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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5호 | |
안골포왜성 [ruby(安, ruby=アン)][ruby(骨, ruby=ゴル)][ruby(浦, ruby=ポ)][ruby(倭城, ruby=わじょう)] | Angolpo Japanese Fortress | |
<colbgcolor=#BE0529> 국가유산 명칭 | 창원 안골왜성(昌原安骨倭城) |
이칭 | 일본제일수군기지(日本第一水軍基地) 웅천안골리성(雄川安骨里城) 안골포진(安骨浦陳) |
형태 | 왜성 독립적인 부곽을 연계한 산성 |
건설 | 1593년 (선조 26년, 추정) |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3인 | |
폐성 | 1598년 (선조 31년, 추정)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면적 | 63,577㎡ |
지정연도 | 1998년 11월 13일 |
건축시기 | 조선시대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소재지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산27 |
[clearfix]
1. 개요
1593년경 일본군이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 쌓은 일본식 산성이다.1963년 사적 제53호 '웅천안골리성'으로 지정되었으나 1997년 시행한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 때 사적에서 지정해제 되었고, 이후 1998년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2. 역사
7월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10일에 안골포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1592년 6월 21일 기사
10일에 안골포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1592년 6월 21일 기사
경상우도는 김해 · 죽도 · 덕교 · 웅천 · 웅포 · 안골포 · 제포(薺浦) · 천성(天城) · 가덕 · 거제 등지에 역시 전처럼 웅거하여 적선이 항상 드나든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0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0일 기사
현재 머물고 있는 일본군의 수효는 (...) 안골포에 2천, (...) 귀국(貴國)에서 만일 2 ~ 3월 이전에 기회를 타서 거사하면 다행히 초멸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 시기를 놓치고 일본의 정병 예졸이 4∼5월 사이에 모두 나오면 조선의 병마가 비록 천만이라 하더라도 아마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8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8일 기사
13일 조반 후에 배를 출발하였는데, 지나면서 바라보니 감동포 · 천성포(天城浦) · 안골포 등처에 모두 왜적의 진영을 설치하였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같지 않았으나 성지(城池)의 견고함과 옥우(屋宇)의 주밀함은 대부분 서로 같았습니다. (...) 각 진영의 왜장 성명을 알리기 위해 모두 그 나라의 향담(鄕談)에 따라 글자를 맞추어 적겠습니다. (...) 안골포에는 달삼부로(達三部老)[1], (...)
『조선왕조실록』, 1595년 2월 10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5년 2월 10일 기사
각 진영의 왜병 수목(數目)은, (...) 안골포 안치(安治) 4천, (...) 이것이 일본에서 원래 들어온 수목입니다. 그 뒤에 줄거나 늘어난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행장의 한 영을 보면 그 밖의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갖추어 아룁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6월 8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5년 6월 8일 기사
뿐만 아니라 또 왜서(倭書) 한 장을 얻어 보았는데 그 내용에는 「고려수번장(高麗戍番將)으로 부산포는 소서진주수(小西津州守), 서생포는 하산주계수(賀散主計守), 죽도는 갈도가하수(鍻嶋加賀守), 가덕도는 진병고(津兵庫), 안골포는 일번(一番)에 삼이기(森伊紀), 이번(二番)에 흑전갑비수(黑田甲非守)이다. 」는 등의 글자가 있었으므로, 원서(原書)를 가지고 귀국하여 바친다.’ 하였고,
『조선왕조실록』, 1596년 12월 29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6년 12월 29일 기사
도원수가 비밀 장계(祕密狀啓) 한 통을 올렸다. 【그 내용은 대강 안골포(安骨浦)와 가덕도(加德島)의 적세가 고단한 것은 원균(元均)이 말한 바와 같으나 섣불리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
『조선왕조실록』, 1597년 5월 8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7년 5월 8일 기사
제장을 모아놓고 관백이 약속하기를 「조선이 매번 이처럼 나를 속이고 있으니 내가 분함을 참지 못하겠다. (...) 행장은 고성, 의지는 거제, 죽도의 왜는 창원과 죽도와 부산, 다른 왜장은 기장, 안골포의 왜는 가덕도, 가덕도의 왜와 청정은 서생포, 이런 식으로 8개 지역에 나누어 둔거하고, 그 나머지는 다시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가라. 조선이 끝내 강화를 애걸하지 않으면 가까운 곳이나 5∼6일 거리되는 지역을 수시로 침략하여 기필코 강화하도록 하라. 산성이 있는 곳이면 비록 다 죽더라도 공격해 깨뜨려야 하니, 너희는 죽을 힘을 다하라. 만약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 처자(妻子)를 모두 죽이겠다. 」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6월 14일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7년 6월 14일 기사
상이 양 총병(楊總兵)의 사처에 거둥하여 영위례(迎慰禮)를 행하였다. (...) "듣건대 적은 군량을 나고야(郞古耶)에 적치하였다 합니다. 귀국의 병선을 인솔하고 저들의 양도(糧道)를 끊어버린다면 적은 반드시 굶어죽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싸우지 않아도 완전히 승리할 것이므로 제가 벌써부터 이 뜻을 권율 · 박홍로(朴弘老)와 만나 의논하려고 하였습니다. 국왕께서 두 사람에게 다시 분부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도 누차 주사(舟師)를 파견하여 이 계책을 써보려고 하였지만 가덕과 안골에 있는 적의 소굴을 거쳐가야 하므로 사세가 매우 어려워 쉽게 성사하지 못하였소. 만약 육병(陸兵)으로 안골의 적을 공격한다면 행여 계책이 실행될 수도 있으니 대인이 도모해 보시오."
