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빙사의 이동 경로. |
보빙사 일행의 단체 사진.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통역사 우리탕이며 뒷줄 왼쪽부터 현흥택, 비서 겸 통역사 미야오카 쓰네지로,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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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빙사(報聘使)는 1883년 양력 7월 15일(음력 6월 12일), 조선이 미국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으로, 한국사에서 직접 바다를 건너 서양제국(西洋諸國)을 견문하고 돌아온 최초의 사례이다.1882년 (양력) 5월 22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해 미국은 특명 전권 대사[1]로 루시어스 푸트를 파견했다. 따라서 조선도 공사를 보내야 했는데 당장 보낼 형편은 못 되었고, 대신 푸트의 건의로 답례차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로 했는데, 그래서 선발된 것이 다음 명단이었다.
2. 사절 명단
- 전권대신 민영익
명성황후 민씨의 조카[2]이자 고종의 외사촌[3], 그리고 후에 순종의 처남[4]까지 되는 왕실 외척. 한마디로 당시엔 젊은 세도가였다. 이렇게 써놓으면 단순 낙하산 인사로 보일 수도 있지만 수신사로 일본도 다녀오고 묄렌도르프와 같이 청도 다녀오는 등 외교 면에서 기존부터 활동해온 인물로 조선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본래 한국사에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사신단의 대표인 정사(正使)는 왕실 종친이나 부마와 같은 외척처럼 신분이 높은 인사를 일부러 선정한 경우가 많았다. 신라에서 왕이 되기 전 김춘추도 대표적인 그런 케이스였고, 고구려나 백제도 중국에 보낸 정사의 이름들을 보면 비슷했다. 당장 청나라 사행길을 기록한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로 가는 사절단에 동행했을 때 사절단의 수장인 정사가 삼종형(8촌 지간)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었고, 그는 영조의 부마이자 영조가 가장 총애한 딸인 화평옹주의 남편으로 왕실과 인척관계였다. 그리고 근대 유럽 왕정에서도 왕실 혈족 출신들이 외교 무대에서 활동한 경우가 많았으므로 국제관례상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미국 신문에서는 Prince Min으로 통칭했다. 'prince'는 '왕자' 외에도 최고위 귀족의 칭호(공)로도 쓰이므로 민영익을 지칭하는데엔 적합한 표현이다. - 부대신 홍영식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의 아들로 역시 명문가 자제, 조사 시찰단(신사 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오고, 내아문 외아문 통리아문의 참의를 역임하는 등 유능한 신진 관료로 인정받던 인물이었다. - 종사관 서광범
수신사로 김옥균의 수행원 역 등을 맡으며 일본에 다녀왔던 인물이었다.
이상 3인이 공식적으로 벼슬을 받은 외교 사절이었고, 이하는 수행원들이었다.
- 수원 유길준
한국어 ↔ 일본어 통역 - 수원 최경석
오위장을 역임한 무관으로, 당시 미국에서는 육군 대령으로 예우했다. - 수원 변수
유길준과 함께 한국어 ↔ 일본어 통역이었으며 조선인 최초로 미국 학사를 받은 사람. 갑신정변 이후 미국에 거주하다 사망했다. - 수원 고영철
한국어 ↔ 중국어 통역 - 수원 현흥택
이외에 3명의 외국인이 보빙사와 동행하였다.
- 서기관 겸 고문 퍼시벌 로런스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중간 기항지인 일본에서 주일미국공사의 주선에 의해 동행하게 되었으며, 이에 즉시 조선 정부에서 서기관 겸 고문의 관직을 내렸다. - 개인비서 겸 통역사 미야오카 쓰네지로(宮岡恒次郞)
퍼시벌 로웰의 비서 겸 통역사로, 로웰이 대동하여 일본어-영어 통역 업무를 맡았다. - 통역사 우리탕(吳禮堂)
통리군국사무아문 전환국 총판을 역임한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의 해관 설치 일로 고용되어 온 중국인으로, 이전에는 청나라의 해외 공사관에 소속되어 근무하는 관리였다. 보빙사에서 중국어-영어 통역 업무를 맡았다.
