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9:56:33

베를린 폭격

1. 복수 작전2. 4발 중폭격기 문제3. 발진4. 폭격과 귀환5. 남겨진 것들

1. 복수 작전

1941년 8월 11일 저녁, 레닌그라드 근처의 푸슈키노 비행장에서는 14대의 거대한 중폭격기, Pe-8의 엔진들이 회전시키는 56개의 프로펠러가 공기를 가르는 굉음이 울려퍼졌다. 이들은 종종 모스크바 상공에 퍼레이드에 참가하러 이륙했지만, 이번에는 동쪽이 아니라 서쪽을 향해 날아가는 길이었다.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개인적으로 명령한 그들의 임무는 히틀러제3제국의 심장, 베를린을 타격하는 것이었다.

영국 왕립 공군은 정확히 1년 전에 핸들리 페이지 햄든, 암스트롱-휘트워스 휘틀리, 빅커스 웰링턴으로 구성된 81대의 폭격기로 루프트바페의 런던 공습에 대한 보복으로 베를린에 폭격을 감행했었다. 그러나 그 폭격기들 중 29대만이 목표물을 폭격했고, 이후 10일 동안 가해진 3차례의 공습은 물리적인 피해보다는 절대 제국 수도에 적의 폭탄을 떨어지지 않게 하겠노라 호언장담하던 헤르만 괴링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이상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여기에 소련 또한 괴링의 발언이 소련 해군의 쌍발 폭격기가 독일의 수도를 공격했을 때인 8월 7일에 공허한 자랑이었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제 스탈린은 단순한 정치적 제스처 이상인 도시의 파괴를 목표로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는 4개의 엔진이 달린 페틀랴코프 Pe-8 중폭격기 14대를 모아 연비가 좋은 디젤 엔진을 장착하여 항속거리를 늘리라고 명령했고, 상당한 양의 폭탄으로 베를린 시민들을 죽이고 재산을 쳐부수기 위해 그들을 급파했다.

스탈린이 독일의 수도를 공격하려는 열망은 1930년대 후반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소련 군사고문단이 판단하여 결정한 정책을 말 한 마디로 뒤집은 것이었다. 콘돌 군단에 의해 1937년 4월 26일에 실행된 게르니카 폭격과 같은 전세계에 충격을 던진 사건에도 불구하고 스탈린과 소련 최고사령부는 전략폭격의 가치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 결과, 한때 투폴레프 TB-3, ANT-20 막심 고리키, 칼리닌 K-7과 같은 거인기를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소련의 항공산업계는 단발기와 쌍발기에 집중하도록 재편되었다. 이런 조치는 다발 엔진을 가진 장거리 항공기의 개발을 거의 완전히 중단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41년 7월 19일 발표된 히틀러의 33호 명령이 모스크바에 대한 폭격을 요구하자 보복 수단이 필요해진 소련은 전략폭격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히틀러 명령의 공식 목적은 독일의 동맹국인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대한 소련군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으나, 사실 진짜 동기는 러시아인들을 공포에 떨게 해서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명령을 내릴 무렵, 독일군의 급속한 진격으로 인해 지상군을 지원하던 루프트바페는 반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7월 21일 밤 첫 공습이 시작되었을 때, KG 27, 53, 55 소속의 하인켈 He 111H와 KG 3, KG 54의 융커스 Ju 88A만을 출격시킬 수 있었을 뿐이다. 오후 10시경 모스크바 상공에 도착한 127대의 독일 폭격기는 이후 5시간 동안 104톤의 폭탄과 46,000발의 소이탄을 투하했다. 그러나 소련군에 의해 강력하게 보강된 대공포와 Yak-1 전투기, 300개가 넘는 탐조등이 독일 편대를 분산시켰고, 결국 폭격기들은 폭탄을 마구 흩뿌리는 바람에 큰 피해는 입히지 못했다.

1941년 내내 모스크바에 대한 독일군의 공습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지만, 최대 규모였던 첫 번째 공습에서만 17대의 항공기를 잃었을 뿐, 스탈린의 수도를 태워버리라는 히틀러의 요청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그 다음 공습은 규모와 효과 면에서 더욱 작아지고 적어졌다. 독일군의 공습은 모스크바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스탈린은 그런 시기에 대국민 연설을 통해 그들의 항전 의지를 굳히고 있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스탈린은 소련 공군으로 하여금 베를린을 폭격함으로써 보복하도록 재촉하게 된다.

