조슈번 사이에 내전(幕長戰爭 제1차 조슈 정벌)이 터진 뒤 막부와의 타협을 생각하던 보수파를 몰아내는 데 참여하여,(타카스기 신사쿠의 시모노세키 거병) 이후 조슈번을 주도하게 된 소장파의 일원이 된다. 이 때 이토는 타카스기의 거병에 가장 먼저 참여해 일생의 자랑거리로 삼았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가장 나중에야 거병에 참여했는데, 이토는 평생 이 일을 들먹이며 야마가타의 기를 죽였다.

2. 신정부 수립 이후

조슈 번은 도막파의 일원으로 사츠마 번과 동맹을 맺고,(삿초 동맹) 막부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면서 승승장구했고, 입지가 좁아진 막부는 대정봉환으로 그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곧이어 일어난 보신 전쟁으로 도막파가 구 막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도막파가 정국을 주도했고, 조슈 번 소속의 이토도 신정부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이토는 1870년 경제제도, 화폐제도를 조사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했고, 이듬해(1871) 그는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파견된 이와쿠라 사절단의 멤버로 발탁되어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 러시아 등을 견학했다. 이토는 사절단 파견 중 정부의 실세였던 오쿠보 도시미치와 친분을 쌓아 그의 신임을 얻었다. 이토는 오쿠보 밑에서 일하면서 도사, 히젠(사가), 사쓰마 사이에 벌어진 정한 논쟁 등의 여러 정쟁에서 파벌을 중재하면서 수완을 발휘했다. 후에 이토는 사이고 다카모리메이지 6년 정변세이난 전쟁, 기도 다카요시의 병사, 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 등으로 정권 실세가 잇따라 사라지는 공백에서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wakura_mission.jpg
이와쿠라 사절단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토)

이토는 일본이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헌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헌법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1882년 영국독일에 유학했다. 그는 18개월 유학하고 돌아와서 헌법을 작성하고 내각제를 조직하여 그가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01.jpg

그 후 초대 추밀원 의장, 의회 창설과 함께 초대 귀족원 의장에 취임하는 등 정상가도를 달렸다. 이어 메이지 덴노의 신임을 얻어 원로의 지위를 얻으면서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함께 원로 정치를 주도했다.

3. 1차 이토 내각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각성 관제를 제정하고 관료를 육성하기 위해 제국대학을 설립하고 헌법과 황실 전범의 초안을 완성했으나, 추밀원이 신설되자 의장에 취임하기 위한 목적으로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내각 제도를 정비하기 전, 외교 문제를 직접 풀려고 했다. 당시 최대 현안은 조선의 개화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에 대한 대책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히로부미에게 조선의 개화파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히로부미는 평소부터 후쿠자와의 사상이 과격하다는 이유로 그를 경계하고 있었고, 청국과 대결하기를 원치 않았다. 히로부미는 후쿠자와의 부탁을 거절하였다. 히로부미는 자원하여 톈진조약의 체결을 주도하였다.

1885년 12월 22일, 이토는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였다. 이 시기 이토 총리는 각종 개혁 정책을 주도하였으나 정권의 위험요소 두 가지를 안고 있었다. 첫 번째는 로쿠메이칸 외교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었고, 두 번째는 히로부미가 각종 요직을 겸직하는 것에 대한 번벌 사이의 반감이었다.

당시 이토 총리는 업무만 끝나면 로쿠메이칸으로 달려가 음주가무를 즐기고 파티에 참석한 여성들을 범하고 있었는데, 로쿠메이칸 외교의 본래 목적이었던 불평등 조약 개정에는 진척이 별로 없었다. 이로 인해 자유민권운동가의 반정부 운동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에 이토는 정부 밖에서 자유민권운동의 지도자 중 하나인 오쿠마 시게노부를 외무대신으로 임명하여 자유민권운동 세력의 한 축을 와해시키는 한편, 오쿠마에게 조약 개정의 전권을 맡김으로써 고비를 넘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토가 헌법 제정, 황실 전범 제정 과정에서 덴노 교육을 목적으로 궁내 대신까지 겸직하자 번벌들의 불만이 높았다. 이토의 독주에 사쓰마번 출신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제기되자, 이토 총리는 정부 내외로부터의 비판 여론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총리직을 사임, 초대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하여 헌법 제정에 전념하게 된다.

4. 구로다 내각의 붕괴와 원로로의 취임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내각총리대신에서 물러난 후, 구로다 기요타카는 제2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과 함께 불평등 조약 개정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현행법에 따르면 외국인은 재판관이 될 수 없었으므로 외국인 재판관 임용은 위헌이었다.
둘째, 오쿠마가 외국인 판사의 등용을 조건으로 열강들과 협상을 진행하려 했음에도, 정작 초강대국인 영국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셋째, 일본인들은 외국 공사에게 재판을 받든 외국인 판사에게 재판을 받든, 외국인이 일본인 법관에게 재판을 받지 않는 것을 그 자체로 굴욕으로 생각하고 오쿠마의 움직임에 반발했다.

오쿠마는 위의 문제에 대한 대책을 내놓았다. 먼저, 외국인은 판사가 될 수 없다는 법률을 피해가기 위해, 일본에 부임하는 외국인 재판관을 일본인으로 귀화시키는 법을 제정하려 했다. 그리고 영국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기 위해, 외국인 판사 임용을 조건으로 미국, 독일과 개정통상항해조약을 체결했다. 미국, 독일 등이 움직인다면 영국도 자극을 받아 움직일 것이라는 나름의 계산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 여론에 대한 대책은 딱히 없었고, 영국은 여전히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오쿠마는 영국과 체결했던 이전의 조약들을 파기하겠다는 식으로 강하게 나가서 영국을 귀찮게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영국이 짜증이 나서라도 협상 테이블로 나오지 않겠느냐는 것이 오쿠마의 계산이었다. 이에 히로부미는 오쿠마의 전술이 과격할 뿐만 아니라, 실패할 경우 일본의 대외 이미지가 실추되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라며 반발했다.

