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0:36:23

인디언 전쟁

American Indian Wars

1. 개요2. 전개
2.1. 백인과 원주민의 갈등2.2. 원주민 부족 간 갈등
3. 도덕적 정당화4. 과거 청산5. 해외에서의 평가6. 대중매체에서7. 전쟁의 개요8. 관련인물

1. 개요

1609년부터 1924년까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북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과 미국을 포함한 유럽발 백인 식민국가들 사이의 무력 충돌을 통틀어 일컫는 말.

좁은 의미론 아메리카 중 주로 미국령에서 벌어진 전쟁을 말한다. 캐나다,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같은 여타 미주 국가들에서도 원주민과 때론 다투고 땅을 빼앗아 쫓아내고 살해하고 억압하는 일이 있었지만 대체로 미국보다는 온건하게 접근해 원주민들을 동화시키고 굴복시킨 반면 미국에서는 가장 격렬한 다툼과 학살이 있었다.[1]

2. 전개

2.1. 백인과 원주민의 갈등

초기에는 영국에서 북아메리카로 이주해온 식민지 개척자들과 원주민들 사이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가 대부분이었지만 점차 식민지 개척지가 늘어나고 영토 확장이 일어나면서 점점 대규모로 치닫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백인들이 처음 왔을 때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태초 그대로의 신대륙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북미에는 1000만명[2] 정도의 인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중남미엔 아즈텍 제국, 잉카 제국, 마야 문명 같은 대규모 문명이 발달해 있었다.

북아메리카 정착 초기부터 대립은 시작되었다. 극초기에는 정착에 필요한 기술 없이 건너온 정착민들이 원주민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추수감사절 같은 모양새도 나오기도 했으나 원주민들의 도움 없이도 정착이 가능해지자 자신들의 정착을 도왔던 부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인디언 전쟁의 극초기를 장식하는 피쿼트 전쟁의 피쿼트족과 필립왕 전쟁의 왐파노아그족이 없었더라면 메이플라워와 필그림의 존재는 제임스타운과 같이 역사 속에서만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착민들은 이 두 부족을 모두 절멸에 가까이 몰아넣고 뉴잉글랜드 지역을 독차지한다.

이후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원주민들이 영국의 협력을 받은 것을 계기로 백인과 원주민의 충돌은 줄어든다. 또한 영국이 전쟁 이후에는 원주민과의 쓸데없는 싸움을 막기 위해 식민지인(=미국인)들의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로의 진출을 금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중에 미국인이 될 이 식민지인들은 영국 정부의 서부 진출 금지에 반발이 강했고, 이 금지조치를 위배하는 사례가 적지 않아서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 독립전쟁 끝에 미국이 독립하자, 영국 식민지 시절과는 달리 서부 진출 금지가 풀리게 되었고 이는 원주민들에게 재앙이 되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 시절부터는 미국 정부가 백인 이주자들을 위해 원주민들을 보호구역에 가두는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고 골드러시와 서부개척 붐이 일어나면서 미국은 점점 서쪽으로 팽창해 갔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북미 서부에 사는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부를 수 밖에 없었다. 서부로 점점 유럽인들이 몰려옴에 따라 원주민들은 이에 거세게 맞섰으며 지역 민병대, 미 연방군과 싸웠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열세를 보이고 있었고 결국 "인디언 보호구역"에 보호를 명목으로 한 감금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미국인과 원주민간의 전쟁은 주로 남서부 히스패닉계 주민과 부족간의 싸움이 많았는데 이들은 수백 년간 원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필립 셰리든[3]이 주장한 들소떼 박멸을 통한 청야전술이 큰 효과를 거두었다는 설이 있다.

원주민들은 동부에서 서부로 밀려드는 개척자들, 오랜 원한 관계를 가졌던 멕시코인들의 압박에 밀려 거주지가 줄어들었기에 계속 반발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물론 전쟁 중에 원주민들이 승리한 경우도 있었으나 결정적이지는 못했다.

