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4 02:29:26

월정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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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교
月精橋
파일:월정교.png
지도
주소 <colbgcolor=#fff><colcolor=#000>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74
건립 창건 760년 (경덕왕 19)
중건 1280년 (충렬왕 6)
복원 2018년 4월 16일

1. 개요2. 역사3. 복원 및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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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설치된 다리. 남천(南川) 위에 지어졌으며 일정교와 함께 국왕이 사는 궁궐인 경주 월성과 건너편의 남산 지역, 도당산성[1]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신라 시대에는 명칭이 깨끗할 정(淨) 자를 쓴 월정교(月淨橋)였으나 고려 시대에 정할 정(精) 자를 쓴 월정교(月精橋)로 바뀌어 현대까지 이른다.

2. 역사

파일:월정교 전경.png
파일:월정교 야경.png
주간 야간

월정교는 춘양교와 함께 신라 제35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축조된 것으로 삼국사기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으며, 서라벌의 교통로로 기능했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연을 트기 위해 일부러 유교(楡橋)에서 강으로 뛰어내렸던 일화를 월정교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월정교를 만든 이유로 월성 남쪽 강 건너에 관아를 배치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마침 월정교 설치 1년 전에 대대적인 관부 정비를 했던 기록이 있고, 정청을 '남당'이라 일컬은 점, 화백회의가 열리는 등 정치와 일정하게 연관된 도당산성의 위치가 월정교에서 바로 이어지는 남산 북쪽 끝자락이라는 점 등이 근거로 꼽힌다.[2] 이 설대로라면 월정교는 훗날 조선 왕조의 육조거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교통로인 셈이다.

고려 제25대 충렬왕 6년(1280년)에 경주부 유수 노경론이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여몽전쟁의 참화까지 피해가며 최소 520여 년 간 건재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후 어느 시기에 민란이나 전쟁 등으로 불타 무너진 것으로 추정된다. 근대적인 문화재 조사가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나무로 된 누(樓)가 사라지고, 다리 바닥을 지탱하고 있던 석조물만 남아 있었다. 1975년 당국에 의하여 실측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1986년 발굴 조사에서는 월정교 아래 강바닥에서 불탄 기와와 목재 부재가 다수 출토되었다. 2004년 일정교와 함께 사적 제457호로 지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본격적인 복원 논의가 진행되었다.
파일:월정교 내부.png
파일:월정교 내부2.png
교량 내부 및 전시실.

경주시와 문화재 당국은 월정교가 다른 소실된 신라 시대 목조 건축물들에 비해서 비교적 규모가 작고 문헌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는 등의 사유로 우선 복원을 추진했다. 2005년 「월정교 복원 기본계획 및 타당성 조사 연구」가 진행, 심사를 통과하였고 2007년 본격적으로 복원이 시작되었다.

2011년 9월에 상량식을 거쳐 2013년 교량과 누각 등 1차 복원 사업이 완료되어 일반에 개방되었다. 2016년 4월에는 양쪽 문루 공사가 시작, 2017년 10월 11일을 기준으로 문루 복원이 완료되었다. 2017년 11월에 들어서는 주변도 정리가 완료되었다. 김생 글씨체에서 따 온 현판이 남쪽 문루에 설치되었으며, 북쪽 문루에는 최치원 글씨체의 현판이 설치되었다. 공식적인 완공은 2018년 4월 6일로, 2018년 11월부터 항시 개방으로 전시되고 있다. 관람객들은 내부를 직접 거닐면서 전시물 등을 관람할 수 있다.