3. 과정
7월 15일부터 출항하여 중간 기착지로 일본에 들렀는데[5] 이들로만 보내기는 좀 불안했던지 주일 미국 공사의 주선으로 퍼시벌 로웰[6]과 그의 비서 겸 통역사 미야오카 쓰네지로(宮岡恒次郞)가 동행하게 된다.[7] 이에 조선 정부는 정식으로 로웰에게 보빙사 서기관 겸 고문이라는 관직을 내려 주었다.사실 보빙사의 미국 방문 기록이 오늘날 한국 측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왜냐하면 보빙사의 주요 인물인 홍영식, 서광범이 갑신정변의 실패 후 역적으로 단죄되어 기록말살형을 당했기 때문.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미국 내 일정은 신문 기자들이 따라다니면서 충실히 기록했기에 현재 보빙사의 미국 일정만큼은 어느 정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일본에 들렀던 보빙사는 8월 15일에 출항하여 9월 2일에 샌프란시스코로 도착한다. 당연히 미국 정부에서는 사절단을 국빈으로 예우했다. 다만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미 육군 원수 필립 셰리든 장군의 영접하에 비교적 후한 대우를 받으면서 워싱턴 D.C.에 와 보니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은 뉴욕에 가 있었던 것이다.[8] 그래서 며칠을 워싱턴 DC에 머무르다 9월 18일에야 아서 미국 대통령과 조선 외교 사절의 첫 만남이 성사되게 된다.
서양 예법에서 대통령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히 당시 보빙사 일행도 알고는 있었는데,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인사해야 대통령 의전에 걸맞은 적절한 예절인지 토론하던 도중 아서 대통령이 예정보다 일찍 오는 바람에 조건반사적으로 왕에게 하듯이 절을 했다고 한다.# 다만 당대의 여러 언론을 비교한 결과, 이것이 아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일어난 반사적인 일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1, #2). 오히려 조선 예법식으로 한 독립국의 수장에게 보이는 최고의 경의를 나타내자는 의미에서 행해진 일이었으며, 대통령 또한 만족했다고 한다.
다만 이 그림의 정확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단 민영익 등 아서 대통령을 알현한 일행은 관복으로 갈아입었기에 애초에 저런 복장이 아니며, 모자 역시 관모여야 한다. 또, 뉴욕 타임스의 1883년 어카이브에 따르면 민영익 등 3명이 들어오자 그들은 서로를 향해 bow하고[9] 대통령과 악수한 후 서양식으로 접견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절을 한 이후 곧바로 악수도 했다는 소리가 될 수 있다. 조선식으로 먼저 예법을 차리고 서양식으로 예법을 차렸다는 이야기.
참고로 이때 다른 수행원들은 모두 문 밖에서 벽을 바라보며 엎드려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외교 사절이 접견할 때 권한이 낮은 수행원들이 취해야할 행동이었다. 따라서 위 삽화는 1) 문밖에서 엎드려 있던 사람, 2) 서양에 알려진 조선의 양반 복장 등을 바탕으로 상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는 주장도 있다. 단, 민영익 일행은 대통령을 비밀리에 방문한 것도 아니고 복수의 목격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림과 같은 식으로 "절을 하기는 했다"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대한 분석이 있으니 참조.
Each evening finds the Embassy thus engaged:note books are produced, discussions follow ans a few additional questions are asked of those who are available to clear up doubtful points or correct others.
그들은 매일 밤 모여 메모한 것을 가지고 서로 토론하며 의심이 들거나 자신들이 질문할 것들을 지적하였다.
