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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454F><colcolor=#fff> 동래왜성 [ruby(東, ruby=トン)][ruby(莱, ruby=ネ)][ruby(倭城, ruby=わじょう)] | Dongnae Japanese Fortress | |
형태 | 연곽식 산성 |
면적 | 불명 |
건설 | 1593년 (선조 26년) |
킷카와 히로이에 | |
폐성 | 불명 |
주소 | 부산광역시 동래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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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 지역 거점으로 지어진 일본식 산성.2. 역사
- [ 조선왕조실록 보기 · 닫기 ]
- > 왜구가 침범해 왔다. 이보다 먼저 일본 적추(賊酋) 평수길(平秀吉)이 관백(關白)이 되어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잔포가 날로 심했다. (...) 이튿날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고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죽었으며, 그의 첩(妾)도 죽었다.적이 또 동래에 당도하자, 송상현이 서문 밖에서 패하여 북문으로 들어갔는데, 적이 작은 대(臺)에 올라가서 무수히 포를 쏘아대므로 사람들은 감히 성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적이 이내 성에 들어왔고 송상현과 고윤관(高允寬)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2년 8월 7일 기사경상좌도 관찰사 한효순(韓孝純)이 치계하였다. "왜적이 전에는 가지고 있던 우마를 전부 팔아 버리더니 이달 20일부터는 진주를 공격하려고 밤낮없이 군사들을 조련시키며 전일에 팔아 버린 우마를 도로 사들입니다. 부산 · 동래 · 서평 · 다대포 등지에는 지역을 구획하여 성을 쌓으려고 성터를 설계하는데 주위가 대략 50여 리는 됩니다. 동래창(東萊倉)의 곡식을 부산포로 옮겨두고 일본 군량은 부산 앞바다의 아차도(阿次島)에 운반해 놓았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2월 18일 기사평안도 우방어사(平安道右防御史) 김응서(金應瑞)가 치계하였다. "신이 독포사(督捕使) 박진(朴晉), 좌방어사 정희현(鄭希玄),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言) 등과 합병(合兵)하여 경상도 밀양 땅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근일 적세를 탐지해 보니 양산 · 울산 등지의 적이 부산 · 동래 · 서생포 · 제포 등지로 진(鎭)을 옮겨 널리 퍼져 둔취(屯聚)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7월 18일 기사그리고 경상좌도의 적세는 서생포 · 임랑포 · 두모포 · 기장과 동래 지방의 성황당(城隍堂) 및 수영 · 부산포와 양산 지방의 구법곡(仇法谷) 등지에 전처럼 진을 치고 웅거하여 적선이 수시로 오가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0일 기사현재 머물고 있는 일본군의 수효는 서생포에 5천, 임랑포에 3천, 기장에 3천, 동래에 1천, 부산포에 1만, 양산의 구법곡에 3천, 좌수영에 3백, 김해에 1만 8천, 안골포에 2천, 가덕에 7백, 웅천 · 제포에 4천, 거제에 7천여 명인데 귀국(貴國)에서 만일 2 ∼ 3월 이전에 기회를 타서 거사하면 다행히 초멸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 시기를 놓치고 일본의 정병 예졸이 4 ∼ 5월 사이에 모두 나오면 조선의 병마가 비록 천만이라 하더라도 아마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8일 기사각 진영의 왜장 성명을 알리기 위해 모두 그 나라의 향담(鄕談)에 따라 글자를 맞추어 적겠습니다. (...) 동래에는 공가와마다시지(共加臥馬多時之),[1] (...)
『조선왕조실록』 1595년 2월 10일 기사그후 각처의 장관(將官)이 보고한 것은 「부산 · 동래 등처의 적의 군영과 둔책(屯柵)은 전과 같이 그대로 있으며, 중국의 사신이 오기를 기다려 철회하겠다고 말하는데 별달리 왕래하는 행적은 없다. 」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4월 6일 기사각영(各營)의 왜병 수목(數目)은, (...) 동래 내운태수(萊雲太守)[2] 8천으로, 이것이 일본에서 원래 들어온 수목입니다. 그 뒤에 줄거나 늘어난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행장의 한 영을 보면 그 밖의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갖추어 아룁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6월 8일 기사중국 사신이 영산(靈山)에 있으면서 왜인 신구문(新丘門)을 보고 분부하기를 "내가 청정(淸正)이 물러간 뒤에 동래 등처의 각 영책(營柵)을 다 불태우고 일면으로는 주본(奏本)을 올리고 일면으로 도해(渡海)할 것이니, 네가 돌아가 행장(行長)에게 말하여 속히 준행하도록 하라. (...)" 하니,
『조선왕조실록』 1595년 11월 1일 기사
1592년 음력 4월 14일 동래성 전투에서 동래부사 송상현이 전사하고 성이 함락되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은 작원관을 통해 경상도를 파죽지세로 침공해 나간다. 모리 데루모토 휘하 3만여 명의 제7군은 경상도에 주둔하게 되는데, 모리(毛利) 가문의 가신이었던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1593년 동래읍성을 허물고 그 인근에 왜성을 쌓는다.