『조선왕조실록』, 1597년 6월 14일 기사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가 빠르게 함락당하면서 안골포를 포함한 웅천현 지역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나, 처음에는 파죽지세로 치고 나가던 공세가 점점 시들해지고 특히 수전(水戰) 쪽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1592년 부산포왜성을 중심으로 동해안과 남해안에 전선(戰線)을 형성해 왜성을 쌓으면서 대치전으로 돌입했다. 특히 안골포 지역은 이미 안골포 해전에서 일본 수군이 대파당하고, 부산포 해전에서 뚫려버려 최후방인 부산포왜성까지 공격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수군의 거점으로 사용할 겸 부산포로 조선 수군이 침범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안골포진성이 있던 곳을 활용하여 안골포왜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축성 시기는 대략 1593년 7월경으로, 일본군의 수군을 지휘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 등 3명의 왜장이 약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공사를 주도했다."우리 나라도 누차 주사(舟師)를 파견하여 이 계책을 써보려고 하였지만 가덕과 안골에 있는 적의 소굴을 거쳐가야 하므로 사세가 매우 어려워 쉽게 성사하지 못하였소. 만약 육병(陸兵)으로 안골의 적을 공격한다면 행여 계책이 실행될 수도 있으니 대인이 도모해 보시오."
『조선왕조실록』, 1597년 6월 14일 기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안골포왜성은 웅천왜성을 보조하고, 눌차도왜성과 연계하여 부산포로 진입하는 관문인 가덕도 해협을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정유재란 전까지만 해도 바로 건너편의 웅천왜성이 일본군 거점의 최전방인 동시에 육군보다는 수군을 운용해야 하는 입지였으므로, 수로를 이용한 해전을 지원하는 데 탁월한 입지에 있었다. 실제로 조선 수군이 부산포로 진격 혹은 경상좌도 연해지방에서 작전을 수행할 때마다 안골포 진영의 존재가 걸림돌이 되었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서 수 차례 드러난다. 공사를 주도한 와키자카, 가토, 구키 3명이 교대하며 주둔했으며, 눌차도왜성 진영과 서로 교대하는 등 주변의 왜성들과 연계성이 특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일본군이 철수를 결정하면서 왜성은 버려졌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도 안골포에는 수군진이 존속했다. 제포첨사진을 잠시 안골포로 옮겨왔다가 1625년 다시 환원시키고, 대신 가덕진에 소속된 안골포만호진을 두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당시 혁파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사적으로 지정, 1963년에 웅천안골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재지정되었다가 1997년 1월에 해지된 뒤 1998년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등재되어 지금에 이른다.