당시 소련 공군에는 독일군이 러시아 영토를 점점 진격해보면서 수도 베를린까지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있었던 탓에 목표물까지 왕복할 수 항공기는 오직 3종류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임무에 할당된 기종은 일류신 DB-3와 예르모라예프 Yer-2,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TB-7로 불리던 4발기 페틀랴코프 Pe-8이었다.

2. 4발 중폭격기 문제

스탈린이 베를린에 대한 보복 공격을 요구했을 때 소련 공군에는 마땅한 장거리 폭격기가 없었다. 그나마 있던 TB-3가 이미 노후화로 대부분 퇴역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전쟁 초반에 즈베노 프로젝트 담당 비행부대 소속 공중항모기가 폭격작전을 다녔던 정도였다. 그래서 베를린에 대한 첫 공습은 해군의 DB-3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DB-3는 발트해 연안에서 발진하면 베를린에 도착할 수 있었다. 7월 28일, 인민위원회는 해군 제독 니콜라이 쿠즈네초프에게 에스토니아 앞바다에 있는 사레마 섬에서 이륙해 야간에 독일 수도를 습격할 것을 권고했다. 이 임무는 주로 사레마 섬의 칼루가(Kaluga)에 주둔하고 있던 발트 함대 소속 제1친위뇌격 항공연대가 맡았다. 8월 7일 밤,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Евгений Николаевич Преображенский : 1909~1963) 중령이 이끄는 13대의 쌍발 폭격기가 이륙했다.수석 항법사는 표트르 코흐로프(Пётр Ильич Хохлов : 1910~1990) 소령이 맡았다. 독일의 대공 방어선은 완전히 허를 찔려 기습을 허용했고, 폭격기들은 경미한 피해를 입었을 뿐 모두 무사히 귀환했다. 다음 날 밤, 카갈과 아스테온, 사레마에서 작전 중인 공군의 제22 및 제30폭격기 항공연대의 IL-4가 해군 폭격기에 합류했다. 총 15대의 일류신 폭격기가 1,240마일 거리의 베를린 폭격 항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냈다. 사레마에 본부를 둔 해군 비행사들은 8월 11일 Il-4와 Yer-2를 갖춘 공군 장거리 폭격기 항공연대와 합류하기 전에 베를린에 한 번 더 야간 공습을 감행했다.

같은 날, 14대의 Pe-8이 푸슈키노에서 첫 출격을 위해 준비를 마쳤다. 원래 18대의 폭격기가 현장에 도착했으나 엔진 고장으로 4대가 공장으로 복귀해야만 했고, 5대는 목적지에 가까워지면서 아군 대공포에 격추될 뻔했다.

1934년에 북극 탐사선 첼류시킨의 생존자를 구출한 공로로 연방영웅으로 추대된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보도피야노프(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Водопьянов : 1899~1980) 소장은 새로 창설된 제81장거리폭격 항공사단의 지휘를 맡았다. 공습 부대는 카잔에 주둔하고 있던 레베디예프의 제432, 제433폭격기 사단과 Yer-2를 갖춘 제420폭격기 사단, 제421폭격기 사단으로 혼성되어 있었다. 보도피야노프의 부하 승무원들은 일선 부대와 아에로플로트, 공군 실험 센터에서 끌어 모은 정예들이었으며, 북극이나 북해 항로 경험이 많은 조종사와 항법사들이 중심이 되어 선발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적인 비행 지식은 풍부해도 폭격기를 몰아 본 경험이 없거나 비포장 활주로에서 이착륙해본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다. 그런 요소들은 다가올 임무에서 심각한 장애물이 될 것이다.

한편, 원심식 2단 수퍼차저와 정속 프로펠러를 장착한 디젤 엔진 ACh-30B이 Pe-8에 장착되고 시험되었다. 체롬스키 설계국 직원들은 발생한 문제들을 예측했었다. 각 엔진은 때때로 RPM이 심하게 변동했기 때문에 연료 흐름을 조종사가 일일이 감시하고 수동으로 조정해줘야 했는데, 그 작업을 부기장이 전담하다시피 하게 되어 승무원 부담이 더 커졌고, 갑자기 엔진이 멎어버리는 일도 흔했다.