히로부미는 오쿠마 외무대신과 구로다 내각총리대신을 설득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몹시 화가 난 히로부미는 구로다 내각에서 일하던 친구들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히로부미는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 농상무대신에게 사직서를 제출한 후 내각에 출근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내무대신, 사이고 주도 해군대신, 야마다 아키요시 사법대신, 오야마 이와오 육군대신 등에게는 구로다 총리의 조약개정에 반대 의견을 내놓으라고 선동을 일삼았다. 이로써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모든 대신들이 히로부미의 지령을 받고 파업을 벌이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로 인해 국민들의 여론도 한층 나빠졌다. 마침내 조약개정에 반대하던 극우단체 회원이 오쿠마 외무대신에게 폭탄 테러를 가했다. 오쿠마 외무대신은 다리 하나를 절단당하는 중상을 입었다. 히로부미의 모략과 폭탄 테러로 인해 구로다 내각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구로다 총리 한 사람 외에는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통치 권능을 상실한 구로다 총리는 사직서를 제출했고, 산조 사네토미가 총리의 권한을 대행하는 내각이 들어서게 되었다. 오쿠마가 기존에 추진했던 독일, 미국과의 조약은 끝내 비준되지 않았다. 이 일로 히로부미와 구로다의 사이는 매우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메이지 덴노는 히로부미와 구로다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이들에게 "원훈(시간이 지나면서 "원로"라는 칭호로 바뀜)"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원로는 덴노의 상담에 응하는 베테랑 정치인들로서, 차기 내각 총리대신의 지명, 덴노의 대권 행사에 깊이 관여하는 임무를 맡았다.

5. 초대 귀족원 의장 취임

히로부미가 구로다 내각을 터뜨리고 원로 칭호를 받은 이후, 구로다 기요타카, 그와 친분이 있던 사쓰마번 출신들은 히로부미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품게 되었다. 히로부미는 헌법 제정 후 첫 번째 국회가 소집될 때 자신이 내각총리대신을 맡아 일본을 통치하려는 욕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구로다와 그의 친구들이 히로부미는 절대로 안 된다며 비토를 놓았기 때문에,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제3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히로부미는 메이지 덴노의 배려를 받아 초대 귀족원 의장이 되었다.

제1대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민당은 민력휴양을 앞세우며 증세에 반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산안 통과에 지장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야마가타 총리는 당초 중의원을 해산하고 국회를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이토가 야마가타의 구상에 반대하자, 야마가타는 중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비롯한 도사 출신들이 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로써 일본의 제1회 의회는 중의원 해산 없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편 야마가타는 중의원을 상대하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야마가타는 자신의 후임으로 이토를 지명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구로다와 그 친구들이 히로부미는 물러가라고 반발했기 때문에, 차기 총리는 사쓰마번 출신의 마쓰카타 마사요시로 정해졌다.

6. 오쓰 사건 수습

제1회 의회가 무사히 폐회한 후 히로부미는 별장과 술집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신병을 앓던 쓰다 산조가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태자(후의 니콜라이 2세)에게 칼을 휘둘러 상해를 입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히로부미는 급하게 도쿄로 출발했다.

히로부미는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러시아에 사죄를 하고, 쓰다 산조를 사형시켜 러시아에 성의를 보이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했다. 히로부미는 전국의 학교에 니콜라이 황태자에 대한 정성이 담긴 편지를 쓸 것을 지시했다. 신사에는 황태자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하라는 주문도 빼놓지 않았다.

문제는 쓰다 산조를 처형하는 것을 두고 벌어졌다. 당시 일본 국내법에 따르면 황족에 대한 살인 미수에는 사형 적용이 가능했지만 외국인 황족에 대한 규정은 따로 없었다. 따라서 쓰다 산조는 일반인에 대한 살인 미수로 재판을 받아야 했고, 그에 대한 최고형은 무기징역이었다. 히로부미는 판사들에게 법리에 구애받지 말고 쓰다에게 무조건 사형을 언도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판사들은 히로부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쓰다를 사형시킬 경우 일본의 법치 능력이 의심받고, 일본 국민이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히로부미는 전가의 보도 중 하나인 계엄령 발동을 운운하며 판사들을 협박했다. 판사들이 히로부미의 명령에 불복하자, 마쓰카타 내각 안에서도 쓰다의 사형 문제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사형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쓰다를 납치해서 권총으로 쏴죽이고 러시아에 사죄를 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마쓰카타 내각이 좌충우돌을 거듭하자 주일 러시아 공사는 아오키 슈조 외무대신에게 쓰다를 처형하라고 압박을 가해왔다. 이에 대해 아오키 외무대신은 "나는 히로부미의 지시를 받아 사형 판결을 약속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쓰다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을 때 외무대신이 그 책임을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인 히로부미에게 덮어씌우려 하는 등 소란이 벌어졌다. 그사이 쓰다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히로부미의 예상과 달리 러시아는 반발하지 않았고 사건은 잘 수습되었다. 일본의 관민 모두가 러시아에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한 덕분이었다. 히로부미는 오쓰 사건에 대한 후속 조치로 아오키 슈조 외무대신을 전격 경질했다. 히로부미는 아오키 외무대신이 러시아 공사에게 "사형이 선고되지 않을 경우 히로부미에게 따지라"는 식으로 실언한 것을 알고는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다. 히로부미는 이를 자신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고, 아오키 외무대신을 독일 공사로 내쫓아버린 후 정치생명을 끊어버렸다.