3. 위치 및 구조
안골포왜성 위치관계도 |
안골포왜성 항공사진 (1967)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60, 62, 122, 129, 130, 152, 154, 155, 157, 158, 161, 162, 176, 289, 298, 312-1, 312-2, 547, 548, 633, 635, 636, 637, 647, 814, 산 27, 산 29, 산 30, 산 30-3, 산 30-4, 산 32-4
창원 안골왜성은 둘레 594m, 높이 4 ~ 7m, 전체 면적 63,577㎡, 유적의 분포 범위는 남북 400m, 동서 600m이다. 그 형태가 여타 왜성, 나아가서는 일본 본토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중세 산성과는 구별되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동망산(東望山) 구릉지의 역ㄴ자 정상부 능선을 따라 나란히 4곳의 독립된 부곽을 배치하고 이에 연달아 토루(土壘)를 쌓아 서로 이어 유기적으로 활용했다. 각 부곽 구역이 서로 연달아 이어져 있었으면 연곽식 산성이 되었겠으나, 안골포왜성의 경우 토루와 자연 능선으로 연계될 뿐 분명 각 부곽이 독립된 구역을 형성하고 있다. 토축이면서 가장 크기가 작은 제4곽을 제외하고, 거의 동등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 제1곽 ~ 제3곽은 각각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가 맡았던 구역이라는 해석도 있다.가장 동북측에 위치한 제4곽과 그 남측의 제3곽 사이에는 능선절단형 해자(堀切り)와 흙다리(土橋)를 놓아 통하게 했고, 오각형 형태의 제3곽은 남측에 마스가타 고구치(桝形虎口)가 있으며 동북측과 서북측에 망루 기단이 하나씩 있다. 그 중 서북측의 망루가 규모가 있어 제3곽의 천수 기단으로 비정할 수 있다. 제3곽과 가장 중앙의 제1곽 사이에는 좁은 능선 한가운데를 막아 출입구를 만들었고, 규모가 가장 큰 제1곽은 장방형의 평면형태로 북측 석축 한가운데와 서남측에 마스가타 고구치가 1곳씩 있다. 네 모서리에 모두 망루 기단이 있고 동남측의 기단을 천수 기단으로 비정한다. 제1곽의 바로 서측에는 남측으로 크게 돌출된 부곽의 북측에 마스가타 고구치를 열어 출입할 수 있게 했는데, 안골포가 위치한 곳의 반대 방향인 남측을 조망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
제1곽과 부곽 서측으로 이어진 능선에는 규모가 작은 장방형 평면형태의 제2곽이 있다. 동측과 북측에 마스가타 고구치를 열고 있으며 동북측과 서남측에 1곳씩 망루 기단이 있고 서남측의 것을 천수 기단으로 비정한다. 성 전체로 보면 제4곽의 북측, 제3곽의 북측, 제2곽의 서북측과 서측으로 수직 토루(竪土塁)를 두어 능선을 차단했으며 그 사이에 많은 부곽군(副郭群)을 두어 막사를 배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제2곽 서측 약 300m 지점의 욕망산(陸望山) 정상부를 ㄴ자로 크게 두른 기존 조선 수군의 안골포진성 체성이 잔존하는데, 이 체성의 북측 끄트머리에 왜성의 외곽부로 추정하는 방형의 부곽들이 추가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즉, 안골포왜성은 안골포진성의 일부를 최외곽 방벽, 다시 말해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로 삼아 일체화한 것이다.
성벽은 안골포진성의 체성을 대부분 활용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하며, 자연석과 거친 자연 쪼갠돌이 주를 이룬다. 성벽 모서리의 축조는 긴 면과 짧은 면을 서로 엇갈리게 조합하는 산가지 쌓기(算木積み)와 입석(立石)의 모서리를 맞추어 쌓는 선돌 쌓기(縦石積み) 기법으로 쌓아올린 것으로 확인되며 출입구에는 거석을 사용했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 만을 끼고 있는데, 이는 바닷길을 운용하기 쉽도록 해변까지 이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성의 출입은 육지 쪽을 막고 바닷길을 이용하기 위하여 바닷가에 이르도록 해자를 파서 교통로로 이용했다.
3.1. 안골포진성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안골포진성 安骨浦鎭城 | Angolpojinseong Fortress | |
width=100% | |
정식 명칭 | 안골포수군만호진성(安骨浦水軍萬戶鎭城) |
입지 | 포곡식 산성 |
기능 | 수군진성 |
면적 | 미상 |
건설 | 1490년 (성종 21) |
폐성 | 1598년 (선조 31년) |
위치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647 |
잔존 체성 축조 상태 |
안골포(安骨浦)는 웅포(熊浦)와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포구로, 바다로 뻗어나온 산줄기에 깊숙하게 파여 있어 '안쪽으로 파인 산골짜기'와 같다고 하여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지형상 바깥쪽의 바다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둥그렇게 파인 만이 잘 형성되어 있어 전선(戰船)을 숨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1462년 (세조 8) 병조의 건의에 따라 김해 가망포에서 만호진을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조선 초 수군의 방어 원칙이던 선상수어(船上守禦)에서 한 발 물러서 남해안 연안 일대에 성보(城堡)를 설치하기로 결정하면서 축성이 논의되었다. 1490년 (성종 21) 경상도의 적량진 · 사량진 · 지세포진 · 영등포진성 등과 함께 축성했고 둘레 1,714척[2], 너비 13척[3]의 규모였다.