1890년의 운디드니 학살사건 이후 사실상 "인디언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소규모의 전투가 가끔 벌어졌다. 미국 역사상 공식적인 최후의 교전은 1918년 1월 9일에 있었던 베어 밸리 전투지만, 이건 사실상 멕시코 원주민과 미군의 국경분쟁에 가까우므로 인디언 전쟁으로 분류하기 애매하다. 실질적인 최후의 인디언 전쟁은 1898년 10월 5일 미네소타에서 미군 3보병연대와 오지브웨이족 사이에 벌어진 슈거포인트 전투인데 이 전투는 원주민 사상자 없이 미군만 80명 중 전사자 7명[4]에 부상자 19명을 냈고, 전사자 중에는 지휘관인 M. 윌킨슨 명예소령이 포함되어 있어 미군의 완패로 간주된다. 다만 전투 직후에 인디언 측에서 곧바로 "일부 범법자들의 무도한 행동일 뿐이며, 우리는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일부 백인들의 무도한 행위가 우리를 괴롭게 하고 있으니 시정해주면 좋겠다"는 일부 드립을 발표하면서 양측이 합의에 나서 그럭저럭 사태가 봉합됐다. 이 지역이 수십 년 동안 전투 없이 평화를 유지한 지역이라 그나마 빠른 합의가 이루어졌을지도.

북미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구는 한때 1천만 명을 넘었다, 2천만 명이 넘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중남미에서 전파된 구대륙 전염병으로 수많은 부락과 성읍국가들이 붕괴되고 농업사회가 큰 타격을 받아 수렵채집 위주의 구석기적 사회로 후퇴했고, 직접적 침략자인 유럽인들이 도착했을 당시엔 몇백만 명 수준을 넘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 엄청난 인구가 "인디언 전쟁"이 끝났을 때 수십만 명으로 줄었다. 현재는 상당부분 회복하긴 했으나(250만 명) 아직도 그 전의 인구수를 넘지 못하고 있다. 원주민 인구 감소의 직접적인 원인은 전쟁으로 인한 사망, 식량부족으로 인한 사망보다 백인들에게 전염병이 옮은 탓이 크다. 물론 전염병에 대한 저항력은 식량 부족에 따른 건강악화나 전쟁 같은 상황에 따른 스트레스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이들은 20세기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야만적인 족속으로 헐리우드 영화에 그려져서 두 번 죽는 비극을 겪었다.

2.2. 원주민 부족 간 갈등

얼핏 보면 원주민과 백인 간의 전쟁으로 단순화시킬 수도 있지만 내막을 살펴보면 상당히 복잡하다.[5] 우선 스페인의 남아메리카 진출 때와 비슷하게 신속하게 퍼져나간 전염병이 정작 유럽인들의 진출보다 더 많은 인구를 줄인 것이 있기 때문이다. 또 미국 정부에 협력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공격한다거나 부족 간 분쟁을 중재하려고 파견된 미군 병력이 공격 측과 싸움이 붙어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됐다든가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부족 간 갈등은 개척 과정에서 원주민들이 영토를 잃고 밀려나면서 지나치게 좁은 지역에 여러 부족이 밀집되어 생긴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화 "늑대와 춤을"에 등장하는 수족과 포니족의 갈등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천연두 같은 전염병으로 숨진 병사의 담요를 모았다가 원주민에게 선물로 줘서 바이오 테러를 통한 인종청소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

3. 도덕적 정당화

인디언 전쟁은 백인 식민지 개척자들이 원주민들을 자신들과 같은 존엄성을 지녔다고 인정하지 않은데서 출발한 전쟁이기도 했다. 사실 모든 인류가 같은 존엄성을 지녔다고 인정받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만민 평등 선언이 UN 출범 후에 나왔고,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미성년자의 법적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면 그들에게 가축과 같은 법적 권리를 주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미성년자들에게 가장 호의적인 의견이었다. 이 시기에는 백인의 의무명백한 운명과 같은 담론이 줄을 잇던 시기였으니, 이 시기 미국에서 말하는 인권과 자유라는 것은 백인 성인 남성의 특권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백인들은 분명 원주민들(더 나아가 모든 유색인종)을 인간으로 인식했다. 스페인은 일찍이 자국령 내의 원주민들을 신민으로 받아들였으며, 미국의 남북전쟁은 노예제에 대한 도덕적 회의감 역시도 분명 주요한 원인이었다. 무엇보다도 유색인종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선교사들이 세례 좀 주겠다고 온갖 개고생을 하며 오지로 달려갈 이유가 없다. 바야돌리드 논쟁을 계기로 인디언을 비롯한 아메리카인들도 일단 인간으로서 인식되었고, 이 때문에 대규모로 노예화되어 가축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던 흑인들과는 달리 인디언들은 노예화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원칙에 불과했고, 당시 대다수의 백인 소시민들은 원주민과 흑인들이 자신들과 동일한 존엄성을 지녔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특히 남북전쟁 당시 노예화 폐지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계층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남부 상류층이 아니라, 노예를 부릴 꿈도 못 꾸었던 가난한 백인 자영농들이었을 만큼 우월의식이 극히 투철했다.

