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法宮.궁궐 중 가장 으뜸인 궁궐로, 군주가 거처하는 제1 궁궐을 뜻한다.[1] 법궁이 아닌 궁은 '이궁(離宮)'으로 불렀다. 다만 군주들은 정작 법궁보다 별궁에서 일하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법궁의 중심인 전각을 '법전(法殿)'이라 했다.(예: 경복궁의 법전은 근정전)
2. 법궁과 별궁, 이궁
법궁 구조는 동서양 모두 예법에 따라 딱딱했기 때문에, 실제로 생활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불편함을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위에 언급했듯이 별궁이나 이궁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공식적으로 튈르리 궁전과 루브르 궁전이 정궁의 역할을 하던 프랑스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파리에 멀쩡히 잘 있는 정궁을 냅두고 굳이 그 위성도시에 베르사유 궁전을 축조하여 살았던 건 이런 이유다.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 때 파리 시민들이 요구한 내용 중의 하나가 베르사유에 있는 왕실더러 튈르리 궁전으로 환궁하라는 것이었다.러시아 제국 역시 겨울궁전과 여름궁전을 두었으며, 중국 또한 마찬가지여서 명나라와 청나라 역대 황제들은 딱딱한 자금성에 지내기보다는 주변 황궁에서 지냈다. 특히 청나라의 경우 다중수도와 비슷하게 여러 지방에 별궁들을 짓고 북경 자금성에선 1년의 3분의 1만 지냈다.[2] 대표적인 별궁이 피서산장이다.
조선의 경우 원래 법궁 경복궁보다는 실제로 생활하기 편한 창덕궁을 왕들이 선호했으며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소실 후 고종 때에 경복궁 복원사업을 진행하기 전까지[3] 그냥 방치되어 광해군 때 복원을 마친 창덕궁이 사실상의 법궁 역할을 했다. 위에 언급한 다른 나라 예시와 달리 창덕궁은 경복궁이 없던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도 법궁으로 선포되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광해군 시대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법궁이란 용어의 사용이 좀 혼란스럽게 사용되었는데, 창덕궁을 법궁이라고 선포해놓고서는 광해군은 끊임없이 경복궁을 법궁이라고 지칭하면서 경복궁 복원을 위한 목재와 청기와를 10년 목표로 준비하라는 기록도 보이는 데다가, 인목대비 서궁유폐에 관련된 유생과 신하들의 상소문을 보면 "경운궁은 법궁입니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그렇게 되면 광해군 시대에는 법궁이 창덕궁, 경운궁, 경복궁. 이렇게 3곳이나 되는 것이라서 창덕궁을 법궁으로 선포했다는 실록의 기사는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폐주의 기록을 인조반정 세력이 부정적으로 서술했을 가능성을 감안해야 한다.
보다 자세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번역본 사이트에서 "법궁"으로 검색 후 광해군 시대의 기사를 읽어보도록 하자.
그리고 명나라의 세자책봉교명을 못받고 세자로 책봉되었다는 점과 왕위계승서열에 있지도 않은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왕으로 등극한 인조 둘 다 정통성이 매우 약한 군주였다. 그러한 정통성 시비에 시달린 군주의 등극과정과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의 연이은 전란으로 인한 국가기강 해이 및 국가재정 파탄 상태에서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복구하지 못함에 따른 군주로서의 정통성 확립의 일환으로 창덕궁을 법궁이라고 말한 것으로 실록의 기록을 이해해야 한다. 광해군과 인조 시기 이후의 실록 기록을 보면, 창덕궁을 법궁이라고 기록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고, 경복궁을 법궁이라고 말하는 기록이 훨씬 방대하기 때문이다.
법궁이라는 용어와 개념 자체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나왔지만, 유럽을 비롯한 타 문화권에도 군주가 거주하는 정식 궁전과 부수적인 별궁으로 구분하는 경우는 많이 존재한다.
