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31 00:59:53

흥륜사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15호
경주 흥륜사지
慶州 興輪寺址
Heungnyunsa Temple Site, Gye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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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 281-1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면적 16,740㎡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신라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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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기타4. 외부 링크5. 사적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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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시에 있었던 . 법흥왕불교를 공인한 뒤 세워진 신라 최초의 절이었다. 사적 제15호.

다만 현재 흥륜사지로 등록된 사적 15호는 학계 및 지역에서는 여러 발굴 조사를 근거로 실제로는 영묘사지라고 판단한다. 본 문서에서는 과거의 역사 기록 및 설화를 통해 묘사되는 실재한 절인 흥륜사와 아직까지 (편의상) 흥륜사 터라 불리고 그 땅에 새로 지은 흥륜사에 대한 내용이 혼재되었으므로 주의하여 읽어야 한다.

2. 상세

원래 신라는 불교의 원조인 인도중국에서 멀었던 이유로 백제고구려보다 불교 도입이 늦었다. 고구려인 승려 아도(阿道)가 불교를 전하러 신라에 왔을 때 264년 미추 이사금의 허가로 겨우 초가집 수준으로 지었던 것이 시작이었지만 신라는 토착 신앙의 영향력이 강해 박해를 받아 다시 폐허가 됐고, 훗날 이차돈순교법흥왕이 명해 544년 다시 지어진 뒤 신라를 대표하는 중요한 절 중 하나가 됐다.

통일신라 때도 계속 있었고, 불국사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이 부잣집 금수저환생하기 전 흙수저 때 밭을 시주한 절도 흥륜사였다. 그러다 후삼국시대가 시작되면서 도적떼에 의해 불탔다가 경명왕 때인 921년 복원하고, 조선시대에 다시 불타 폐허가 됐다. 지금 있는 흥륜사는 1980년대에 다시 지은 것이다.

학계에서는 현재의 흥륜사 자리에 사실 또 다른 칠처가람(七處伽藍) 중 하나인 영묘사(靈妙寺)[1]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현대에 다시 지어진 흥륜사 자리의 절터가 옛 흥륜사로 비정된 것은 일제 강점기 시기에 흥(興)자가 적힌 기와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나, 이후 근처에서 영묘지사(靈廟之寺) 및 대령묘사조와(大令妙寺造瓦)가 적힌 기와가 다수 발굴되었기 때문. 이에 더해 2023년 7월 5일 문화재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6월 흥륜사 서편 발굴 조사 중 靈廟寺(추정) 및 靈廟之寺가 직접적으로 적힌 기와 및 고려 시대 불교 공양구 54점이 추가로 확인되어 영묘사 터일 가능성에 더 무게가 실렸다. 기사

삼국유사에 의하면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군에 협조한 신라의 반역자 모척을 백제 멸망 이후 붙잡아 처형했는데, 모척의 가족은 죽지 않고 흥륜사의 노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때로부터 600년 이상이 지난,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이 살고 있던 고려 후기 당시까지 모척 가족의 후손들의 대가 이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3. 기타

  • 흥륜사 금당에는 역대 신라 10대 불교 성인의 조각이 모셔졌고 이들을 신라십성이라고 한다.
新羅十聖
신라십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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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 이차돈 혜숙 안함 의상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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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외부 링크

5. 사적 제15호

흥륜사는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절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지은 것이라 전한다. 신라 미추왕이 절을 짓도록 하였다고 하나 창건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며, 규모가 작고 검소하여 초가집을 짓고 불법을 강연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미추왕이 죽자 절은 곧 폐허가 되었고, 그 후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로 다시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성되었다. 진흥왕은 이 절을 ‘대왕흥륜사’라 하고 백성들이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왕 자신도 만년에는 스스로 삭발하여 법운이라는 법명을 받고 절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흥륜사는 대법회를 열고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신라의 큰 절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이 전생에 밭을 보시한 절이 흥륜사이고 김현(金現)이 호랑이와 인연을 맺었다는 절도 이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당 안에는 선덕여왕 때 김양도가 만들었다는 미륵삼존불상이 모셔져 있고, 동쪽 벽에는 아도·이차돈·혜숙·안함·의상을 그린 신라 10성의 상(像)을 그린 벽화가, 서쪽 벽에는 표훈·원효·혜공·지장·사파의 상을 모셔 놓았다고 전한다. 금당지 앞에는 8각탑지와 서쪽의 경루가 있고 이를 둘러싼 회랑지가 조사되었다. 흥륜사의 남문은 길달문이라고 불렀는데, 귀신인 길달(吉達)이 지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말 반란군에 의해 불탄 것을 경명왕 5년(921)에 다시 지었으며, 조선시대에 화재로 불타 폐사되었다. 절터에는 신라시대의 석조물 가운데 가장 큰 석조와 배례석이 있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신라의 미소로 일컫는 사람얼굴 모양의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지금은 1980년대에 새로 지은 흥륜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선덕여왕 때 창건된 영묘사터로 보기도 한다.

※(경주흥륜사지 → 경주 흥륜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혹은 靈廟寺로도 기록된다. 발굴을 통해 발견된 기와들의 명문 역시 동일 발음의 다른 한자 표기들이 확인된다. 영묘사 자리 역시 최초에 승려 아도에 의해 불교적 의미를 지닌 곳으로 지명된 곳이며, 선덕여왕 때 절로 창건되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는 선덕여왕의 여근곡 설화에서 두꺼비들이 모여든 연못인 옥문지가 바로 이 절 앞에 있었다고 묘사된다.[2] 김현과 호랑이 처녀가 성관계를 한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