게다가 종교 문제도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앙은 기독교를 믿는 이주민들에게는 개종시켜야 할 이교도일 뿐이었고,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이들은 사람 취급을 안 했는데 이런 태도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원주민들과 직접 접촉을 했던 군인들 사이에서는 원주민과의 평화 공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극소수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 목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경향이 약해서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 에드워드 윈쿱 소령은 샤이엔 부족과 관계개선을 이루었다. 하지만 감리교 목사이기도 했던 존 밀튼 시빙턴 대령은 해당 부족이 잠을 자고 있을때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기습하여, 133명을 학살하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인디언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 부족에는 남자들은 대부분 사냥을 떠나고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을 중심으로 600여명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이중 30명 미만만이 성인 남자이고 나머지는 모두 여자와 어린이들이었다. 당시 머물던 부족 중에는 우호의 상징으로 성조기를 걸어놓은 천막도 있었는데, 사격이 시작되자 이 천막으로 도망간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천막에도 사격이 가해졌기 때문에 나머지는 모두 쏟아지는 총알을 피해서 도망쳤다. 이것이 샌드크리크 대학살 사건이다. 시빙턴은 부녀자와 아이들만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알을 그대로 두면 이가 되는 법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이 사건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 사건은 시빙턴 대령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당 사건을 증언했던 3명의 군인들에 의해서 비교적 조기에 밝혀졌기 때문에 운디드니 학살사건처럼 전투로 취급받아서 참여자에게 훈장이 내려지는 일은 없었는데, 대신 증언자 중 한명인 사일러스 소울 대위가 후일 시빙턴의 추종자 백인의 총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감리교회는 1996년에야 시빙턴의 만행을 참회하는 발표를 했다.
  • 남북전쟁에도 북군으로 참전했던[6] 이로쿼이 부족민이 있었다. 미국식 이름 엘리 파커, 하지만 인디언 국장으로 있으면서 세네카 부족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받은 이름 도네호가와(Donehogawa, 서쪽문의 수호자)로 더 유명했던 인물이다. 도네호가와는 그랜트 대통령 때 원주민 부족의 개혁과 관계개선을 위해서 노력했으나, 기존 종교를 용인했다는 이유 때문에 탄핵되었다. 특히 지역 선교사 윌리엄 웰시는 도네호가와의 파면을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고 이것이 성과를 이루면서 다시 백인과 원주민의 관계는 다시 깨지고 말았다.

4. 과거 청산

20세기 중반부터 인디언 전쟁에 대해 미국 내에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미국 의회에서도 전쟁을 일으켜 원주민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 사과하자는 결의안이 제출되기도 했다.

2010년 5월 20일에는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공화당)이 과거 미국 정부에 대항해 싸우다 숨진 많은 원주민 부족 지도자들이 묻혀있는 워싱턴 D.C.의 의회묘지에서 체로키, 촉토, 무스코지, 포니, 시스턴 와페톤 오야테족 등 5개 부족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행사에 참석, 과거 원주민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 및 폭력행위 등에 대해 포괄적으로 사과하고, 원주민들에 대한 정책상의 잘못으로 그들이 현재 보호구역내에서 빈곤과 폭력사태에 직면하고 있는데 대해서도 유감을 표시하며 그들의 권익향상과 복지증진을 위한 미 정부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낭독하기도 했다.

5. 해외에서의 평가

반미를 국가의 모토로 삼은 북한에서도 미국의 인디언 학살 및 문제를 두고 미국을 열심히 까는 프로파간다로 사용하고 있다. 웃기게도 미국은 열심히 까면서 비슷하게 원주민 말살에 일조한 캐나다, 스페인은 따로 뭐라 하지 않는다. 아래는 북한에서 작성된 미국의 원주민 말살정책 관련 기사다.
인류말살-악의 제국의 《천부적사명》

국가라고 하면 그 땅에 대대손손 태를 묻고 살아온 민족이 있어야 한다. 세계에 다민족국가가 많은것은 국가가 생겨나기 썩 이전부터 여러 민족, 인종들사이의 래왕과 접촉을 통하여 서로 한 나라 지경에서 어울려 사는것을 응당한것으로 여기게 된 력사적융합과정을 떠나 설명할수 없다.