뉴욕타임즈 1883년 10월 13일
당시 보빙사를 수행했던 Clayton Foulk의 기록을 보면, 보빙사 일행은 다소 허세를 부리고 배 멀미를 하는 생리적인 문제는 보였을지 몰라도, 식사 및 공연 등 다양한 일정에선 최대한 세련되게 처신하고 그들이 본 것 역시 상세히 기록했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 문화 부적응 꼰대 같은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보빙사 대표들이 이미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외국 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있던 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추론해볼 수도 있다.[10]그들은 매일 밤 모여 메모한 것을 가지고 서로 토론하며 의심이 들거나 자신들이 질문할 것들을 지적하였다.
뉴욕타임즈 1883년 10월 13일
하여튼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견학도 하고 차관 요청도 하고 기술 전수 요청도 하고 박람회 개최 협조 요청도 하는 등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다 10월 12일 귀국 인사차 백악관에 방문하고, 아서 대통령은 군함 한 척을 내주어 본국까지 타고 갈 것을 권한다. 이들이 방문한 곳은 워싱턴 소방서, 뉴욕 브로드 웨이, 에디슨 전기회사, 뉴욕생명보험회사, 미국 농무부 연구소, 로웰 산업단지 등 산업 전반에 걸쳐있었다. 그래서 세 그룹으로 갈라졌는데 민영익, 서광범, 변수는 이 군함을 타고 유럽 등으로 건너가 각국을 순방하고 1884년 5월 귀국했고 나머지 홍영식 및 수행원은 바로 태평양을 건너 1883년 12월 귀국해 국왕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이때 로웰이 따라와 국빈으로 대접받았다.
보빙사를 계기로 조선은 최초의 미국 유학생과 졸업생을 남기게 되는데, 최초의 미국 유학생은 유길준이다. 근대 시기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기도 한 유길준은 민영익의 허가 아래 미국에 남아 조선인 최초의 미국 유학을 하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보스턴 대학에 입학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하버드 대학 입시 준비 중 2년여 만에 귀국했다. 자세한 그의 행적은 유길준 문서 참조. 최초의 졸업생은 변수이다. 그는 귀국 후 훗날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는데, 김옥균의 암살로 1년간 일본에서 숨어지내다 미국으로 망명하여 최초의 미 대학 조선인 입학 및 졸업생이 되지만 열차사고로 30세에 요절한다. 자세한 내용은 변수 문서 참조.
여담이지만 점심 메뉴로 프라이드 치킨을 시켜먹었다고 한다. 한국이 미국의 프라이드 치킨을 본떠 전 세계적으로도 치킨의 성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참고로 유럽을 보기로 한 민영익 등의 일행은 대략 포르투갈,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을 보고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인도, 싱가포르, 일본 등을 거쳐 왔다. 즉, 조선인 최초로 거의 세계일주를 한 셈. 이집트에서는 조선인 최초로 피라미드를 구경하기도 했다.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팰리스 호텔(palace hotel)에서 "엘리베이터를 처음 탄 조선인들이 지진이 난 줄 알고 당황했다"라고 하는 일화가 미국의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 쓴 『조선체류기』로부터 보빙사의 이야기라고 흔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이들의 이야기가 아닌 1888년 초대 주미 미국 공사로 부임한 박정양 일행이 겪은 일을 당시 그들을 수행했던 알렌이 자신의 책에 남긴 것이다.
4. 뒷이야기
민영익은 돌아와서도 온건파를 유지하다가 갑신정변 당시 사이가 틀어진 급진 개화파들에게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후 친청 근왕파가 되었다. 사실 민영익은 갑신정변 당시 큰 부상을 입었으나, 보빙사 당시의 인정을 생각해 알렌에게 인도되었으며, 그는 민영익을 살려내면서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된다. 문제는 여기까진 좋았는데 1886년 조러 밀약 등 고종의 친러거청 정책에 반대해 위안스카이에게 이 사실을 알려줬다 일이 꼬여 이후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훗날 귀국했으나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다시 상하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1914년 사망했다.홍영식은 미국의 정치 행정 제도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우정 시스템에 큰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귀국하여 만든 게 우체국.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다 3일 천하로 끝난 직후 살해당해 효수되었다.