체롬스키 설계국의 기술자들이 엔진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보도피야노프 소장은 성급한 스탈린의 감시 아래 에스토니아라트비아의 해안선을 우회하여 발트해를 건너 슈체친 북쪽까지 갈 비행계획을 세웠다. 이 항로를 취하면 수도까지의 거리는 1,680마일로 계산되었으며, 이는 Pe-8로 하여금 연료를 아껴줄 175마일의 경제순항속도로 고도 23,000피트를 유지하며 느릿느릿 비행하게 된다. 순조롭다면 베를린 상공에 도착하는 예상 시간은 자정쯤이 될 것이다.

치열한 준비와 최종 브리핑과 점검이 있은 후, 보도피야노프 장군은 엔델 푸세프(Эндель Карлович Пусэп : 1909~1956) 소령과 함께 14대의 Pe-8 중 1대에 올라탔다. 보도피야노프는 북극 비행 시절 옛 동료였던 푸세프는 그의 부기장으로 뒤에 앉았다. 이륙 직전, 그는 스탈린에게 자신의 비행기가 목표까지 비행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2차 목표인 스테틴을 요청했다. 설명을 들은 스탈린은 마지못해 동의했지만, 돌아서기 전에 한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자네는 반드시 베를린에 도착해야 하네!"

3. 발진

오후 9시 15분. 폭탄과 연료를 가득 실은 14대의 Pe-8이 서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슷한 시기에 제200폭격기 사단의 일류신 폭격기 2개 중대가 사레마 섬의 활주로에서 이륙하여 공습에 가담했다. 니콜라이 노보드라노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Новодранов : 1906~1942) 대령이 인솔하는 제420장거리 폭격기 연대의 Yer-2도 베를린으로 향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Pe-8은 비행 시작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 콘스탄틴 예고로프(Константин П. Егоров) 소령의 기체는 이륙한 뒤 얼마 되지 않아 한 쪽 엔진 2개가 멎어버렸다. 비대칭 추력에 속도도 충분하지 못했던 그 폭격기는 결국 자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지면에 추락하면서 타고 있던 승무원 11명 모두가 사망했다. 폭격기가 발트해로 향했을 때, 알렉산드르 티아구닌(Александр Н. Тиагунин) 대위의 기체를 향해 아측 발트함대 소속 함대항공대의 폴리카르포프 I-16 전투기가 달려들어 사격을 가해왔고[1], 이 과정에서 당시 제 81 장거리폭격기 사단의 사단장이자 바로 이후 엔진을 물어뜯겠다며 대차게 깐, 미하일 보도피아노프의 탑승기가 피격되어 엔진 하나를 잃기도 했다. 간신히 그 위기를 넘기자 이번엔 지상으로부터 아군 대공포병들이 미친듯이 포탄을 쏘아올렸다.

바실리 비드니(Василий Д. Бидни) 대위가 탄 폭격기는 푸슈키노에서 겨우 40분 거리에 있었는데 오른쪽 3번 엔진에 불이 붙었다. 그는 소화기를 작동시켜 불을 껐지만, 그 덕분에 충분히 상승하지 못하고 있었다. 19,685피트 상공에서 단치히 상공으로 비행하던 기체의 왼쪽 바깥쪽 1번 엔진이 고장났다. 폭탄과 연료를 꽉 채운 Pe-8은 엔진 2개만으로 체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6,560피트까지 하강했고, 그러자 비드니 대위는 2차 목표인 슈테틴을 타격하기로 결정했다. 라우엔부르크 기차역에 폭탄을 투하한 비드니 대위는 는 마지막 연료가 떨어질 때 레닌그라드 부근의 비행장에 기체를 안전하게 착륙시킬 수 있었다. 임무는 절반만 성공한 것이었지만 그는 공습 부대원 중에서 운이 좋은 것이었다.

4. 폭격과 귀환

나머지 11대의 Pe-8은 베를린을 향해 돌진하여 도시 곳곳에 폭탄을 투하하는 데 성공했다. 보도피야노프와 푸세프는 베를린에서 불과 12분 거리에 있을 때까지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그러나 22,965피트 상공에서 엔진 하나가 극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보도피야노프는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고, 독일군의 대공포탄이 발 밑에서 터지는 동안 기체의 침로를 유지했다. 겨우 목표물에 도달한 보도피야노프의 폭격기는 싣고 있던 8,818파운드의 폭탄을 전부 내던졌다. 보도피야노프는 5시간 비행에 필요한 연료가 4시간 정도 남아 있다고 계산하고 항해사 알렉산드르 슈테펜코(Александр П. Штепенко)에게 원래 비행계획의 항로 대신 기지를 향한 직항로를 설정한다.