청와대 등 공화국의 국가원수의 관저를 간혹 법궁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다. 일부 관저는 건축 양식상 궁궐과 유사하고, 현대 사회에도 국가원수 관저가 가지는 정치적 위치가 과거 법궁의 위상에 견줄 만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3. 정궁과의 차이
3.1. 조선 초 인식
정궁이 곧 법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정궁과 법궁은 엄연하게 다르다. 그 근거로는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이 임영대군의 집으로 이어하면서 동궁인 문종이 법궁인 경복궁 경내에 어디에 머물고 세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게 되는 것인가에 대한 세종대왕의 직접적인 지시사항에 관한 내용이다."강녕전(康寧殿)·만춘전(萬春殿)·천추전(千秋殿)·연생전(延生殿)·경성전(慶成殿)·사정전(思政殿) 같은 것은 이른 바 정궁(正宮)이고, 함원전(咸元殿)·교태전(交泰殿)·자미당(紫薇堂)·종회당(宗會堂)·송백당(松栢堂)·인지당(麟趾堂)·청연루(淸燕樓)는 내가 세운 자그마한 집인데 정궁(正宮)이 아니니"
《세종실록》 세종 31년(1449) 6월 18일자 첫 번째 기사
세종은 임금의 침소인 강녕전과 그 부속건물을 정궁, 강녕전 뒤에 있는 중전의 침소인 교태전과 그 부속건물은 정궁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현대용어로 바꾸어 설명하면, 법궁인 경복궁 안의 왕의 관저(강녕전)와 집무실(사정전) 권역이 정궁, 그 외의 궁궐 공간은 정궁이 아니라는 뜻이며, 정궁은 법궁에 속하는 일부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인 것이다.《세종실록》 세종 31년(1449) 6월 18일자 첫 번째 기사
'법궁'은 그 나라 국가의 근간이 되는 단 하나의 궁이다. 따라서 정궁과 법궁은 아예 다른 개념이다.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고, 이런 인식은 왕조 초기부터 말기까지 이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270여 년간 경복궁이 중건되지 못했어도 조선의 법궁은 여전히 경복궁이었고, 조선왕조나 대한제국을 통틀어서 임금이 경복궁을 법궁의 지위에서 혁파한다고 명령을 내린 적은 없었다. 오히려 조선 후기에 경국대전을 고쳐서 경복궁을 지키는 관직을 병조 산하에 신설하여서 유지하였고, 내부 건물은 고종 전까지 복원하지 못하였어도 궁장은 계속 수리하고 유지했다. 대표적인 예로, 문소전[4] 터를 조선왕조 후기 역대 국왕들이 참배하고 추모식을 거행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창덕궁은 정식 법궁인 경복궁을 대행하는 임시 법궁이자, 임금이 거처하고 집무를 보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정궁일 뿐 조선 후기의 법궁이 아니다. 창덕궁은 조선 후기의 경복궁과 동급으로 법궁이 될 수는 없다.
비록 창덕궁이 임진왜란 이후로 사실상 법궁 노릇을 하긴 했지만 정식으로 법궁인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창덕궁을 가리키기 적절한 단어는 바로 임금이 주로 사용하는 궁이라는 의미로 '정궁'이다.
조선 국초에 경복궁 터를 잡고 나서 좌묘우사 즉 좌쪽에는 종묘를 우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고 그 사이에 육조거리를 설치하는 것이 동아시아권역에서의 법궁의 배치도와 법궁이 위치한 곳의 도시기본계획이었다. 만약 조선 후기에 창덕궁이 정식으로 조선의 법궁이 되었다면, 종묘와 사직단을 창덕궁이 위치한 곳을 중심으로 이전하여 새롭게 설치해야 함은 물론이고, 법궁은 정문으로부터 법전까지를 일직선으로 하여 법전이 남면을 향하도록 하는 성리학적인 이념에 맞추어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인정전과 인정문과 일직선이 되도록 배치해야 한다. 하지만 조선은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창덕궁은 경복궁의 이궁으로 자유분방하게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새로운 법궁이 들어섬은 새로운 국가가 들어섰음을 의미한다는 것이 당시의 이념이자 생각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 본궐인 만월대를 법궁의 지위에서 혁파하고,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경복궁을 제일 먼저 자리잡은 것만 보더라도 법궁을 새롭게 선포한다는 것은 새로운 국가의 창설을 의미한다. 선조와 광해군 이후로 창덕궁이 법궁의 지위에 있었다고 한다면, 선조와 광해군 이후의 왕들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부정하고 자신들이 새롭게 왕조를 창설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성리학적 지배이념의 시대를 살던 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몰랐을 리가 만무하다.
3.2. 조선 후기 인식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는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등의 영향이 있었고, 반정 세력에 의해 편찬된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 이유는 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인터넷 국역 조선왕조실록에서 "법궁"이라는 검색어로 광해군 시대를 살펴보면, 법궁이라는 용어를 굉장히 혼란스럽게 사용했음이 나타난다.창덕궁을 법궁이라고 하면서도 경복궁을 또 법궁이라고 하는 기록도 다수인 데다가,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구완료하고 난 후에도 수선도감을 설치하여 경복궁인 법궁의 재건을 위해 10년을 목표로 목재와 청기와를 차근히 준비하라는 광해군의 지시가 있기도 하다.