그러나 지구상에 단 하나 국가 아닌 국가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수수천년 저들고유의 문화를 창조하며 평화롭게 살아온 아메리카대륙 원주민들의 시체더미우에 생겨난 악의 제국 미국이다.

1776년에 공표된 미국독립선언의 서문에는 《모든 인간은 태여나면서부터 평등하며 생명, 자유 및 행복의 추구에 대한 빼앗길수 없는 천부적권리를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문구가 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선언서에 서명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념두에 둔 《인간》이라는 범주에는 그 땅의 주인인 인디안들과 아프리카로부터 쇠고랑에 묶이워 끌려온 흑인노예들은 포함되여있지 않았다.

그것은 본래 유럽에서 《국경》, 《경계》라는 뜻으로 쓰이던 《frontier》라는 단어가 미국에서는 서부에로의 령토팽창과정에 《문명과 야만의 경계》, 《미개척지》를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새롭게 확대된 하나의 사실만 놓고보아도 잘 알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인 인디안들은 사람이 아니였으며 그들이 살고있는 땅은 동물들이 서식하는 《무인지대》나 다름없었던것이다.

건국》초기 미국의 대통령들은 초대대통령 워싱톤으로부터 시작하여 서부에로의 령토팽창을 그 무슨 《천부적사명》으로 미화분식하면서 인디안살륙을 국시로 삼고 그 《무공》으로 대통령자리에 올라앉은 반인륜범죄자들이였다.

1818년 당시 국무장관이였던 제6대 대통령 죤 퀸씨 아담즈는 《무지막지한 인디안검둥이무리를 다루는데는 테로가 아주 효과적이다.》고 뇌까리면서 인디안살륙에 열을 올렸고 악명높은 인디안《사냥군》이였던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은 집권 후 《인디안제거법》(1830년)이라는 잔혹한 인종차별법안에 서명하여 인디안들에 대한 집단강제수용을 법제화하였다.

이리하여 17세기초 미국서남부 제임스타운에 백인들의 첫 식민지가 선이래 전체 토착종족의 85%에 해당하는 800만~1 000만명의 인디안들이 짐승무리나 다름없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다가 집단적으로 도살되였으며 살아남은 인디안들마저도 강제수용소나 다름없는 《원주민보호구》들에 갇히워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속에 가혹한 노예로동으로 절망의 나락에 굴러떨어져 서서히 절멸되여갔다.

미국은 엄연한 학살만행을 그 무슨 인디안과의 《전쟁》처럼 묘사하고있지만 화력무기로 무장한 미륙군기병대와 무기래야 원시적인 창이 고작이였던 인디안들과의 전쟁이란 어불성설이며 그것은 철저한 인디안대살륙전이였다.

더우기 1787년 미국헌법이 발표될 당시 단 한개의 련대밖에 없었던 륙군무력이 1791년에는 3개 련대로, 1808년에는 11개 련대로 급속히 늘어난 리유가 다름아닌 인디안대학살을 위해서였다는 엄연한 력사적사실을 무엇으로 변명하겠는가.

지금도 미국이 18~19세기 인디안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행위가 자랑스러운 전통이라도 되는듯이 《코망쉬》, 《카이오와 워리어》 등 저들이 멸종시킨 인디안종족들의 이름을 직승기에 달아주고있는 사실 하나만 놓고보아도 인디안대학살에 대한 미국의 력사인식이 얼마나 외곡되여있으며 미국이라는 나라의 인권관이 얼마나 후안무치하고 배타적이며 반인륜적인가를 잘 알수 있다.

하물며 미국의 인디안대학살은 인류가 아직 미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던 아득한 옛이야기가 아니다.