보도피야노프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그가 탄 비행기는 저기압 지역을 지나면서 날개에 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구멍 난 조종석 안으로는 눈보라가 휘몰아쳐 장비들에 하얗게 성에가 끼고 있었다. 간신히 악천후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고도가 6,560피트까지 내려간 자신을 발견했다. 이때 그가 탄 기체는 에스토니아를 넘어 소련과 독일군 사이의 전선을 넘었다. 슈테펜코 항법사는 인터콤으로 "기지까지 ETA 30분"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너무 빨랐다. 바로 그 순간 4개의 엔진이 모두 정지했기 때문이다. 급격히 고도를 잃은 폭격기가 눈 아래 숲이 보이는 고도까지 떨어졌지만, 활공 경험이 많았던 보도피야노프 소장은 하강을 이용해 속도를 붙이다가 최후의 순간에 나무 꼭대기를 벗어나 들판에 착지할 수 있었다. 기적적으로 모든 승무원은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땅을 밟은 것이다.

8월 12일 아침 푸슈키노에 도착했을 때, 다른 4명의 Pe-8 승무원들만이 사고 없이 왕복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모든 조종사들은 엔진을 저주하며 욕을 퍼부었다. 오후 늦게 다른 2대의 비행기가 돌아왔다. 미하일 우그류모프(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Угрюмов : 1906~1942) 소령은 연료가 떨어졌으나 칼리닌 외곽의 트랙터 공장 근처에 착륙하여 양동이로 가솔린을 담아와 연료를 재주입하고 다시 이륙해 기지로 돌아온 것이다. 알렉산드르 쿠르반(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рбан : 1902~1965) 소령의 엔진은 여러 번 멈춰서, 매번 귀중한 연료를 소비하면서 얕은 급강하로 엔진을 재시동걸면서 겨우 돌아왔다. 그는 크라스노예 셀로 상공에서 연료가 떨어졌지만, 우그류모프와 마찬가지로 들판에 기체를 손상 없이 착륙시켰다가 연료를 재주입하고, 푸슈키노에 도착했다. TB-3의 시험비행사였던 쿠르반의 오랜 다발기 조종경험이 그들을 살린 것이다.

다른 3대의 Pe-8은 기지보다 훨씬 먼 곳에 착륙했다. 그 중 1명은 실종자 명단에 올랐고, 제1비행대대원 알렉산드르 판필로프(Александр И. Панфилов) 중위는 귀환 비행 중 방향을 잃고 핀란드 상공에서 헤매다가 헬싱키 근처에서 적의 대공포에 격추되었다. 그의 승무원 중 2명만이 추락에서 살아남았고 핀란드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이번 작전은 제420연대의 제1비행대대에게도 참담한 임무였다. 연료와 무장을 만재하여 이륙중량을 넘긴 Yer-2는 콘크리트 활주로에서 이륙했어야만 했지만 모든 조종사들은 푸슈키노의 잔디밭 활주로에 경악했다. 알렉산드르 몰로드시(Александр И. Молодчи) 중위는 전출력으로 엔진을 돌려 이륙을 시도하다가 갑자기 두 엔진 모두 동력을 잃기 시작했고 브레이크도 듣지 않았다. 몰로드시 중위는 할 수 없이 엔진이 꺼진 상태로 이륙했지만, 다시 내려왔다가 활주로를 벗어났다. 그 Yer-2는 숲에 부딪혀 부서졌지만 승무원들은 운좋게 살아남았다. 몰로드시 중위는 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뛰어난 폭격기 조종사로서 2개의 황금별을 단 베테랑이었으나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몇몇 Yer-2가 비슷한 충돌 사고를 겪은 후, 임무가 취소되었다. 낮은 구름 때문에 블라디미르 말리닌(Владимир М. Малинин) 중위는 베를린 상공에 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대공포 탄막을 무릅쓰고 2,700피트까지 하강해야만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는 소련의 대공포에 피격되어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지휘관 쿠비슈코(Борис Афанасьевич Кубышко : 1911~1943) 소령은 베를린 폭격에는 성공했지만, 귀환 비행 중 아군인 소련 공군기로부터 급습을 받았다. 그의 폭격기는 화염에 휩싸였지만, 다행히 모든 승무원들이 무사히 낙하산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세 번째 Yer-2는 스테파노프(Александр Г. Степанов) 대위가 조종했는데 베를린 상공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을 뿐 돌아오지 않았다.