거기에 인목왕후의 서궁유폐에 관련된 상소문이 실린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0년(1618) 1월 29일자 8번째 기사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은 법궁입니다." 하는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광해군 시대에는 법궁이 창덕궁, 경복궁, 경운궁 이렇게 3곳이나 되는 모순점이 발견이 된다.
왕궁에서 생활을 직접적으로 한 사람들이 거의 없고, 조선왕조와 대한제국기의 왕실과 황실의 생활 및 관련용어들의 본래 뜻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것 중에 하나가 용어 '법궁'과 '정궁'을 혼동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연유를 찾아보면, 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국역 조선왕조실록의 각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각주에서 법궁=정궁 또는 정궁=법궁 이라고 처리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4. 목록
- 고구려, 백제, 발해 등은 여러 번 천도를 했고 사비성, 상경용천부 등 도성(都城)의 이름들은 전해지지만 고구려 안학궁을 제외하면 당시 법궁을 특정해 부르는 이름이 명확하지 않다.
- 신라의 법궁은 오늘날의 경주 월성이다. 월성이 위치한 언덕이 초승달 혹은 반달 모양이기 때문. 신라 당시부터 월성(月城), 혹은 왕이 머무는 곳이라 해서 재성(在城), 왕성 등으로 불렸다.
- 고려의 법궁은 이름이 따로 없었으며 단지 본궐(本闕)로만 불렸다.[5] 후에 본궐이 황폐화되어 별궁 연경궁(延慶宮)과 동일시 된다. 그래서 15세기엔 연경궁으로도 불렸다. 고려 멸망 후 16세기부터 만월대로 불리게 된다. 관련정보. 몽고와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강화도로 천도, 강도(江都)에 개경의 본궐 및 별궁 등을 그대로 본떠 짓는다. 그래서 2차 법궁은 강도 본궐이 된다. 고려궁지 문서 참조. 몽고와 전쟁을 멈춘 뒤, 개경에 돌아와 3차 법궁으로 다시 개경 본궐(연경궁)을 사용한다. 그러나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으로 또 붕괴, 수창궁이 4차 법궁이 된다. 위와 별개로 고려는 서경 장락궁에 황성을 두르고 영봉문과 영봉루를 세워[6] 개경 법궁과 같은 격식을 갖추게 했다.
- 일본의 정궁은 황거이다. 다만 황거가 별궁이며 교토 어소가 법궁이라는 말도 있다. 그 이유는 메이지 천황이 1869년 에도 성으로 행차하면서 이후 일본 황실은 줄곧 황거에 머물게 되었는데, 공식적으로 천도령을 내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황실에서 딱히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는 않고 있다.
- 영국의 법궁은 런던의 버킹엄 궁전이다. 조지 3세때 법궁이 되었으며 그 전에는 잉글랜드 왕실에서 장원 형식으로 보유했던 적이 있었다. 연합왕국인 특성상 스코틀랜드에서는 홀리루드 궁전, 북아일랜드에서는 힐즈버러 성이 법궁으로 지정되어 있다.[7]
- 스페인의 법궁은 마드리드의 마드리드 왕궁(Palacio Real de Madrid)이었으나 현재는 공식행사 때만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대중에게 개방하고 있다.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거처는 마드리드 외곽의 사르수엘라 궁전(Palacio de la Zarzuela)이다.
- 왕정 시절 이탈리아의 법궁은 로마의 퀴리날레 궁전(Palazzo del Quirinale)으로 현재는 이탈리아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과거 사보이아 가문이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전에는 토리노 왕궁(Palazzo Reale)이 법궁[10] 이었다.
-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던 시기의 오스트리아는 빈의 호프부르크(Hofburg)가 법궁이었다. 쇤브룬 궁전(Schloss Schönbrunn)은 여름별궁이었다. 보헤미아 왕국의 프라하성(Pražský hrad), 헝가리 왕국의 포조니 성(Bratislavský hrad/Pozsonyi Vár)이나 부다 왕궁(Budai Vár)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대관식 등을 위해 잠시 머무르는 정도로 사용되어 큰 의미가 없었다.