서광범은 갑신정변 일로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 이후 알바 등으로 먹고 살며 공부하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귀국, 사법 제도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후 권력 다툼 속에 주미 조선 공사직으로 일종의 좌천이 되어 도미, 잠깐 동안 활동하다가 1896년 아관파천의 여파로 해임되고 미국에서 지내다 1897년에 폐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최경석은 보빙사 때 농업 근대화를 위해 종자 및 가축, 비료 등을 얻어와 귀국 후 땅을 하사받아 농장을 만들었다. 이 양반은 갑신정변에도 무사하여 일이 잘 되는가 싶더니 1886년 병사했다. 당연히 농장은 흐지부지되었고 그때 들여온 젖소도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변수(邊燧)도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했다 도미하여, 1887년 메릴랜드 주립 농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후 1891년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취득, 미국 대학 최초의 조선인 졸업생이 된다. 재학 중이던 1890년부턴 미국 농무성 직원으로도 근무. 하지만 안타깝게도 1891년 열차에 치여 31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참고로 그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KBS 수요기획에 방영되었다.
유길준은 1년 정도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이후 1년간 유럽을 구경하고 귀국하였다. 그 사이에 갑신정변이 났기 때문에 유길준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1885년 말부터 7년간 가택 연금을 당하면서 이 시기 서유견문 등을 쓰게 된다. 갑오개혁 땐 내무부를 맡아 개혁에 힘썼는데, 이때 무리하게 단발령을 내리다 되레 민심을 잃고 아관파천 이후엔 을미사변 관련해 고종에게 역적으로 지목되며 갑신년 동지들보단 뒤늦게 일본 망명 크리를 타게 된다. 그래도 고종 폐위 후 귀국한다.
고영철은 역관으로 한성순보의 편집, 번역 책임자이기도 했으며, 영어에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미 영선사로 청나라에 파견된 경험이 있었고 개화파 인사들과 두루 어울렸다. 격동의 시기에도 군수를 지내며 무난한 삶을 살았다. 그의 아들이 서양화가로 유명한 고희동이다.
현흥택은 최경석과 함께 무관 출신으로, 이후 관운이 풀리는듯했으나 을미사변 때 시위대 대장으로 시위대를 이끌고 궁에 침입한 일본군을 끝내 막지 못했다. 이후 춘생문 사건 때 이범진, 이완용과 가담했으나 실패했다. 독립협회에 참여했고, YMCA가 발족되자 자문위원을 맡았다. 부지문제로 YMCA 회관설립이 어려워지자 몸소 400평 가까운 땅을 기증했다. 그의 아들과 조카도 YMCA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하면서 발전에 힘썼다.
우리탕(오례당)은 조선에 그를 불러준 묄렌도르프가 실각한 후에도 해관원으로 근무하다 1890년 은퇴 후 제물포(인천)에서 큰 돈을 벌어[11] 지역 유지로 잘 살다가 1912년 제물포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리탕은 뮐렌도르프의 추천으로 조선에 왔을 뿐 본래 외교관이었다.
퍼시벌 로웰은 보빙사와 같이 다니면서 홍영식과 친해져서 조선에서 국빈 대접을 받고 사진사와 동행해 최초로 고종의 사진을 찍는 등 잘 놀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 지내면서 동양 관련 저술가로 활동해 <Choson : the Land of Morning Calm>[12]을 출판하고 조선 관련 사진첩도 내고 일본 관련 서적도 여럿 써내며 이름을 날렸다. 귀국 후에는 천문학자로 변신해 자비로 로웰 천문대를 건설, 화성에 운하와 더불어 화성인이 있다고 주장하여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 명왕성(당시 가칭 Planet X)의 궤도를 예측해 탐사하던 중 1916년에 사망했다. 참고로 명왕성은 이후 클라이드 톰보가 로웰이 세운 로웰 천문대에서 1930년 발견하였다.
