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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1BEE7><colcolor=#000> 독일 제국 프리드리히 3세의 황후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Victoria, Princess Royal | ||
이름 | 영어 | 빅토리아 애들레이드 메리 루이자 (Victoria Adelaide Mary Louisa) |
독일어 | 빅토리아 아델하이트 마리아 루이제 (Viktoria Adelheid Maria Luise) | |
출생 | 1840년 11월 21일 | |
영국 런던 버킹엄 궁전 | ||
사망 | 1901년 8월 5일 (향년 60세) | |
독일국 헤센 대공국 프리드리히쇼프 성 | ||
장례식 | 1901년 8월 13일 | |
독일국 포츠담 평화 교회 | ||
배우자 | 프리드리히 3세 (1858년 결혼 / 1888년 사망) | |
자녀 | 빌헬름 2세, 샤를로테, 하인리히, 지기스문트, 빅토리아, 발데마르, 조피, 마르가레테 | |
아버지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 |
어머니 | 빅토리아 여왕 | |
형제 | 에드워드 7세, 앨리스, 앨프리드, 헬레나, 루이즈, 아서, 레오폴드, 베아트리스 | |
종교 | 성공회 | |
서명 |
초상화 |
[clearfix]
1. 개요
영국의 공주이자 독일 제국의 황후.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맏이이다.2. 작위
문장 |
- 빅토리아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Victoria (1840년 11월 21일 ~ 1841년 11월 10일)
- 프린세스 로열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Royal (1841년 11월 10일 ~ 1858년 1월 25일)
- 프로이센의 왕자비 전하 Ihre Königliche Hoheit Prinzessin Victoria von Preußen (1858년 1월 25일 ~ 1861년 1월 2일)
- 프로이센의 왕세자비 전하 Ihre Königliche Hoheit Kronprinzessin Victoria von Preußen (1861년 1월 2일 ~ 1871년 1월 18일)
- 독일의 황태자비, 프로이센의 왕세자비 전하 Ihre Kaiserliche und Königliche Hoheit Kronprinzessin Victoria des Deutschen Reiches und von Preußen (1871년 1월 18일 ~ 1888년 3월 9일)
- 독일의 황후, 프로이센의 왕비 폐하 Ihre Majestät Kaiserin Victoria, Deutsche Kaiserin und Königin von Preußen (1888년 3월 9일 ~ 1888년 7월 15일)
- 프리드리히 황태후 Kaiserin Friedrich (1888년 7월 15일 ~ 1901년 8월 5일)
3. 생애
3.1. 영국의 첫째 공주
1842년 | 1855년 |
즉위하기 전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빅토리아 여왕은 첫딸의 교육에 총력을 기울였다. 똑똑했던 빅토리아 공주는 겨우 18개월 때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4살부터 독일어를 배웠으며, 그 외에도 그리스어와 라틴어 및 수학, 지리학, 역사학, 정치학, 철학 등의 수업을 받았다. 이렇게 엄격한 수업 일정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공주는 남동생 에드워드 왕자와는 달리 항상 모범적이고 완벽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빅토리아 공주는 형제들 중 가장 총명했고, 당대의 지성인 중 하나였으며, 특히 아버지 앨버트 공의 사상을 물려받아 자유주의를 지지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부부는 빅토리아 공주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항상 아쉬워했다. 여자의 승계권은 인정하지만 같은 부 또는 모 슬하의 친형제자매끼리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선권을 가지는 당시 영국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라,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이자 장남인 남동생 에드워드 7세가 누나 빅토리아 공주를 제치고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1] 영국 왕실에서 남녀 구별 없이 직계 연장자 우선으로 계승 순서를 정하게 된 것은 2015년부터이다.
3.2. 결혼과 육아
빅토리아 여왕은 딸을 항상 곁에 두고 외국에 시집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외교관계를 고려한 앨버트 공의 의향으로 프로이센 왕국과의 혼약이 체결되었다. 1858년 1월 25일, 빅토리아 공주는 빌헬름 왕태제의 장남인 프리드리히 왕자와 결혼했다.[2]훗날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공주도 아버지 앨버트 공의 뜻으로 독일 헤센 대공국의 루트비히 4세에게 시집갔다. 앨버트 공이 사망한 이후 빅토리아 여왕은 더 이상 딸들을 외국에 시집보내지 않으려 했고, 3녀 헬레나 공주, 4녀 루이즈 공주, 5녀 베아트리스 공주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결혼한 후에도 영국에서 거주했다.
