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16:34:26

기림사

파일:불교 종교표지(흰색).svg 일제강점기불교 31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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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15px -10px 0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B9A26A>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말사
함월산 기림사
含月山 祈林寺 | Bulguksa
<colbgcolor=#B9A26A><colcolor=#fff>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기림로 437-17
(호암리 419)
설립 643년
창건자 광유(光有)
주지
등급 제11교구의 교구말사[1]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한자 : 祇林寺 / 로마자 : Girimsa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호암리에 있는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선덕여왕 12년(643년) 천축국의 승려 광유(光有)가 임정사(林井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이후 원효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기림사란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처 가운데 하나였던 기수급고독원[2]에서 따온 것이다.

682년 신문왕이 동해의 용왕으로부터 만파식적과 옥대를 선물로 받아서 대궐로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서쪽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용왕에게 받은 옥대를 본 태자 이공이 "이 옥대는 하나하나가 모두 용이 변한 것입니다. 옥대 조각 하나를 떼서 연못에 넣어 보세요."라고 권해, 신문왕이 그렇게 했더니 옥대 조각이 용으로 변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는 전승도 있는데, 기림사 인근의 용연폭포가 그때 신문왕이 물에 던졌던 옥대 조각이 용으로 변해 올라간 곳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전후소장사리'조와 '낙산이대성'조에 고려 고종 45년(1258년) 기림사의 주지 각유 대선사가 언급된다. 몽골의 침공으로 어수선한 사이에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불아(佛牙)를 대궐에서 맞아 봉안한 것, 몽골의 침공으로 낙산사가 불타기 직전에 가까스로 구출된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대궐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모두 각유의 주청이었고, 이를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목격자로써 일연에게 전해 주어 일연이 '전후소장사리'조와 '낙산이대성'조를 쓰게 되었다고 언급된다.

세종 6년(1424년) 선교양종으로 기존 종파들을 통폐합할 때에 기림사는 선종에 속해 경상도의 4개 사찰[3]에 포함되어, 소유한 토지는 130결이었다.

임진왜란 때에 기림사는 경주 지역의 승병과 의병들이 활동하는 중심지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49년부터 절의 중창이 차츰 이루어졌으며, 1785년부터 1786년의 중창불사는 경주부윤 김광묵까지 참여해 비용을 보탰다. 대흥사의 승려 완호윤우의 제자 풍계현정의 발원으로 1801년부터 기림사 인근 불석산에서 캔 옥돌로 1천 구의 불상을 6년 동안 조성하고, 완성한 것을 대흥사로 이운해[4] 대흥사 천불전에 봉안했다.

일제강점기 31본산 시대에는 경주군 일대를 담당했지만, 현재는 불국사에 그 자리를 물려 주었다.

주요 전각으로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이 있다. 문화재는 건칠보살반가상(보물 제415호), 대적광전(보물 제833호) 등이 있다.

14번 국도 문무대왕면 구간의 도로명이 해당 절의 명칭을 따서 기림로이다. 어일어서 포항으로 넘어가는 기림로의 본격적인 급커브와 헤어핀은 기림사에서 시작된다.

인근에 골굴사가 있다.


[1] 현재 제11교구의 본사는 불국사이지만, 예전에는 기림사가 본사였다.[2] 다른 이름으로 기원정사(祈園精舍)라고도 한다.[3] 나머지 세 곳은 합천의 해인사와 진주의 단속사, 거창의 견암사이다. 이 중 해인사와 기림사만 현대까지 절의 법등을 온전히 보전했다.[4] 이 1천 구의 불상들은 대흥사로 이운되는 과정에서 상당히 기구한 운명을 겪게 되는데, 불상이 완성되어 경주에서 뱃길로 배 두 척에 나누어 싣고 해남까지 이운하는 와중에 뜻하지 않게 동래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한 척이 일본으로 떠내려 갔다. 이키를 거쳐 나가사키에 조선에서 제작한 불상이 실린 배가 오자 일본 사람들은 놀라면서 서둘러 절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려고 했는데, 공사에 참여한 일본인들의 꿈에 불상들이 나와서 "우리는 지금 조선국 해남 대흥사로 가는 길이니 이곳에 봉안될 수는 없다"고 하여 결국 일본인들은 불상을 쓰시마를 거쳐 조선으로 돌려보냈고, 이것도 동래에 갈 예정이던 것이 풍랑 때문에 웅천(진해)에 닿는 바람에 다시 웅천에서 동래로 가서 일일이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 끝에 불상들은 무사히 대흥사에 도착했다. 지금도 대흥사의 천불전에 이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완호윤우나 그 제자인 초의선사와 평소 알고 지내던 정약용이 일본에 떠내려 갔다가 돌아온 불상은 등에다 작게 '일(日)'자를 써넣어서 일본 갔다 온 불상임을 표시해 두자고 제안해, 지금도 불상 가운데 왼쪽 등과 어깨 사이에 전자로 '일' 또는 '일본'이라 쓰인 불상들이 대흥사 천불전에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