이후 동래왜성이 위치했던 망월산(望月山) 일대는 증산(甑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일본식 성의 모습이 위로 켜켜이 쌓인 떡시루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반도에 남아 있는 다른 왜성 소재지의 지명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4]
3. 현황
무기시마 성 출토 기와의 모습 |
1979년 첫 정비사업 당시에 혼마루였던 동장대 부근에서 조선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이 위 사진의 임진왜란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세운 무기시마 성(麦島城) 소천수각에서 출토된 기와와 동일한 거푸집으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일 양국에서 발견된 해당 기와들에는 융경2년중추조(隆慶二年仲秋造), 만력12년(萬暦十二年) 등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제조 시기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쓰시마 시의 가네이시 성(金石城)에서도 동래부 지방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기와가 출토된 바 있어 임진왜란 당시에 한반도에서 기와를 반출하여 건축에 사용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4. 위치 및 구조
동래왜성 위치도 | 동래왜성 항공사진 (1950) |
동래왜성 지형도 고화질 |
동래왜성 토축으로 추측되는 윤곽 |
왜성의 중심부인 제1곽은 현재 동래읍성 동장대가 위치한 망월산 꼭대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군관청(軍官廳)이 위치한 곳이 제2곽로 추정되며, 그 사이에 자잘한 곡륜군(曲輪群)이 남아 있다. 이 구역은 현재 충렬사 관할로, 입산통제기간이 있어 확인해본 뒤 답사해야 한다. 우천 시 사고의 우려가 있어 출입이 통제되며, 동절기(11월 1일 ~ 5월 31일)에는 화재의 우려가 있어 출입이 통제되니 참고.
혼마루의 동북측 산자락에는 이랑형 해자(竪堀, たてぼり) 2개가 나란히 위치한다. 이곳은 충렬사 권역 내부가 아니라 철조망 바깥에 있으므로, 동래화목타운아파트에서 인생문으로 통하는 망월산 등산로를 이용해야 갈 수 있다. 바로 동쪽에 붙어 있는 동래화목타운아파트의 서측 콘크리트 옹벽에 의해 끊겨 있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여름에 가면 온갖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해자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제1곽의 서북측 경사면에도 50년대의 항공사진을 확인해 보면 수직 해자로 보이는 굴곡이 있는데, 아직 조사가 되지 않아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이외에도 현재 동래읍성의 체성이 되어 있는 망월산 남측 자락 성벽이 동래왜성의 노보리이시가키였을 가능성이 있다.
산정의 성곽 말고도 망월산 산록(山麓) 역시 왜성의 권역 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진기업 부지 입구에 왜성의 성돌처럼 생긴 석재가 벽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곳이 정말 왜성의 흔적인지는 불명.
5. 교통
- 도시철도
-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충렬사역 1번, 3번 출구
- 버스
||<-2><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dddddd><table bgcolor=#ffffff,#1f2023> 충렬사역(06195·06197) ||
일반 | [6] |
||<-2><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dddddd><table bgcolor=#ffffff,#1f2023> 충렬사입구 ||
마을 |
동래왜성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는 동장대와 군관청은 충렬사 관할이므로 일단 충렬사를 들어가야 볼 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좌측에 호수[7]가 하나 있고, 그 호수 위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비석이 하나 나오고 그 너머에 작은 철창이 보인다. 그 철창을 열면 동장대로 통하는 길이 나온다.
한편, 해자 유적은 충렬사 관할 구역 외부에 있어 다른 루트로 가야 한다. 동래화목타운아파트 102동 앞에 망월산 등산로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계단과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벤치가 있는 작은 쉼터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자잘한 곡륜군을 관찰할 수 있다. 끝까지 올라가면 동래읍성 성벽 바로 앞에서 인생문(북쪽) 방향으로 길이 꺾이는데 이 꺾어지는 부분에서 아파트 방향을 바라보면 길게 파인 이랑형 해자를 관찰할 수 있다. 동래화목타운아파트 103동 방향으로 나 있고 절벽에 의해 끊겨 있으며, 여름에는 무성한 잡초 때문에 관찰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주의.
6. 관련 문서
[1] 정확히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동래왜성을 쌓은 킷카와 히로이에일 가능성이 있다. 히로이에의 이명 중 '마다시지'와 발음이 유사한 마타지로(又次郎)가 있기 때문이다.[2] 이즈모노카미(出雲守)의 오기로 추정하는데, 이 당시 이즈모의 다이묘는 모리 테루모토였다.[3]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4] 증산왜성(부산포왜성), 양산 증산리(양산왜성), 증성(송진포왜성) 등.[5] 특히 도공들이 많이 끌려갔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으로 부르기도 하는 이유이다.[6] 아침 3회[7] 의중지(義重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