히로부미의 보복성 조치로 인해 외무대신이 잘려나가면서 마쓰카타 내각의 불평등 조약 개정 협상은 난항을 빚게 되었다. 마쓰카타 총리는 정권 운영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7. 2차 이토 내각

1892년 8월 8일~1896년 9월 18일.
청일전쟁을 지휘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매듭지었으며 이 기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오쓰 사건과 만용 연설로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이 만신창이가 되자,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정권 연장을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하였다. 이토는 부정선거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러자 시나가와 야지로 내무대신은 이토를 예계령으로 응징하겠다고 협박했다.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민당이 승리하자, 정권 유지가 어려워진 마쓰카타는 사임했고, 그 후임으로 이토가 취임했다. 이토가 부정선거에 반대하던 모습이 의원들에게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사쓰마번 출신 중 그를 증오하던 인사들도 중의원을 상대하는 데는 그보다 좋은 인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번벌 타도를 주장하는 중의원은 이토에게 큰 부담이었다. 이에 이토는 원로들을 내각에 대거 끌어들이고 그들의 조직력과 자금력을 총동원하여 중의원을 제압하려 했다. 제2차 이토 내각의 당면 목표는 임박한 청일전쟁의 원활한 수행이었다.

이토 내각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적극적인 예산을 편성하려 했다. 그러나 중의원에서는 민력휴양을 앞세워 이토 내각의 예산안을 삭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중의원은 이토 총리를 성토하는 상주안을 메이지 덴노에게 제출하였다.

이토를 신임하던 메이지 덴노는 내정비를 절약함으로써 30만 엔을 확보하고, 관리 봉급의 1할을 전함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쪽으로 타협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토와 중의원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이토는 첫 번째 위기를 넘겼다.

한편 이토는 무쓰 무네미쓰 외무 대신과 함께 영국과 협상하여 치외법권 철폐, 주요 수입품목에 대한 관세 인상을 골자로 하는 불평등 조약 개정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중의원의 오쿠마 시게노부를 중심으로 한 개진당 세력과, 이토와 반목하던 시나가와가 이끄는 대일본협회 등이 조약 개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치외법권만 철폐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일본이 진정한 주권국가가 되려면 "관세자주권까지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만약 영국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기존 조약을 파기해서라도" 영국을 짜증나게 하면 된다는 강경 일변도의 주장을 펴고 있었다.

이토는 대외강경파의 주장이 영국을 분노하게 할 뿐이며, 그나마 얻을 수 있는 눈앞의 성과마저 물거품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토는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당 세력과 연대하였으나, 중의원의 반대를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외강경파가 다시 메이지 덴노에게 이토를 비판하는 상주문을 올리자, 화가 난 이토는 중의원을 해산해버렸다. 그러나 그 다음 선거에서도 이토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의원이 다수 당선되고 의원들을 관직으로 매수하기 위한 정치공작이 무위로 돌아가자, 다시 중의원을 해산해버렸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선거를 반복하겠다고 의회를 무시하자 정치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이토에게 호재가 닥쳤다.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토는 청일전쟁에 반대하면서 이홍장과 접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토는 이홍장으로부터 "조선은 청의 속방이며 일본은 간섭하지 말라"는 대꾸를 받았고, 이토의 대청외교가 연약하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최종적으로 전쟁에 동의하게 되었다.

메이지 덴노는 이토에게 대본영 회의에 참석하여 전쟁을 지휘하라고 지시하였다. 문관 신분으로 대본영 회의에 참석한 인물은 이토 총리 하나뿐이었다. 문관이 군대를 통제하는 것은 파격적인 조치였지만, 군 장성들도 그의 위세 앞에서 이견을 달지 않았다.

이토는 삼국간섭을미사변으로 인해 스타일을 구겼으나, 러시아와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을 체결하여 대외리스크도 어느 정도 불식시켰다.

하지만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이토의 인생은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은 이토의 장기집권을 돕는 역할을 했지만, 한편으로 일본군 인사들의 권력을 비대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토가 일본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또한 그의 친구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그의 지령을 받으며 정치를 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야마가타는 이토가 원활한 통치를 위해 자유민권운동가를 내각에 끌어들이는 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야마가타는 원래부터 메이지유신 지사로 구성된 원훈회의가 독재하는 초연 정치를 꿈꾸며 정당을 무시해왔으며, 정당 출신들이 내각으로 진출하면 자신이 육성한 파벌들의 밥그릇이 깨진다는 점을 걱정했다. 그는 슬슬 일본 육군과 자신의 파벌들을 동원하여 이토에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토와 야마가타는 표면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제2차 이토 내각은 국채 모집에 실패하면서 무너질 조짐을 보였다. 마쓰카타가 해고당한 후 와타나베 구니타케가 대장대신으로 취임했으나, 그는 능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국채 모집에 실패했다. 마쓰카타오쿠마 시게노부와 손을 잡고 이토 내각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토는 정적인 오쿠마 시게노부와 마쓰카타 마사요시 중 한 명을 입각시켜 국채 모집을 해보려 했으나, 그들 모두로부터 거절당한다. 마침 이토는 스트레스 때문에 위장병이 생겨서 더 이상 총리직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토는 사임했고, 제2차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이 성립했다.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에 입각한 각료 중 이토의 친구 또는 후계자는 하나도 없었다. 굴욕을 맛본 이토는 해외여행을 떠난다.

8. 3차 이토 내각

1898년 1월 12일 ~ 1898년 6월 30일.
중의원을 해산하고 국무회의에서 신당 결성을 주장하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봉착하여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제2차 마쓰카타 내각은 오쿠마 시게노부와 연대하여 금본위제를 정착시키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지조 증징 문제를 둘러싸고 마쓰카타 총리와 오쿠마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내각은 제1차 마쓰카타 내각처럼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침 러시아가 한반도 진출을 모색하면서 대외적인 리스크까지 가중되자 마쓰카타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번벌들은 한편으로 중의원들을 설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와 협상까지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은 이토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토에게 내각을 조각하라는 명이 하달되었고 제3차 이토 내각이 성립되었다.