3. 복원 및 논쟁

월정교 자체는 실제로 존재했던 다리이나 오늘날 남은 것은 석축과 일부 부재뿐이기 때문에, 교량과 누각의 형태는 대부분 상상에 의존하였다. 이 탓에 '복원'이 결정된 시점에서부터 여러 가지 논쟁이 벌어졌다. 현대의 문화재 복원은 단순히 재건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모습을 최대한 반영함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목조 건축의 흔적과 불에 그슬린 기와가 출토되었으므로 지붕이 있는 다리였음은 확실하지만 그 이외의 사항을 전혀 모른다. 이곳과 인근 월지에서 출토된 여러 부재 유물들을 조합해서 통일신라의 건축 양식에 따라 만들긴 했지만 전체적 디자인은 거의 상상에 의존하였다.
파일:attachment/WJbridge.jpg
파일:attachment/WJbridge2.jpg
단층과 복층 복원안.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나 누교(樓橋)였다는 기록, 그리고 기와 및 목조 건축의 처마를 구성하는 부재가 출토된 점에 근거하여 다리 양쪽 입구를 막는 누각을 세우는데, 복층안과 단층안이 제시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왕궁과 연결된 다리라는 점과 방어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등 이유로 복층안을 채택했다. 월정교의 모양 고찰 기단 부분은 본래 있던 석재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3] 교량부터는 목재의 특성상 새로 공수하여야 했다.

월정교를 복원하는 측에서도 이 것이 다소 무리한 계획임을 인지했다. 월정교가 첫 복원 대상으로 선정된 이유도 랜드마크급 유적들에 비하면 비교적 원형 훼손 및 고증 문제의 리스크가 적기에 시범타가 된 것이었다. 황룡사 등 더 중요한 유적의 복원 문제가 월정교 복원의 성공에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월정교의 본래 모습을 100% 복원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지만 경주시라는 도시의 역사성을 재건하고 관광상품을 늘리자는 취지를 학술적 목적보다 우선한 것이다.[4] 경주가 신라의 1천 년 도읍으로서 영화를 누렸던 흔적은 매우 많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석조건축물을 제외하면 터만 남은 문화재가 많다. 그래서 볼거리가 부족하기에 이런 의견에 무게가 실렸다.

이런 논란 때문에 계속 연기하다가 2012년 말을 완공 목표로 공사를 진행하였다. 월정교에 대해
파일:attachment/WJbridge3.jpg
복원 이전 사진으로 당시 월정교의 터이다. 당시에는 석축만 남아 있었다.
파일:attachment/096.jpg
복원사업 진행 중이던 모습. 2013년에 1차 복원으로 누교(樓橋) 복원이 마무리됐다.
파일:201802033068.jpg
복원 이후의 모습.

복원된 결과물에서 고대 건축의 특징인 솟을대공이나 조선시대에 사라진 목조 박공 장식인 현어, 출토된 금동 난간 장식 등을 어느 정도 사용한 점과 드디어 벽체 색을 하얀색으로 채택한 일은 고무적인 일이다. 하얀색으로 칠한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벽체가 하얀 복원 건축물은 한국에서는 월정교가 처음이다. 호류지같이 고대에 세운 일본의 목조 건축물도 벽체가 하얀색이다.[5] 이런 증거들이 있음에도 백제문화단지 사례처럼 한국의 고건축 복원물에선 꾸준히 백색이 아닌 다른 색을 사용해왔다.

하지만 몇 가지 의문점도 있다. 다리 난간 아래에 있는 기와 지붕 등이 대표적인데, 이런 양식은 중국 구이저우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풍우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지만,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관련성을 찾기는 어렵다. 이외에도 고질적인 한국 건축 복원의 난점인 단청의 세부 문양과 상록하단법이 실제로 신라 시대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겠느냐 등 누군가 확실하게 그렇다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또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난감한 문제들이 있다.

고구려나 통일신라 시기의 벽화나 출토된 건축 상단부의 하연 유구 등을 보면 고구려나 통일신라는 상록하단을 사용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 건축은 바탕색이 붉은색과 하얀색 건축 위주였다. 8세기 이후 당나라 건축 유구인 중보촌당묘 건축 명기나 일본 헤이안 시대 당초제사의 복원된 단청 유구를 보면 상록하단과 비슷한 경향의 채화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으나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아직 상단부 전체를 초록색 단청으로 칠하는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다. 저 두 유구는 상록하단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바탕색을 단청으로 칠하는 오채단장에 가깝다. 우리가 아는 상록하단 유구는 11세기 북송 초기에 가서야 나타났다. 즉, 당나라 시대까지는 상록하단 단청은 동아시아 건축 양식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바탕색이 녹색인 단청은 중국 원나라~명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단청이고 그 이전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 단청에 상록하단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바탕색은 주칠이었을 것이다.