그 모든 역경과 위기를 뚫고 간신히 살아남은 대원들이 돌아오자, 보도피야노프 소장은 즉시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그는 다음날 크렘린궁으로 안내받아 어두운 얼굴의 스탈린과 방 가득히 있는 당 간부들과 인민위원, 장군들 앞에서 보고하게 되었다. 넓은 방 한가운데 서서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보도피야노프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군 항공기 11대가 목표에 도달했고 6대가 기지로 되돌아왔으며, 1대는 대공포에 격추당했고 1대는 실종되었고 나머지는 엔진 고장으로 불시착했습니다. 제 기체도 숲에 추락할 뻔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보도피야노프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성을 잃고 불쑥 내뱉었다.

"나는 내 이빨로 그 빌어먹을 디젤 엔진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항공기의 엔진은 작동만 하면 되는게 아니라 신뢰할 수 있어야 하며, 이따위 디젤 엔진과 함께 비행하는 것은 항공기와 승무원의 손실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스탈린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었지만, 지도자 동지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는 돌아오는 길을 밝혀줄 봉수대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는 눈먼 고양이처럼 돌아다니며 항로를 찾아야만 할 겁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도열해 있던 그의 상관 중 하나가 반박했다.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파시스트 비행기를 당신의 비행장으로 곧장 안내하고 싶은거요?"

"분명히 그런 봉수대들은 비행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겁니다. 우리 대원들은 봉수대에서 기지까지 마지막 50에서 100km를 비행하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보도피야노프가 쏘아붙였다.

아무런 말없이 듣고만 있던 스탈린이 손을 들며 말했다.

"그만! 우리도 충분히 알았으니, 장군은 일단 물러나시오."

그 시점에서 스탈린은 목소리를 높여 논쟁을 끝내고 보도피야노프를 해임했다. 곧이어 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Александр Евгеньевич Голованов : 1904~1975) 대령이 보도피야노프의 후임으로 제81장거리 폭격기 사단장이 되었다. 그러나 일주일 후, 보도피야노프는 체롬스키 디젤 엔진 대신 쉬베초프 M-82 공랭 엔진을 장착한 Pe-8을 시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군 기지에 "프첼카(Пчелка)"라고 불리는 귀환 신호대가 도입되었다. 이전 같았으면 보도피야노프의 그런 공박은 목숨을 잃기에 충분한 무엄한 항명이자 지도자 모독죄였을 것이다. 실제로, 독소전이 터지기 직전 공군 중장 파벨 리챠고프가 비슷한, 아니 오히려 그보다 훨씬 경미한 말대꾸 한 마디로 아내와 함께 공군 수뇌부 1/3이 숙청당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대조국 전쟁의 현실은 스탈린의 태도를 약간 변화시켰다.

한편, 베를린에 대한 야간 폭격은 계속되었다. 골로바노프 대령은 Pe-8을 그 임무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9월 1일 밤 쾨니히스베르크를 공습하는 임무에서는 쉬베초프 엔진을 단 개량형 3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해군의 DB-3는 독일군의 사레마 침공이 임박하자 철수하기 전까지 베를린 상공까지 10차례 출격했다. 마지막 공격은 9월 4~5일 밤에 이루어졌다. 86대의 해군 폭격기가 그 공습에 참가했으며, 그 중 33대가 베를린에 도달했다고 보고되었다. 나머지 기체들은 슈테틴, 쾨니히스베르크, 메멜, 단치히, 스위네뮌데, 리바우 등 2차 목표에 폭탄을 떨구고 돌아왔다. 프레오브라젠스키를 포함한 5명의 해군 조종사들이 8월 13일자로 금성훈장을 받았다. 1941년 9월 16일, 공군 조종사 5명도 금성훈장을 받았다.

1942년 3월 전략폭격기 부대가 아비아치야 달노보 데이스트비야(Авиация дальнего действия)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활하고 골로바노프 소장이 사령관이 되었다. 독소전이 터지고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41년 9월 이후, 전선에 가해지는 압박은 소련이 장거리 폭격 작전을 계속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버렸다. 보도피야노프는 Pe-8로 주간 폭격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고, 2대를 시험 출격시켰다. 두 폭격기 모두 루프트바페 전투기의 요격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채 겨우 귀환했고, 보도피야노프의 목표물에 대한 좋은 결과 보고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주간 공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도자 스탈린은 Pe-8에 투입된 많은 양의 금속과 노동력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사치품이 되었다고 느꼈다. 1941년 10월 79번째 Pe-8을 생산한 후, 22번 공장은 모스크바에서 포볼로체로 생산 설비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다시 재조립된 설비들은 쌍발 전술폭격기 Pe-2를 생산하는 제125번 공장에 설치되었다.