이 성은 본래 여타 수군진들과 유사하게 방형이나 주형(舟形)의 평면구조를 가지는 산성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는 그 모습을 온전하게 볼 수가 없다. 일본군이 안골포왜성의 노보리이시가키로 쓸 서측과 남측 모퉁이 구간만 제외하고 성벽을 해체한 뒤 그 성돌을 왜성의 석축을 쓰는 데 썼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다만 서측 체성에는 아직도 옹성이 딸린 서문지가 남아있고, 서남측 모서리에 각루(角樓)로 볼 수 있는 치성의 윤곽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곳에는 안골포 만호진이 그대로 배치되었지만, 부산진성이나 서생포진성 등지와는 달리 따로 성곽을 보수하지는 않은 듯하다. 1872년 지방지도의 안골진지도에서 진영 주변에 성곽과 같은 구조물이 아예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4] 이후 안골포왜성의 인지도에 밀려 안골포진성은 따로 문화유산 등재를 받지도 못해 현재까지도 비지정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실제로 찾아가 보면 등산로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으며, 밭 둔덕과 잡초가 뒤엉켜 겨울이 아니면 관찰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부산신항의 북로와 안골대교를 건설하면서 욕망산이 통째로 깎여나갈 때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아 잔존한다.
3.2. 안골포굴강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43호 | |
<colbgcolor=#315288> 창원 안골포굴강 昌原安骨浦掘江 Chanwon Angolpo Basin | |
분류 | 유적건조물 / 산업생산 / 제조업 / 조선소 |
면적 | 1,022㎡ |
지정연도 | 1994년 7월 4일 |
건축시기 | 조선시대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소재지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517-9 |
안골포진성 체성 잔존구간의 서북측, 지금도 선착장으로 쓰고 있는 안골부두의 바로 서측에 붙어 있는 활 모양의 구조물이다. 드러나 있는 석축의 길이는 약 75m 정도이고, 타원상의 석축 상단은 일부 허물어져 있다. 폭 390 ~ 530㎝, 높이는 약 110㎝에 이른다. 굴강에 사용된 석재는 산돌과 냇돌이며, 돌의 크기는 76×32×30㎝, 42×25×26㎝, 25×17×10㎝ 정도이다. 입구는 동쪽으로 추정되고 그 폭은 약 20m 정도이다.
현재의 굴강은 내부가 갯벌로 뒤덮여 있으나, 축조 당시에는 굴강의 목을 통해 바닷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서 약 20여m 떨어진 산 언덕에는 옛 객사 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개항기에 작성된 「웅천현고지도」를 보면 이곳에 배 3척을 그려두고 있으며, 제덕동 앞바다에는 선소(船所)라는 표기와 배1척이 그려져 있어 이곳에 안골포 선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 거북선을 매어 두었다는 전설도 있다.
4. 과거 모습 및 현황
5. 교통
6. 외부 링크
7.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5호
경상남도 진해시 안골동에 있는 이 성은 동망산 정상 위에 만들어졌다.
성의 둘레는 594m이며, 성벽의 높이는 4∼7m 정도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왜성으로 협반안치, 가등가명, 구귀가룡 등이 쌓아서 1년씩 교대로 수비한 일본 수군의 본거지이다. 해전에서 거듭 타격을 입고 일본으로부터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우리의 수군을 막기 위한 최후의 기지로 삼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산의 지형을 3등분으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정상을 평평하게 깎은 뒤 본성, 제1외곽, 제2외곽을 나누어서 따로 돌로 쌓고, 외곽으로 각 부분을 연결하였는데, 외곽의 일부는 흙으로 쌓았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 만을 끼고 있는데, 이는 바닷길을 이용하기 쉽도록 해변까지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둘레는 594m이며, 성벽의 높이는 4∼7m 정도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왜성으로 협반안치, 가등가명, 구귀가룡 등이 쌓아서 1년씩 교대로 수비한 일본 수군의 본거지이다. 해전에서 거듭 타격을 입고 일본으로부터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우리의 수군을 막기 위한 최후의 기지로 삼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산의 지형을 3등분으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정상을 평평하게 깎은 뒤 본성, 제1외곽, 제2외곽을 나누어서 따로 돌로 쌓고, 외곽으로 각 부분을 연결하였는데, 외곽의 일부는 흙으로 쌓았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 만을 끼고 있는데, 이는 바닷길을 이용하기 쉽도록 해변까지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