생각해보라. 제23대 대통령 벤쟈민 해리슨이 북아메리카원주민의 마지막집단을 카나다국경가까이까지 몰아가 전멸시키고 《서부개척》의 종결을 선언한 운디드 니에서의 대참살나치스도이췰란드유태인대학살이 있기 불과 40여년전인 1890년의 일이였다. 결국 앵글로색손족들에 의한 인디안멸족의 전례가 아리아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히틀러도이췰란드의 타민족대학살을 고무추동하였다고 볼수 있다.
2016년 8월 16일 《로동신문》

하필이면 로동신문(…)에 기고된 글이라 설득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타탕카 이요탕카 문서의 연설문에 나와있듯 앞부분 일부는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원주민들이 무슨 원시부족마냥 창이나 들고 싸웠다던지, 원주민 부족 이름을 자국군 헬리콥터 이름으로 지어주는 전통이 뒤틀린 역사관이라느니 하는 어처구니 없는 개소리들로 글을 마무리지었다. 원주민들은 창은 커녕 당시 미 육군에서도 예산 때문에 별로 보급이 안되었던 최신식 헨리 소총으로 몇차례 큰 승리를 얻기도 했고[7], 헬리콥터에 원주민 부족 명칭을 붙이는 것은 과거 자신들과 용맹하게 자웅을 겨룬 원주민 전사들을 기리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치범 수용소 등으로 타민족도 아닌 자국민을 학살, 탄압하는 북한 정권은 이런 일침을 날릴 자격이 없다.

6. 대중매체에서

외계인 침공을 주제로 한 토론에서 스페인 콩키스타도르와 같이 북미 원주민 학살이 많이 언급된다. 즉 백인은 외계인, 북미 원주민은 지구인 이런식으로 자주 비유가 되곤 한다. 반대로 아바타처럼 인간에게 침략당하는 외계인을 원주민에 비유하는 영화도 있다. 아바타의 경우는 나비족 족장 에이투칸 역으로 실제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 배우인 웨스 스투디[8]를 기용했다.

디 브라운의 책인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인디언 전쟁 말기를 조명한 책이며 같은 시기를 다룬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Nightwish의 Creek Mary's Blood라는 노래가 인디언 전쟁을 다루고 있다.

7. 전쟁의 개요

  • 미시시피강 동부의 인디언 전쟁(1775-1842)
    • 치카마우가 전쟁(1776-1794)
    • 북서 인디언 전쟁(1785-1795)
    • 테캄세 전쟁(1811)
    • 크리크 전쟁(1813-1814)
    • 제1차 세미놀 전쟁(1817-1818)
    • 블랙호크 전쟁(1832)
    • 제2차 세미놀 전쟁(1835-1842)

8. 관련인물



[1] 단 평화적으로 미국 영토에 편입됐던 알래스카의 틀링깃족과 아트나족은 미국 정부가 현지 원주민의 거주권을 인정하면서 갈등과 충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사실 알래스카 개척민 인구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충돌도 적었다고 보면 된다.[2] 이것은 콜럼버스의 교환 이전의 인구이다. 본격적으로 유럽인과 접촉하기 전에도 이미 중남미에서 올라온 구대륙 전염병의 전파로 200만명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북미 곳곳에서 대규모 정착지의 붕괴가 보편적으로 일어나곤 했다.[3]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라는 말로 유명한 인물이다.[4] 1명은 오인사격으로 사망한 인디언 경찰관이었다.[5] ‘원주민’이라는 큰 틀로 묶고 있지만 사실 19세기 말 기준으로 2천 개가 넘는 부족들이 캐나다를 제외한 북아메리카에 존재했었다. 부족 하나 하나 고유 문화와 전통, 서로 다른 언어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서로를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6] 로버트 리 남군 장군이 항복할 때, 그 문서를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7]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인디언 전쟁이 시작될때부터 이미 머스킷 총기를 받아들인 민족들이다. 헨리 소총이나 스펜서 소총 등 고가의 연발총을 구입할 여력이 없는 전사들도 최소한 퍼커션 캡 라이플이나 플린트락 머스킷을 들고 싸웠지, 창을 들고 싸우진 않았다.[8]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출연한 영화중에서는 스트리트 파이터(영화)의 사가트라고 하면 가장 알기 쉬울 것이다. 라스트 모히칸이나 히트 등 좋은 영화에도 출연하긴 했지만[9] 인디언을 가장 극혐하고 증오하며 멸시한 미국 대통령으로 유명하다. 단순히 전염병으로 죽은게 아니라 직접 총칼로 인디언들을 죽인 적도 있다. 후대에 들어서 미국인의 생활 터전을 만들고 삶을 윤택하고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미국 역사학자들의 평도 많아 이 부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10] 카토바족[11] 수우족[12] 다코타족. 오지브웨족 혼혈이라는 설도 있다.[13] 쇼니족. 흔히 인디언 전쟁이라고 하면 이 인물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