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0:21:48

필립 셰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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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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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대원수
General of the Armies / Admiral of the Na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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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아놀드의 원수 진급당시 공군은 육군 항공대였다. }}}}}}}}}


1. 개요2. 생애
2.1. 남북전쟁 이전2.2. 남북전쟁2.3. 남북전쟁 이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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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hilip Henry Sheridan(1831-1888)

미국 남북전쟁 당시 연방군 육군의 장군. 율리시스 S. 그랜트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심복으로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기에 빠르게 승진하여 연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남북전쟁 이후에는 인디언 전쟁에서 연방군을 이끌었고, 그랜트와 셔먼의 뒤를 이어 연방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 GA)[1].

2. 생애

2.1. 남북전쟁 이전

1831년 뉴욕주 올버니에서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으로 태어났다. 그랜트, 셔먼과 같은 오하이오주에서 성장했고, 평범한 가게 점원으로 일하다가 손님이던 토머스 리치 하원의원에 의해 1848년 미국육군사관학교 추천장을 받았다. 셰리든은 동기생 한 명과의 갈등으로 인해 1년 동안 정학당했고, 1853년 졸업생 52명 중 34등으로 졸업했다. 졸업 이후에는 텍사스, 캘리포니아를 거쳐 주로 북서쪽 변방에서 경력을 쌓다가 섬터 요새 전투 직후 전쟁 대비 과정에서 대위까지 승진했다.

2.2. 남북전쟁

노예해방선언 소동으로 북군의 서부 방면 사령관 존 C. 프리몬트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 의해 경질된 가운데, 셰리든은 프리몬트의 사치와 무능을 뒷처리하는 과정에서 유능한 면모를 보여 프리몬트의 후임 사령관 헨리 할렉의 신임을 받았다. 이후 윌리엄 테쿰세 셔먼과도 면식이 생긴 셰리든은 기병 경력이 없었음에도 1862년 제2 미시간 기병연대의 연대장이 되었고, 남군을 상대로 맹활약하여 사단장 윌리엄 로즈크랜스 등의 추천으로 준장까지 승진했다. 사단장이 된 셰리든은 돈 카를로스 뷰얼, 윌리엄 로즈크랜스 휘하에서 서부전선의 주요 전투들인 페리빌, 스톤스 리버, 털라호마 전역, 치카모가 전투에 참전했다. 이어진 채터누가 전역에서는 미셔너리 릿지 전투에서 조지 H. 토머스 휘하 컴벌랜드군이 예상치 못하게 남군 진지 돌파에 성공했을 때 최일선에 서며 공을 세웠다.

채터누가에서 셰리든을 눈여겨본 그랜트는 총사령관으로 승진, 동부로 이동하면서 기병대 지휘관으로 셰리든을 데려갔다. 셰리든은 오버랜드 전역 초기에는 조지 미드 포토맥군 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전통적인 정찰 및 아군 보조 임무를 맡았으나, 이에 불만을 품고 그랜트를 설득하여 아군 보병의 위치를 벗어나 보다 폭넓게 움직일 권한을 얻었다. 오버랜드 전역에서 셰리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데, 옐로 터번 전투에서 젭 스튜어트를 전사시키는 등 눈에 띄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다른 전투의 성과는 이에 미치지 못했고, 게티즈버그에서의 스튜어트처럼 아군 기병대가 필요한 순간에 아군과 떨어져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피터스버그 포위전에서 그랜트에게 발이 묶인 남군의 로버트 E. 리는 북군 지원군을 견제하고 워싱턴 D.C.를 위협하기 위해 주발 얼리에게 셰넌도어 계곡을 따라 북부를 침공하도록 했다. 얼리가 워싱턴 DC까지 올라오는 등 계속 후방을 위협하자, 그랜트는 얼리를 저지할 적극적으로 싸우는 지휘관으로 셰리든을 선택했다. 1864년 9월 셰리든은 얼리를 상대로 제3차 윈체스터 전투, 피셔스 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셰넌도어 계곡으로 밀고올라가 주변 농경지와 생산 시설을 초토화하기 시작했다. 10월 시더 크릭 전투에서 얼리는 셰리든이 자리를 비운 동안 기습에 성공하여 북군 절반을 와해시켰지만, 굶주림에 시달린 얼리의 남군은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약탈에 열중했다. 셰리든은 급하게 말을 타고 전장으로 돌아와 패잔병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하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 워싱턴에 대한 위협을 끝장낸 이 결정적인 전투의 승리에는 셰리든의 개인적인 카리스마가 크게 작용했다고 평가되었다. 이후 셰리든은 기병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로버트 E. 리의 북버지니아군을 추격하고 퇴로를 막아 항복시키며 전쟁을 끝내는 데 기여했다.

2.3. 남북전쟁 이후

남북전쟁 종전 직후에는 나폴레옹 3세의 괴뢰정권 멕시코 제2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서남부에 배치되었다. 앤드루 존슨 대통령 임기 동안에는 텍사스루이지애나에서 중요한 군정을 맡았고, 엄격한 군정으로 남부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서부 미주리 군관구를 맡고 있던 윈필드 S. 핸콕과 임무를 맞교대하여 서부에서 인디언 전쟁을 책임지게 되었다.

셰리든은 분산되어 있던 군관구 전력을 집중시켜 약탈에 대응하고 원주민들을 보호구로 강제로 몰아넣었으며 거부하는 이들을 사살했다. 수백만 들소들을 조직적으로 사냥하는 등 셰넌도어 계곡에서와 같이 초토화 전술을 구사하여 원주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셰리든은 1870년대, 1880년대 초까지 10년 이상 인디언 전쟁의 최고 책임자였고, 이 과정에서 리틀 빅혼 전투에서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휘하 제7기병연대가 전멸하기도 했다.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셰리든은 이를 끝까지 부정했다. 결국 1880년대 후반 이후로는 원주민들의 조직적인 저항이 매우 약해졌다.

옐로스톤 국립공원 지역의 보호와 국립공원 설립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옐로스톤 내부로 철도 노선을 건설하려는 사업가들에 맞서 적극적으로 로비를 펼쳤고, 결국 셰리든은 국립공원 보호를 위해 요구한 거의 모든 조건을 얻어 냈다. 셰리든이 국립공원 보호를 위해 옐로스톤에 파견한 제1기병연대는 이후 1918년까지 수십 년 동안 공원을 관리했다.

그랜트와 셔먼의 최측근이었던 셰리든은 1869년 중장 계급장을 달았고, 1870년에는 그랜트의 허가를 받아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손님으로서 보불전쟁을 참관하기도 했다. 1883년 셔먼의 은퇴 뒤 미육군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여러 차례의 심장 발작 끝에 셔먼보다도 이른 1888년 사망했다. 셰리든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 의회는 황급히 셰리든이 죽기 직전 'General of the Army' 계급을 수여했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 해당 계급이 수여된 마지막 사례였다.

3. 여담

165cm로 키가 작은 것으로 유명해 별명부터가 'Little Phil'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마른 몸매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살이 많이 붙어 200파운드(약 90kg)를 넘겼고, 그가 오래 살지 못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미국 육군이 개발한 M551 셰리든 경전차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 1888년 죽기 직전 받았다. 당시에는 대장 계급이 없어서 4성 장군으로 취급되었으나, 2차대전 당시 생긴 5성 원수 계급과 명칭이 동일하기 때문에 현대에는 일반적으로 같은 원수 계급으로 취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