먼저 이토는 대외 중립을 선포하고 러시아와 협상을 진행, 러시아와 니시-로젠 협정을 체결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한반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또한 타이완의 안전 보장을 위해 청나라와 협상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청나라는 대만과 인접한 복건성을 어느 나라에게도 할양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외교와 달리 내정은 엉망이었다. 이토는 자유당과 연대하여 지조 증징을 해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들은 증세안 통과를 대가로 "대신 자리를 비롯한 관직"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이토는 중의원들이 삼국간섭을 굴욕이라고 외치면서도 증세안에는 반대하고, 증세안 통과를 미끼로 뇌물을 요구하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토는 의원들의 마음이 민생을 돌보는 데 있지 않고, 지조 증징 반대 투쟁을 더욱 열심히 해서 자신으로부터 뇌물을 얻어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분노한 이토는 국회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토는 증세안을 제출함과 동시에, 중의원에서 싫어할 만한 선거법 개정안을 제출하려 했다. 이 선거법 개정안은 유권자 확대는 물론, 농촌 출신 의원의 숫자를 축소시키고 도시의 지역구 숫자를 늘리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의회의 다수를 차지한 지주층을 약화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이토의 화풀이성 법안 제출에 대해 소네 아라스케, 이토 미요지, 사이온지 긴모치, 이노우에 가오루 등을 비롯한 각료들은 이토 총리에게 재고를 요청했다. 이토는 이에 대한 반발로서 선거법 개정안과 지조증징안을 손수 만들어 중의원에 제출했다.

이토의 막나가는 행보에 중의원은 그를 비웃었고, 번벌과 귀족원 의원들은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이토의 선거법 개정안이 보통선거 실시와 다름없다고 걱정했다. 이토는 중의원과 귀족원 모두로부터 협조를 받지 못하자 폭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토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헌법을 일시 중단시켜서라도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헌법 중단이란 이토의 전가의 보도였던 중의원 해산과 계엄령 발동을 의미했다. 이토는 "차라리 중의원에 정권을 맡겨보겠다, 도저히 못해먹겠다"는 자포자기성 막말을 퍼부었다.

이토는 의회의 반발이 예상외로 심하자 지가 수정 법안도 같이 제출했다. 지가가 과도할 정도로 높게 측정된 지역의 지가는 깎고 지가가 과소평가된 지역의 지가는 인상하면, 지가가 인하된 지역의 의원들은 지조증징안에 동의를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이토의 상상 이상으로 굴욕적이었다. 이토의 지조 증징안은 중의원에서 찬성 27표, 반대 247표라는 압도적 스코어로 부결되고 말았다. 당황한 이토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귀가했다.

이토가 중의원을 터뜨린 직후,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자유당과 오쿠마 시게노부의 진보당은 합당을 추진하여 이토 내각을 타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토는 이타가키와 오쿠마의 사이가 나빠서 합당에 이르지 못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이토의 예상과 달리 이들은 합당에 성공하여 헌정당을 창당하고 정당내각을 수립하려 했다.

이토는 헌정 중단에까지는 이르고 싶지 않았는지 그들의 제안을 일소에 부쳤다. 이토 총리는 일전에 막말을 할 때 내뱉었던 바를 실천에 옮겼다. 이토 총리는 중의원의 정당에게 정권을 넘겨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자신의 후임을 오쿠마 시게노부와 이타가키 다이스케 중 한 명으로 하라고 메이지 덴노에게 상주했다. 야마가타는 이토의 상주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이토 총리가 화를 심하게 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이토 총리는 사직서를 제출한 후 해외여행을 떠났다.

9. 4차 이토 내각

1900년 10월 19일~1901년 6월 2일. 이전까지 무소속 총리였지만, 이때는 입헌정우회를 창립하고 초대 총재로서 총리직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이 일어나면서 사임하였다.

제3차 이토 내각이 중의원들에 의해 붕괴한 후, 이토는 자신이 직접 중의원을 장악해 정당 이기주의와 뇌물의 악습을 바로잡고 일본을 발전시키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이토는 자신과 친분이 있던 헌정당[4] 인사들을 흡수하여 입헌정우회라는 신당을 창당하고 스스로 총재 자리에 올랐다. 입헌정우회는 중의원의 과반을 장악한 제1당이었다. 이토는 입헌정우회의 목표가 영국식 당파정부 건설에 있으며, 자신의 신당이 열강의 국제규범을 익히고 정당이기주의에 빠지지 않는 모범 정당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입헌정우회는 이토가 중의원을 장악하여 전성기 시절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는 입헌정우회 창당을 위해 메이지 덴노로부터 정치자금까지 받았다. 입헌정우회는 메이지 신정부의 어용정당 성격으로 출범한다. 즉 시작부터 의원내각제라는 이상을 주장한 것과는 아주 거리가 있던 셈.

한편 총리직을 수행하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토가 자유민권운동 세력과 손을 잡고 권력을 되찾으려는 것을 경계했다. 야마가타는 지조 증징 등에 있어 헌정당 인사들과 연대하였으나, 돌연 연대를 깨고 이토를 다음 총리로 지명하였다. 입헌정우회는 당시 이토를 비롯한 번벌 출신 관료와 자유민권운동 세력의 연합체였는데 아직 결속력이 느슨했다. 야마가타는 입헌정우회가 자리잡기 전에 흔드려는 생각으로 차기 총리직을 이토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이토는 제4차 내각을 출범시키고, 육군대신, 해군대신 및 외무대신[5]을 제외한 대신 자리를 입헌정우회 회원으로 채워넣었다.

하지만 이토에게는 두 가지 악재가 있었다. 첫째, 미국발 경제위기로 인한 일본의 불황이었다. 둘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공격이었다. 야마가타는 먼저 자신이 육성해온 관료조직, 특히 귀족원 파벌들을 동원해 이토 내각과 정부 여당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마침 이토 내각의 체신대신 호시 도루의 뇌물 의혹이 불거졌다. 귀족원은 이토 총리가 국무와 당무를 혼동하고 있으며, 호시 도루를 잘라내는 것이 내각의 위신을 지킬 길이라고 비판했다.