- 호엔촐레른 가문이 통치하던 시기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의 법궁은 베를린의 베를린 성(Berliner Schloss)이었다[11]. 베를린 성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베를린 공방전으로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동독 정부가 공화국 궁전(Palast der Republik)을 지었다. 독일 재통일 이후 석면을 대량으로 사용하여 건강에 좋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공화국 궁전을 하루빨리 치워 동독의 잔재를 없애려던 통일 독일 정부와 독일 제국 시기의 영화를 복원하고 싶던 호엔촐레른 가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2006년 철거되어 베를린 성이 재건되었다. 재건된 베를린 성은 현재 훔볼트 포룸(Humboldt Forum)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덴마크의 법궁은 코펜하겐의 크리스티안보르 궁전(Christiansborg Slot)이었으나 현재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은 덴마크 국회의사당, 대법원, 총리 관저로 사용되어 덴마크 정치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로 바뀌었다. 궁전으로 사용되던 공간은 현재 일반인들에게 관광지로 개방하고 있다. 현재 덴마크 왕실의 법궁은 크리스티안보르 궁전 근처에 있는 아말리엔보르 궁전(Amalienborg Slot).
- 스웨덴의 법궁은 스톡홀름의 스톡홀름 왕궁(Kungliga slottet)이나 현재는 국가행사를 개최하지 않는 이상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이 궁전이 가장 유명해지는 때는 노벨상 시상식때로, 스웨덴 국왕은 노벨상 수상자들을 데리고 이 궁전에서 만찬을 열어 축하해주는 관례가 있다. 현재 스웨덴 왕실의 법궁은 스톡홀름에서 살짝 떨어진 드로트닝홀름 궁전(Drottningholms slott)[12]이다.
- 노르웨이의 법궁은 오슬로의 오슬로 왕궁(Det kongelige slott). 스웨덴 지배 시대에 베르나도테 왕조가 지은 궁전을 사용중이다. 애초에 베르나도테 왕조가 여름철에 임시로 머무를 목적으로 세운 궁전이다보니 크리스티안보르 궁전, 스톡홀름 왕궁과 비교하면 초라해보이는 감이 없잖아 있다.
- 네덜란드의 법궁은 암스테르담의 암스테르담 왕궁(Koninklijk Paleis Amsterdam)이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네덜란드 왕실은 헤이그의 노르드에인더 궁전(Paleis Noordeinde)에 거주하고 있다.
- 벨기에의 법궁은 브뤼셀의 브뤼셀 왕궁(Koninklijk Paleis van Brussel/Palais Royal de Bruxelles)이었으나 현재 벨기에 왕실은 브뤼셀 외곽 라컨 궁전(Kasteel van Laken/Château de Laeken)[13]에 거주하고 있다.
- 왕정 시절의 폴란드의 법궁은 크라쿠프의 바벨 성(Zamek Królewski na Wawelu)과 바르샤바의 바르샤바 왕궁(Zamek Królewski w Warszawie)이었다. 공화국이 된 현재 폴란드 대통령 관저는 리투아니아 출신 라지비우 가문이 사용했던 라지비우 저택(Pałac Prezydencki)이다.
- 왕정 시절의 포르투갈의 법궁은 리스본의 상 조르즈 성(Castelo de São Jorge)에서 히베이라 궁전(Paço da Ribeira)으로 옮겨갔다. 리스본 대지진으로 히베이라 궁전이 파괴된 이후 지진으로 PTSD를 얻은 주제 1세는 지진 피해를 피한 리스본 교외의 아주다 언덕에 천막을 치고 평생을 지냈고, 그 딸인 마리아 1세 시기 주앙 왕세자가 아주다 언덕에서 천막을 치우고 왕궁, 코르테스, 정부부처를 한 곳에 모으고자 야심차게 추진한 바로크 양식의 아주다 궁전(Palácio da Ajuda)이 법궁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침공으로 왕실이 브라질로 피신하며 공사가 중단되었고, 왕실이 돌아온 뒤에는 포르투갈의 돈줄이었던 브라질이 독립해나가고, 자유주의에 입각한 입헌군주제가 도입되며 왕실 마음대로 엄청난 예산이 드는 왕궁 건축이 힘들어진 탓에 아주다 궁전 건설은 원래 계획에서 40% 정도만 건설되어 흐지부지되어 버린다. 그래도 지어진 부분의 실내를 공들여 꾸민 덕분에 아주다 궁전은 건설 중단 이후 주로 외국 국가원수 등 국빈맞이 공식 행사 장소로도 쓰여왔고, 오늘날엔 여기에 더해 평소 박물관과 일부 정부부처 사무실로 쓰인다. 이후 포르투갈 왕실은 왕국이 폐지되는 1910년까지 시설이 더 신식이고 리스본 시내에 가까운 네세시다드스 궁전(Palácio das Necessidades)[14]에 주로 거주한다.