5. 피라미드 등반 루머
- 당시 유행했던 피라미드 등반 및 내부 탐사는 모두 거부했다는 루머가 있다. 왕릉이라서 유교 국가 조선의 선비로서 거부했다는 내용인데, 인터넷으로 짤방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1 #2 꽤 많이 돌아다니지만 별 근거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13]
애초에 보빙사들이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피라미드를 올라가지 않았다면 보빙사들이 직접 남겨놓은 기록에서만 그러한 마음 속 내용이 남아 있을 것인데, 문제는 보빙사들이 현재까지 직접 남겨놓은 기록물은 단 하나 뿐이다. 보빙사 대표 중 2명(홍영식, 서광범)이 갑신정변에 휘말려서 보빙사 관련 기록들이 다 기록말살형에 처해졌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1981년에 김원모 단국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이름을 모르는 수집가들로부터 찾았다고 주장하는 '견미사절홍영식복명문답기' 하나 뿐이다. 그리고 그 하나 남은 자료에도 위와 같이 남의 나라 왕릉이라는 이유로 피라미드에 올라가지 않았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조선일보의 박종인 역사전문기자는 당시 보빙사들이 세계여행에 대해 단 한 글자도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으나 이들과 동행한 미국인 포크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이들은 고대인이 그런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지만 직접 올라가거나 들어가 구경하는 것은 거부하는 소심함을 보였다.' 라고 평가를 남겼는데 이를 토대로 이러한 설이 만들어진 것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
[1] 청나라, 일본과 동급의 외교관을 파견한 것이다. 이는 고종이 미국을 신뢰하게 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2] 명성황후의 양오라비인 민승호가 1874년 폭탄 테러로 숨지자 사후 양자로 입적하였다.[3]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민씨 집안 출신이며, 더더욱이 민영익의 양아버지 민승호는 여흥부대부인(흥선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생모)의 친남동생.[4] 친 여동생이 순종황제의 첫 번째 부인인 순명효황후이다.[5] 당시 태평양 횡단에는 샌프란시스코 - 요코하마 정기선을 이용하여야 했다.[6] 화성 운하설을 제창한 사람으로, 해당 항목 참고.[7] 이는 한국어 ↔ 영어가 바로 직통되는 통역관이 당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영어 ↔ 중국어 ↔ 한국어, 혹은 영어 ↔ 일본어 ↔ 한국어로 통역한 셈. 실제로는 통역의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일본어 중역과 중국어 중역을 모두 참조하였다.[8] 마치 연암 박지원과 연행사들이 북경에 도착해보니 막상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열하에 가 있었던 열하일기의 상황을 연상케한다.[9] 여기서 bow를 절로 보면 아서 대통령도 절한 것이 된다.[10] 1887년 주미 조선공사관 개설 때문에 미국에 파견된 박정양, 이완용, 이상재, 이하영 등은 상대적으로 나이든 축에 속해서 그랬는지 보빙사 일행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들을 인솔한 미국인 호러스 뉴턴 알렌은 12월 26일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그들은 선실 안에 틀어박혀서 모든 걸 하인이 들여보냈고, 조선 관리 복색임에도 줄담배를 피느라 담배 쩐 내, 똥냄새, 입 냄새에 특이한 음식 냄새 때문에 내가 볼 일이 있어 선실에 들어갔다가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면서, 특히 이상재가 많이 '더티'(비유가 아니라 원문에 그리 쓰여있다.)했다고 한다.[11] 학창 시절 절친으로 지낸 프랑스 후작이 있었는데, 그가 죽으면서 전 재산을 우리탕에게 남겼다고 한다. 그후 부동산 투자 등으로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12] 조선 기행기로, 서문에 홍영식에 대한 추모글이 있다. 미국 의회 도서관 링크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PDF 스캔본을 제공하고 있다.[13] 참고로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짤방에 실린 피라미드 주변의 보빙사 방문 사진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 사절단 사진이다. 보빙사 피라미드 방문짤은 사실 일본애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