이토는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호시 도루가 사임하도록 설득하고 그 자리에 하라 다카시를 기용했다. 그러자 자유민권운동을 하던 세력들은 귀족원의 분위기만 살펴 대신을 쫓아낼 수 있냐며 이토에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입헌정우회 파벌 간에 소동이 벌어졌다.

마침 일본 경제의 불황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특별 예산안 편성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의화단 운동 당시 일본군이 지출한 전비를 메우기 위해 특별 예산안이 편성되었는데, 이토의 입헌정우회가 제1당이었던 중의원에서는 통과되었으나, 야마가타가 장악한 귀족원은 이토 내각의 예산안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이토는 메이지 덴노를 움직여 귀족원을 제압하는 초강수로 대응했다. 메이지 덴노는 "묘모익찬(廟謨翼贊)", 즉 조정에 협력하고 덴노를 도우라는 취지의 조칙을 내려 이토를 살렸다. 이에 귀족원이 덴노의 조칙에 굴복하면서 예산안은 간신히 통과되었다.

일본의 불황은 공공사업 추진에도 지장을 주고 있었다. 기존의 철도 부설 사업까지 중단하지 않으면 예산 조달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에 이토 총리가 와타나베 구니타케 대장대신과 함께 공공사업의 중단을 꾀하자, 하라 다카시 체신대신과 입헌정우회의 의원들은 "지역 발전 공약 없이 어떻게 선거를 치르냐"며 이토 총리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호시 도루를 해임시킬 당시의 계파간 앙금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공사업 중단 문제까지 쟁점이 되자 내각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토는 당원의 의견을 받아들여 어쩔 수 없이 공공사업 추진을 밀고 나가는 대신, 군비를 감축하고 공무원 숫자를 줄여 재원을 조달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야마가타가 육성해온 관료와 육군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토는 야마가타에게 군비 감축, 관료 감축 등을 골자로 하는 법안 통과를 위해 귀족원 의원들을 설득해달라며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야마가타는 자신의 후계자인 가쓰라 다로를 총리로 지명하려는 구상을 품고 있었고, 궁지에 몰린 이토의 구원 요청을 거절하였다.

다시 위장이 나빠지기 시작한 이토는 사직서를 냈다. 그는 내심 자신의 후임으로 그의 절친한 벗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가 취임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별다른 파벌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야마가타의 방해 등을 받는 바람에 충분한 숫자의 각료를 확보하지 못했고 조각에 실패했다. 이토의 후임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후계자였던 가쓰라 다로로 정해졌다. 이 일로 이토와 야마가타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제4차 내각이 야마가타의 모략으로 와해된 후, 이토는 총리직을 더는 맡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토는 원로로서 일본의 대외정책 전반을 살피면서도, 자신의 수제자 사이온지 긴모치를 내세워 내정에 관여하였다.

10. 러일전쟁 개전과 한국 통감 부임

제4차 이토 내각이 붕괴된 후, 이토는 예일대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출국했다. 이 무렵 일본 정계에서는 영일동맹 체결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는 영일동맹이 러시아를 자극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인 이노우에 가오루와 후계자 사이온지 긴모치를 조종하여 영일동맹 반대 공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학위를 받으러 가는 길에 러시아를 들러 러일협상을 개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협상 노선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가쓰라 다로와 고무라 주타로, 가토 다카아키 등의 강경파가 영일동맹을 체결해버렸다. 그의 위세는 제2차 이토 내각을 이끌던 시기에 비하면 많이 무너져 있었다. 이 일로, 그와 일본 내 강경파의 사이는 계속해서 벌어졌다.

한편 그는 예일대에서 학위를 받고 당 총재로서 입헌정우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가쓰라 총리와 입헌정우회가 예산안을 두고 갈등을 벌일 때 가쓰라 총리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당원으로부터 큰 불신을 샀다. 대외강경파 역시 그가 관료, 군제개혁을 외치고 러시아에 우호적인 것에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그를 쉴새없이 흔들었다.

제7대 총선에서도 입헌정우회는 중의원 376석 중 191석을 차지함으로써 과반을 점했다. 이토는 용기를 내서 끊임없이 개혁을 부르짖고 러시아와의 우호를 모색했다. 야마가타와 가쓰라 총리는 이토를 몹시 불편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이토를 추밀원 의장에 취임시키는 정치 공작을 감행하여 입헌정우회의 당무로부터 손을 떼게 만들었다. 이들은 이토가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하지 않으면 입헌정우회를 토벌하겠다는 뜻까지 내비쳤다.

이토는 당 내에서 번벌들과 타협한다고 비난을 받고, 당 밖에서는 과거의 동지들과 애증의 관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정당의 총재였으므로 당원들의 입장도 헤아려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원로이기도 했다. 그는 메이지 덴노의 얼굴을 봐서라도 야마가타와 가쓰라 내각에 어느 정도 협조해야 하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만든 정당이 공중분해되는 것까지 볼 수는 없었던 이토는 입헌정우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후계자 사이온지 긴모치가 입헌정우회를 이끌어 나갔다.

마침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용암포를 조차하며 일본을 압박했다. 러시아가 영일동맹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의외로 강하게 나오자, 큰소리치던 대외강경파도 겁을 먹었다. 러시아에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 인사들은 이토에게 러일협상을 맡겼다.

이토는 이노우에 가오루를 내세워 남만주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요구하였으나 러시아로부터 거절당했다. 니콜라이 2세는 일본 같은 약소국에 답장을 빨리 하면 자신의 위신이 깎인다고 생각하여 답신을 늦게 했다. 일본의 강경파는 러시아가 답장을 늦춤으로써 시간을 벌고, 뒤로는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이토는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만한교환론으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만한교환론의 핵심은 "러시아는 만주에서 일본은 한반도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하는 대신, 일본은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거절했다. 이때도 답장은 느리게 왔다. 이 때문에 이토와 그의 친구 가오루는 점점 고립되었다.