공화국이 된 현재 포르투갈 대통령 관저는 18세기에 지어져 브라간사 왕조가 잠깐 사용했던 벨렝 궁전(Palácio de Belém)이다.
- 제정 시절 브라질의 법궁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 크리스토방 궁전(Paço de São Cristóvão)으로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가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아 브라질로 피신하면서부터 사용했다가, 제정 폐지 이후인 1892년부터 본격적으로 박물관으로 전환했었다.[15] 그러나 2018년 9월 2일 발생한 브라질 국립박물관 화재 사고로 불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 오스만 제국의 법궁은 메흐메트 2세가 건설한 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ı)이었다. 압뒬메지트 1세 이후부터는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çe Sarayı)이 법궁이 되었다.
* 로마 제국의 법궁은 팔라티노 황궁이었다.
영어로 궁을 뜻하는 “Palace"의 어원이 된 장소이며
본래 로마 공화국시절 로마 시의 부촌이었으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인 사저였으나 궁으로 축조되었고
전성기에는 제국 전역에서 모은 금과 보석으로 치장되어
매우 아름답고 웅장했었다.
또한 황궁 아래의 전차 경주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에는
궁과 연결된 황실 전용석이 있었다.
본글 하단에 있는 동로마 제국의 궁들 또한 당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경기장과 이어져 있었으며 이렇게
경주장에 궁과 이어지는 황실 전용석을 만드는 것은
로마만의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갈레리우스 황제가 현 세르비아 감지그라드인 스팔라툼에 세운 펠릭스 로물리아나 등의 별궁이 있었지만
대다수의 황제들은 주로 자신들의 개인 사저를 별궁으로 썼다.
- 동로마 제국의 법궁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Palatium Magnum/Μέγα Παλάτιον/Büyük Saray)이었으나 이 궁전은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약탈당해 대부분 파괴되었고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한 이후부터는 부콜레온 궁과 블라케르나이 궁전(τὸ ἐν Βλαχέρναις Παλάτιον/Blaherne Sarayı)에 머물렀다[16].
[1] 출처 "조선시기 고려 法宮에 대한 지식의 변천", 장지연(서울시립대학교 교수)[2] 단적으로 중난하이와 자금성의 전경, 창덕궁과 경복궁의 전경을 비교해보면 드러난다. 전자들은 녹음과 목조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어 편안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후자들은 석재 바닥에 목조 건축물이 올라간 모습을 보여주어 삭막한 느낌을 준다.[3] 고종 때지만 흥선대원군의 섭정기간으로 복원 사업 역시 대원군이 주도했다.[4]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위패를 모신 전각.[5] 본궐은 정궁(正宮)과 같은 말로 공식 궁궐이란 뜻이다.[6] 개경 본궐도 신봉문, 신봉루, 위봉문, 위봉루 봉 자 돌림 문과 누각이 있었다.[7] 웨일스에는 Llwynywermod가 콘월 공작의 거주지로 되어 있을 뿐, 왕실의 거주장소가 없다.[8] 흔히 알고 있는 베르사유 궁전은 베르사유에 어릴 적 추억이 많았던 루이 14세가 그 곳에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세운 별궁이다. 애초에 베르사유는 파리 시내와 떨어진 위성도시이다.[9] 실질적인 법궁역할을 하는 사도 궁전은 본래 별궁이다. 이탈리아 통일로 인해 교황령이 해체되고, 라테라노 조약을 통하여 교황령의 후신인 바티칸 시국이 출범하면서 법궁의 역할을 하지 못해 지금처럼 되었다.[10] 토리노 천도 전에는 샹베리 공작 성(Château des ducs de Savoie/Castello dei duchi di Savoia).[11] 흔히 알려진 샤를로텐부르크 궁전(Schloss Charlottenburg)은 별궁이었다. 쾨니히스베르크 성(Königsberger Schloss)도 중세 독일 기사단국, 프로이센 공국 시절에나 사용되었지 프로이센 공국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동군연합을 이룬 이후로는 사용된 적이 없었고, 대관식 때나 사용되었다.[12]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기도 하다.[13] 여담으로 이 라컨 궁전 근처에 헤이젤 참사가 일어난 스타드 루아 보두앵(Koning Boudewijnstadion/Stade Roi Baudouin)이 있다.[14] 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는 외교부 청사로 쓰인다.[15] 더 정확히는 1818년에 포르투갈 왕 주앙 6세가 세웠던 국립박물관을 황궁으로 이전했다.[16] 다만 콤니노스 왕조 초창기부터 이미 대궁전보다 블라케르나이 궁전이 더 선호받았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