월정교 문루 보고서를 보면 명지대학교동궁과 월지 단청 복원 보고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동시대 중국 당나라와 일본 나라시대의 유구들을 참고하여 적색을 주된 색으로 사용하는 단청안이 채택되었으나, 기존 월정교 누각 단청과의 조화를 이유로 결국 또 상록하단식 단청으로 채색되고 말았다. 초기 복원이 제대로 고증되어야 추후 복원 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 문양은 기존 누교의 단청 문양처럼 신라시대 유물 문양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고려와 조선의 단청의 틀에 신라시대 문양을 추가하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국적 불명의 단청이 나왔다는 문제가 있다. 이는 고대의 단청이 남지 않은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치미를 두고도 이견을 제시하는 이들이 있다. 월정교 복원에 사용된 치미는 황룡사 금당 치미의 양식을 본따서 제작되었는데, 월정교가 건설된 시기에 따르면 통일 이전 신라 양식에 해당하는 황룡사 금당 치미보다는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다고 추측하는 경주 월지 치미분황사 중문지 치미의 양식을 따랐어야 적절했단 의견이다.

현판은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불감제일'(佛龕第一) 현판을 바탕으로 제작하였다. 글씨체는 신라의 명필 서예가인 김생최치원의 글씨체를 사용했다.

다리가 남아 있던 12세기 고려시대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나온 "무지개 다리 그림자 거꾸로 문천에 비치었네" 구절로 볼 때 석조 아치교였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 그러나 발굴 조사에서 불탄 기와, 석재 등 부재가 많이 나왔어도 아치에 쓰이는 부재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치형 다리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다만 당시 신라가 들여왔던 당나라의 다리 건축에서는 석조 구축을 하지 않고 나무로만 아치를 만드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당나라 건축을 받아들인 일본식 다리에서도 보이는 구조로 단지 석조 구축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만으로는 100% 장담할 수는 없다. 청명하상도에서 보여주는 송나라 다리 역시 중간에 석조 구축이 없는 아치형이다.

종합적으로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의 고건축 복원보다는 확실히 나아진 부분이 있긴 하다. 다만 불교 건축 문화에서 건축물을 더 화려하게 만들어 준 금구류를 배제한 것과 자칫 조잡해 보일 수 있는 기와 사이의 조선식 회칠 범벅, 무분별한 상록하단 단청은 여전히 한국 고건축 복원의 숙제로 남았다. 왜색 논란을 피하기 위해 조선식 건축 기법을 혼합할 수 밖에 없었다는 건 주객이 전도된 게으른 변명일 뿐, 언제까지 회피를 해결책으로 내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1] 건너자 마자 바로 나오는 산...이라기 보다는 언덕에 있는 토성이다.[2] 신라 왕경의 이해 p.51[3] 기단을 보면 돌이 얼룩덜룩하다. 말끔한 석재는 새로 넣은 것이지만 그 사이사이에 과거 소실되고 남아 출토된 부재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숭례문이나 독일드레스덴 대성당이 이런 식으로 옛 부재를 포함해 복원해서 새 돌 사이에 중간중간 검게 변색된 돌이 얼룩덜룩하게 있다. 일부에서는 어색하게 돌을 섞지 말고 새로운 돌로 색을 맞추는 것이 낫다는 주장도 있으나, 가능한 한 본래의 재료를 활용함이 문화재 복원의 중요한 원칙이다.[4]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상상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니고, 다른 문화재나 신라의 사적을 참고하여 "신라풍"으로 복원하기 위한 노력은 있었다.[5] 물론 북한까지 영역을 넓히면 이 건물이 최초는 아니다. 월정교 이전에 북한에서 복원한 고구려의 사찰 정릉사와 고려의 사찰 영통사는 벽체가 하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