이토는 1903년 12월 16일에 세 번째 외교 서한을 보냈지만, 답장은 다음 해 1월 6일에 도착했다. 최후통첩이었던 네 번째 서한은 같은 해 1월 16일에 보냈는데, 2월 3일까지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러시아가 시간을 끌며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일본군 인사들은 러시아한테 선제공격을 당하면 무조건 패전할 것이므로, 선제공격을 해서 무승부로 전쟁을 마무리짓고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상 동력을 상실한 이토 역시 개전에 동의하였고 1904년 2월 4일에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니콜라이 2세의 네 번째 답장은 2월 7일에 도착했다. 그의 답장은 히로부미의 만한교환론을 대부분 충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선제공격을 개시한 뒤에 도착한 답장이었기 때문에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한편 전쟁의 전개는 일본군의 예상과 크게 달랐다. 러시아군은 전쟁 준비를 별로 하지 않은 상태였다. 러일전쟁 초반에는 일본군이 연전연승했다.

러일전쟁 개전 후, 이토는 고종 황제를 감시하고 미국과 영국에 일본의 입장을 선전하는 역할을 맡았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에는 포츠머스 조약의 체결을 주도했다. 일본인들은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받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할양받아야 한다고 폭동을 일으켰는데, 히로부미는 정적이었던 야마가타와 합세하여 계엄령을 발동하고 그들을 진압하였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대한제국으로 파견을 나가서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관할한다는 내용의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킨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 이토의 앞길은 더 어두워지고 말았다. 그는 강경파가 주도한 영일동맹과 러일전쟁에 끌려다녔다. 약 10년간 정치적 고전을 면하지 못한 것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군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일본 군부와 대척점에 서 있던 그의 입지는 이전에 비해 더 좁아졌다. 일본 군부는 한반도와 만주를 경영하려는 야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을 제어할 힘이 이토에게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이토는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는 것이 상황을 반전시킬 돌파구라고 결론내렸다. 이토는 자신이 대한제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 일본 내 정적들의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토는 한국 통치를 멋지게 성공시키고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군 인사들을 비롯한 자신의 정적들을 일격필살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일본군과 강경파들은 그가 알아서 일본을 떠나겠다고 하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로써 그의 한국 통감 부임이 결정되었다.

히로부미는 한국 주차군에 대한 지휘 통솔 권한을 달라고 메이지 덴노에게 청했다.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에서만큼은 일본군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문관이 일본군을 제어한다는 것에 일본군 인사들은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히로부미가 일본을 떠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만족하고, 한국 주차군에 대한 히로부미의 지휘 통솔을 용인하였다. 히로부미는 메이지 덴노의 후원을 받음으로써 전례없는 절대권력을 쥐고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11. 암살 시도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을 맺고 얼마 후 수원에 사냥을 하러 갔다. 이때 과천(오늘날의 안양시)에 원태우라는 농부가 있었다. 원태우는 조국을 도적질한 이토 히로부미와 그가 체결한 을사늑약에 크게 분노하던 상태였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으로 놀러 갔다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열차 레일에 바위를 걸쳐서 열차를 전복시키려 했다.

원태우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이토가 탄 열차가 지나갈 철로에 바위를 놓았다. 그러나 거사를 일으키기 직전 한 동료가 바위를 치우는 바람에 계획에 실패했다. 원태우는 포기하지 않고 돌을 집어서 이토를 향해 힘껏 던졌고, 돌은 서리재 고개에서 달리는 기차로 날아가 유리창을 깨고 거짓말처럼 이토의 머리에 정확하게 명중되었다. 이때 깨진 유리 조각도 같이 이토의 얼굴에 무려 8조각이나 박혔다. 이토는 뇌진탕을 일으켰지만, 동승하고 있던 주치의가 응급 조치를 해서 살아났다.

당시 달리는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진 것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런 의문은 다음과 같은 당시 환경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1905년 당시 기차 속도는 시속 20km~30km로 속도가 느렸는데,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볼 수 있는 속도로 열차가 달렸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돌팔매질을 한 장소는 당시 서릿재 고개라 부르던 곳으로 경사가 급하여 속도를 줄이며 넘어가야 할 정도였는지라 안 그래도 느려터진 열차가 서행을 해야만 했어서 맞추기가 용이했다. 또한 서리재 고개가 언덕을 깎아 기찻길을 놓았기에 비탈진 위쪽에서 아래쪽을 느리게 지나가는 기차 내부를 보기가 쉬운 점도 한몫 했다. 그 느린 속도로 달리는 열차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의자를 향해 돌을 던졌고, 유리창이 깨지면서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과정상 의문점에 대해서는 원태우 문서 참조.

원태우는 바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이때 성불구자까지 되어서 후사를 남길 수 없는 몸이 되기까지 했다. 이후 일본 경찰들에게 시종일관 감시를 당하며 힘겹게 살았지만, 다행히도 광복을 맞이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만 한국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사망했는지, 벌어진 뒤에 사망했는지는 불명이지만 벌어진 뒤에 사망했다는 설이 좀 더 유력하다.

안양역 1번 출구에 가면 원태우 의사의 모습을 새긴 동판이 있다. 그런데 그 동판이 역으로 통하는 에스컬레이터 한가운데 있는 데다가 제법 멀리 있어서 동판에 새겨진 글귀 읽기도 쉽지 않고 이름을 읽기도 어렵다. 안양 사는 사람 대개가 그냥 장식인지 누군가를 기리기 위한 동판인지 전혀 모른다. 게다가 농부인데 동판엔 갓을 쓴 선비로 표현되었다. 정말 제대로 표현한다면 23살의 농부로서 이토가 탄 기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물론 혹여 의인의 모습으로서 격을 높아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6] 생각해보면 농부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진 않다.

