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4:17:18

덕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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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35호 36호[1]
영동 부용리 고분 제천 덕주산성 중원 누암리 고분군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35호
제천 덕주산성
堤川 德周山城 | Deokjusanseong Fortress
<colbgcolor=#6f448c><colcolor=#fff> 소재지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638 산 46-1, 123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수량 / 면적 일곽
지정연도 1983년 3월 30일
건축시기 통일신라[2]
파일:제천시의 덕주산성.jpg
<colbgcolor=#344c3c> 덕주산성

1. 개요2. 내용3. 관련 유적4. 외부 링크5.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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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덕주산성의 우쪽.jpg
<colbgcolor=#344c3c> 덕주산성

덕주산성은 대한민국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 한수면에 있는 통일신라에 세워진 산성이다.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35호1983년 3월 30일에 지정된 제천시의 문화재이다.

2. 내용

파일:덕주산성 현판.jpg
<colbgcolor=#344c3c> 덕주산성의 현판
덕주산성은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의 막내아들 덕지(德摯) 왕자(또는 덕주 공주[3])가 형인 마의태자와 함께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마애불이 있는 이곳에 머물러 덕주사를 세우고 후일을 기약하며 쌓은 성이라고 전해오며 금강산으로 떠난 형 마의태자를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는 전설이 전한다. 덕주산성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증축된 흔적이 있어 한국의 전통 성곽 연구에 도움이 된다. 성은 석축과 토축의 혼합 형식으로,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 동문, 북문 등이 남아 있다. 덕주산성은 문경시충주시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 요새지로서 차단성의 기능을 가졌다고 할 수 있으며, 월악산 산마루와 그 지맥을 둘러싸고 내성과 외성을 갖춘 나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인 성곽과는 달리 계곡을 성으로 쌓고 그밖에는 험준한 능선과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성벽은 2 m 높이로 쌓았다. 계곡 주변 계곡의 풍경이 아름답다.

전해오는 얘기론 몽골의 침입 당시인 1256년 4월에 몽고군충주를 침략하여 충주성을 제압하고 충주산성을 공격하여 관리와 주민들은 두려워서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덕주산성으로 피난하였는데 몽고군이 추격하며 공격을 가하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고 비바람과 번개, 벼락이 함께 들이쳤다는 전설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중종 때 내성을 축성하고, 임진왜란 당시에도 차단성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 말 명성황후흥선대원군과의 권력 암투에서 패배할 것을 상정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3. 관련 유적

충북, 대전 일대는 소위 중원지역이라고 지칭되며 삼국시대 5-6세기의 각축장이었던 만큼 관방시설이 굉장히 많다. 중원지역의 삼국시대 산성들이 실제로 유네스코에 등재될 가능성은 낮지만 중부내륙 산성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등재 목록에 포함되었다.

4. 외부 링크

5.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35호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35호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있다.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에 차단성의 기능을 지닌 이 성은 고려 고종 43년(1256)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또 조선 말기에는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상정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둘레가 32670척(9800m)에 이르렀던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동문·북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고,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다. 덕주골 입구에 있는 동문은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외 5겹의 성벽이 있는데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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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원 누암리 고분군은 2005년 3월 25일에 사적 제463호로 승격되면서 충청북도 기념물에서 해지되었다.[2] 문화재청은 제천 덕주산성의 축조연대를 밝히지 않았다.[3] 덕주공주는 전설에만 나오는 인물로, 속설로는 마의태자가 신라부흥운동을 위하여 떠나기 전 누이 덕주공주와 혼인 결합하여 금나라의 시조 완안함보낳았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