5. 남겨진 것들

서방 관측통들은 푸세프 소령이 비행한 구식 폭격기 중 한 대가 뱌체슬라프 외무장관을 태웠을 때 Pe-8을 처음 보았다. 1942년 5월 몰로토프와 다른 소련 고위 관리들은 스코틀랜드 던디 근처에 있는 RAF 로이쳐 비행장으로 날아갔다. 5월 29일에는 일행을 태우고 이륙해 워싱턴 D.C.로 향했고, 6월 13일에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1942년 6월 10일, 소련은 레베데프 대령이 지휘하는 제45폭격기 사단을 조직했다. 그 달 말 독일군이 공세를 다시 펼치는 동안, 스탈린과 골로바노프는 베를린에 대한 또 다른 공습 계획을 논의했다. 이번에 Pe-8은 재래식 AM-35A 엔진을 사용하고 모스크바 남쪽의 크라토보 공군기지에서 이륙했다. 더 멀어진 거리를 보충하기 위해 폭탄의 적재량은 6,000파운드 이하로 제한되었고 여분의 보조 연료탱크가 추가되었다.

8월 29일 밤, 푸세프 소령과 블라디미르 포노마렌코(Владимир В. Пономаренко) 대위가 조종하여 인솔한 5대의 Pe-8 폭격기가 있었다. Yer-2를 몰았던 보리스 쿠비슈코와 제746폭격기 연대의 미하일 로드니크(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Родных)와 파벨 아르카로프(Павел М. Арчаров)는 베를린을 향해 출격했고, 다른 7대의 Pe-8은 쾨니히스베르크에 대한 우회 공격을 시작했다. 동시에 100대의 Il-4와 Yer-2가 전선 근처의 여러 비행장에서 이륙했다. 8월 30일 오전 1시 23분, 첫 번째 폭탄이 베를린에 떨어졌다. 이번 작전은 소련군이 독일 수도를 공습한 것 중 가장 큰 규모였지만, 그 공로는 종전 후 20년이 넘게 지난 1967년 5월 14일에야 뒤늦게 인정되었다. 비록 야코블레프, 라보치킨 전투기나 Il-2 슈톨모빅 지상 공격기만큼 선전되지 않았지만, Il-4는 전쟁 내내 소련 폭격기 부대의 주축이었다. 수적인 면에서 주력이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출격 소티 측면에서도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베를린에 대한 소련의 폭격은 극적이고 때로는 충격적이었지만, 독일군은 모스크바에 대해서 똑같이 비효율적인 공습으로 보복하는데 그쳤다. 양군 수뇌부는 전략 폭격이 국내 전선의 사기에 절실히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베를린에 끔찍한 보복이 가해질 것이지만, 그것은 영국 공군과 미 육군항공대로부터 올 것이다. 종전 무렵 소련도 베를린에 도착할 것이지만, 히틀러의 마지막 제국을 파괴하는 것은 폭격기보다는 지상군의 전차와 화포들이었다.

1945년 5월 8일 유럽에서의 전쟁 종식은 소련을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국으로 만들었지만, 경쟁 상대인 미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절망적으로 뒤떨어진 폭격기만 갖추고 있었다. 냉전 초기에 투폴레프 Tu-4로 복제된 B-29에 의해 헤아릴 수 없는 큰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공군의 전략폭격기 전력 구축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1] 아마도 독일의 4발 수송기 및 초계기인 포케불프 200이 복귀중인 것으로 착각한듯 하다. 당시에도 벌써 공중전은 짧아도 수백미터, 길면 킬로미터 수준의 거리에서 교전하는 특성이 있어(레이더를 단 야간전용 헬캣을 새벽에 먼저 발견하고는 멍청하게 사거리 밖에서부터 예광탄을 대놓고 갈겨대는 일본군 수상기를, 해당 야간용 헬캣이 3마일 거리에서 격추시킨 경우도 있다) 아군 오사가 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