12. 한국 통치의 시작

이토는 1906년 3월 31일에 주일 영국 대사로부터 남만주의 일본군이 막나가고 있으니 그들을 제압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정적 야마가타도 이 사실에 우려를 표했다. 이토와 야마가타는 일본군 인사들에게 남만주에서 벌어지는 군정을 폐지하라고 강요했다. 이 조치로 일본은 열강의 신뢰를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이토는 6월 20일에 일본을 떠나 23일 한양에 도착했다.[7] 히로부미는 "한국 시정 개선에 관한 협의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대한제국의 대신들과 협력하여 한국을 통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열강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협의회로 위장했을 뿐, 이토의 독재 권력으로 운영되는 정부 위의 정부에 불과했다.

13. 통감 정치의 실패

이토의 통치는 다음 해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일진회에 송병준이 입각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이토 통감은 예전부터 일진회를 두고 무식한 집단이라고 비난하며 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진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그들이 난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송병준의 입각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이토는 고종 황제가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 자신에게 저항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위기감을 느낀 이토는 고종 황제에게 "조약 위반"을 운운하면서 특사 외교를 중단하라고 협박했다. 일진회의 힘을 믿고 내각에서 분탕을 치는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며 송병준 농상공부대신을 겨냥해서도 날을 세웠다.

이토는 한국 시정 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소집하고 대신을 불러모아 잔소리를 했다. 이토는 자신이 "기만하는 것도 기만당하는 것도 싫어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성실함과 진정성을 강조하고, 대신들이 고종 황제의 성심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폐하의 성품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힘으로써, 헤이그로 특사를 보낸 고종 황제를 불성실한 인물로 규정하는 인신공격성 비난을 했다.

한편 이토는 예전부터 군부와의 권력 다툼에서 밀리면서 헌법 제11조[8]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 정계에서는 칙령 문서에 내각총리대신의 서명란을 추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일본군 인사들은 육해군 관련 칙령은 예외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토는 전자를 지지하면서 일본군 인사들에 대한 정치 공세를 가했다. 이는 내각총리대신이 군대를 제어하게 만들겠다는 포석이었다.

당시 가쓰라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지배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토 통감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토 통감의 성격상, 그가 일본으로 컴백하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정적들과 결투를 벌이고 다닐 것이 자명했다. 이는 일본의 군인과 정치인 대부분은 물론이고 가쓰라 총리도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역시 이토 통감이 일본에 오면 안 된다고 가쓰라 총리에게 전했다. 이로 인해 이토 통감의 사직서는 반려되고 말았다. 이토 통감은 병든 노구를 이끌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토 통감의 통치는 한일 양국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한 채 궤도를 이탈하고 있었다. 이토 통감은 일진회를 무식한 집단이라고 헐뜯었지만, 일진회 회원의 수는 10만을 넘어가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 인구는 1,70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으로 치면 40만 내지 50만 명에 이르는 거대 정치단체였다. 당시 대한제국에 이보다 더 큰 규모의 정치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을 적으로 돌린 이상, 이토 통감은 한국에서 자신의 통치를 홍보하고 한국민들을 선동해줄 메신저를 확보할 수 없었다.

14. 대한제국 병합에 찬성

이토는 재한 일본인에게 태극기를 들고 순종 황제에 대한 경의를 표할 것을 주문했으며, 한국인 학생에게는 일장기를 들고 자신을 맞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토는 군중이 떠난 자리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버려져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사실은 언론에도 보도되어 일본에 전파되었다. 그의 순행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2월 10일에 일본으로 출국, 2월 17일에 자택으로 돌아와 약 2개월 동안 특별한 일정 없이 칩거하였다.

일본 조야에서는 이토가 한계를 극복했다고 판단하고, 더 이상 그를 고생시키지 말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그는 한국 통치를 하면서 건강이 상했다. 이토 통감에 대한 한국인들의 여론이 나쁜데도 몸이 아픈 노인을 계속 그 자리에 앉혀놓는다면 일본의 위신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후계자 사이온지 긴모치도 이토에게 넌지시 사임을 권했다.

가쓰라 내각은 이토가 대한제국의 합병을 찬성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고 식민지배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데 앞장선다면, 그를 컴백시켜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토가 대한제국 멸망을 위한 제반 조치를 단행하는 외교 업무에 주력한다면, 일본 내정에 개입할 기회는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토를 일본 국내 정치에서 몰아내고 싶어했던 야마가타에게도 나쁠 것이 없는 방안이었다.

가쓰라 내각은 이토의 퇴로를 열어주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1909년 3월 말,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은 가쓰라 다로 총리에게 한국 병합에 관한 방침을 제시하고, 가쓰라와 함께 이토를 찾아가기로 했다. 1909년 4월 10일, 가쓰라와 고무라는 이토를 찾아와 한국 병합을 허락해주라고 청했다. 이토는 "대한제국을 병합하는 것이 그 대강에 있어 옳다"는 답변을 내놓음으로써 자신의 한국 통치가 실패했음을 시인했다. 평소였다면 딴지부터 걸었겠지만, 자신은 할만큼 했다고 생각했는지 의외로 화도 내지 않아 가쓰라와 고무라를 당황하게 했다.

가쓰라 내각은 이토에게 대한제국 합병을 위한 제반 조치를 마무리지을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1909년 7월 6일, 내각에서 대한제국 병합이 결정되었다. 그는 대세를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한제국의 법전을 편찬하기 위한 구상을 모두 철회하고, 사법권을 박탈하는 기유각서를 대한제국에 강요하였다.

1909년 8월 19일, 이토는 야마가타 시에서 열린 연설회에서 한일관계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이토는 "이제는 실로 협동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자진하여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今や方に協同的に進まんとする境遇となり、進んで一家たらんとせり)"고 발언했다. 이로써 이토는 대한제국의 병합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대외적으로 공식화하였다.

이토는 한국 병합을 위해서는 우선 러시아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코콥초프 재무대신을 만나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출국했다.

15. 죽음

1909년 러시아와의 회담이 예정되어 있던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하면서 최후를 맞았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조를 나누어 우덕순은 도중에 있는 채가구역에,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매복해서 이토가 어느 쪽에 내리더라도 죽일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런데 기차는 채가구역에 서지 않고 통과해서 하얼빈역에 정차했다.

당시 이토는 이때 일행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기에 누가 이토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오늘날과 같이 사진이 흔치 않았던데다 더욱이 원태우의 암살 미수 사건 때문에 그 후 이토는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유포되는 것을 극히 금지했다. 결국 안중근은 저격 대상인 이토가 코 옆에 점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만 들어 알고 있었을 뿐, 얼굴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얼빈역으로 가게 되었다. 또한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이에 안중근은 체념했으나,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준 덕에 안중근이 그 자의 얼굴을 보고 점 등을 확인하여 본인임을 알아보고 저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였다.[9]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안중근이 이토를 FN M1900[10][11] 3발로 사살하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에게도 3발을 발사했다. 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박혔고, 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박혔으며, 3탄은 갈비뼈 아래로 들어가 허리에 박혔다. 3발 다 급소를 맞혔다고 한다.[12] 그리고 남은 총알 4발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의 팔꿈치에 1발, 이토의 수행 비서 모리의 복부에 1발,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 철도 이사 나카무라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혔다. (네이버 캐스트 '안중근'과 원재훈의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참조.) 하지만 민간인이 다칠 것을 우려하여 머뭇거리다가 체포당했다. 안중근은 체포당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Корея Ура! Корея Ура!(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13]



20세기 초지만 당시 러시아 측에서는 이토의 방문 모습을 영화로 촬영하고 있었고, 안중근의 거사 장면도 고스란히 영상으로 기록되었다. 일본 측은 촬영된 필름을 러시아로부터 구입하여 료고쿠 국기관에서 6일간 상영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는 거사 직전에 플랫폼을 걷는 이토의 모습과, 거사 직후 체포되어 압송되는 안중근의 모습이 담긴 수십 초 분량만이 남아 있다. KBS에서 사라진 저격 장면 영상을 러시아와 일본의 기록 보관소에서 뒤졌으나, 결국 발견에는 실패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 총격을 받은 직후 응급처치를 위해 열차 내로 옮겨졌다. 이토는 이때까지는 살아 있었으나, 이내 상처가 악화되어 눈을 감았다. 동행했던 그의 손자가 유언은 없다고 공식 확인했다. 미국 군의관 출신의 추정에 따르면 세 발 전부 대동맥, 비장, 간 같은 외상시 과다 출혈을 일으킬 수 있는 부위였기에 현대 의학으로도 손쓰기 힘든 상처 속에서 3분 안에 출혈성 쇼크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 외의 내용은 이 기사 참조.

16. 장례

사후 그의 시신은 하얼빈 만철병원(현 다롄대학부속 중산병원) 영안실에서 방부처리 후 입관됐고, 일본 해군 해방함 아키츠시마에 실려 다롄항을 떠나 도쿄에 도착해 아카사카 관저에 안치됐다. 일본 정부는 시신 도착 전부터 장례 준비를 진행한 후 국장으로 정했다. 국장 당시 유가족을 비롯해 야마가타 아리토모, 도쿠가와 요시노부, 이노우에 가오루 등 국내 요인들과 허버트 키치너 장군 등 외국 사절들이 참석했으며, 대한제국 측도 조중응과 민병석 궁내부대신을 보냈다.

11월 4일, 히비야 공원에서 노제를 치르고 시나가와구 니시오이에 안장됐다.


[1] 추겐(中間)이란 최하급 무사 아시가루와 평민 사이의 세습제 신분으로 짧은 칼을 차는 것은 허용했지만, 상급 무사의 신변을 돌보고 잡일을 담당하는 평민과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이 신분 출신이었다.[2] 기도 다카요시의 옛 이름[3] 에도의 시나가와에서 건설 중이었다.[4] 제3차 이토 내각이 붕괴될 무렵,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자유당과 오쿠마 시게노부의 진보당이 합당하여 헌정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공화연설사건과 이누카이 쓰요시의 입각 문제를 두고 내분이 벌어졌다. 오쿠마 시게노부와 그 일파는 헌정본당을 결성하였다.[5] 제4차 이토 내각이 성립할 무렵에는 정당 출신이 아닌 현직 외교관이 외무대신을 맡아야 한다는 기류가 있었다. 그 흐름에 따라 이토 총리는 가토 다카아키를 입각시켰다. 가토는 이토의 라이벌인 오쿠마 시게노부와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극단적 친영파였으므로 이토 총리와는 이념적으로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이토 총리는 그의 성품이 강직하고 성실하다며 내각에 불러들였다. 물론 오쿠마의 사람을 요직에 하나 심어둠으로써 내각에 대한 오쿠마의 공격을 자제시키려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6] 실제로 농부라는 표현도 일부러인지 아닌지 써져 있지 않다.[7] 이 때 일본을 떠나기 전 자신에게 변고가 생길 것을 우려했는지, '대한제국에서의 반일 감정이 높아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을 못 한다'며 부인에게 유언을 남기고 갔다.[8] 덴노는 육해군을 통수한다.[9] 안중근과 같이 거사를 담당했던 유동하의 친척의 증언이다.[10] 벨기에FN M1900이고 .32 ACP 라는 엄청 작은 권총탄을 사용한 호신용 권총이었다.[11] 거사를 위해 총알 7개를 장전해 놨다.[12] 일본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다.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 KBS1 역사스페셜에서 박물관을 찾아가 이토가 입었던 내복을 촬영했다.[13] 러시아어로 한국 만세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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