1862년의 가족 초상화.[3] | 1874년의 가족사진. |
부부간에 금슬은 매우 좋았고, 4남 4녀를 낳았다. 프리드리히 3세 또한 아내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자였기에, 결혼 생활은 행복한 편이었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8명의 자녀 중 맏이가 훗날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빌헬름 2세다.
3.3. 가정 내의 불화
그러나 상대적으로 가부장적인 프로이센에서 똑똑한 자유주의자인 빅토리아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특히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의 정치적 대립이 심각했다. 거기에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여자의 미덕이라고 생각한 시어머니 아우구스타 황후는 총명한 며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급기야 빅토리아가 본인의 장남이자 아우구스타의 장손인 빌헬름 2세를 장애가 있는 왼쪽 팔을 치료한답시고 학대하다시피 하자 보다 못해서, 손자를 며느리에게서 데려와 자신이 직접 양육했고 할머니의 품에서 자란 빌헬름 2세는 부모의 성향과는 반대되는 군국주의자가 되었다. 사실 가정 내 불화의 원인은 빅토리아와 프리드리히 부부가 부모로서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이런 빌헬름 2세와 빅토리아 모자의 불화는 당대에도 유명했다. 맏아들인 빌헬름 2세는 어머니를 반쯤 영국의 스파이로 여겼다. 심지어 간혹 ‘어머니’ 혹은 ‘모후’라는 호칭 대신 ‘그 (영국) 여자’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자마자 어머니 빅토리아가 영국 왕실의 일원들과 가족 서신이라는 명분 하에 주고 받은 반역적인 편지와 서류들을 찾아내겠다며 어머니의 처소를 폐쇄해 버리고 개인 서신까지 전부 검열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례 중 하나이다.
다만 빌헬름 2세와 빅토리아 모자의 불화는 빌헬름이 패륜아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빅토리아가 자초한 것이 매우 컸다. 빅토리아는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상상 이상으로 엄격했던 스파르타식 육아법을 그대로 따랐는데, 빅토리아 본인이야 매우 명석하고 성실했기에 어머니의 교육을 잘 따라갈 수 있었지만[4] 그녀의 자녀들에게는 아니었다. 빌헬름 2세는 출생 당시 태아의 위치가 거꾸로 된 역아로 태어났는데[5], 태어날 때부터 왼쪽 팔이 15cm 짧은 장애가 있었는데 빅토리아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고, 몸이 불편한 아들을 보듬어주기보다는 냉대하며 학대에 가까운 치료들을 끊임없이 행했다.
당시 빌헬름의 왼쪽 팔이 어머니의 자궁에 걸렸었고[6] 왼쪽 팔을 비틀어서 빼낼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신경을 다치는 바람에 왼팔이 오른팔보다 약 15cm나 짧았다.
빌헬름이 8살 때 빅토리아는 ‘왕위 계승자로서 빌헬름이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이 불편한 아들에게 승마를 강제로 배우게 시켰고, 당연히 빌헬름은 힘들어했다. 몇 번이나 떨어지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다시 제자리에 앉았고, 몇 주 뒤에 겨우 승마를 그럭저럭 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당연히 어린 빌헬름 2세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고, 계속되는 어머니의 냉대에 성격이 비뚤어졌다. 이때 받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훗날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에게 “제발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빅토리아의 비정함은 장남 빌헬름 2세뿐만 아니라 다른 자식들인 샤를로테 공주와 하인리히 왕자와도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고, 결국 그들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이는 빅토리아와 갈등을 빚는 시부모 빌헬름 1세와 아우구스타가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의 자녀들 중 빌헬름 2세, 샤를로테, 하인리히를 예뻐하고 나머지 아래 세 손녀들인 조피, 빅토리아, 마르가레테는 냉대해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게다가 아내와 자식들 간의 갈등을 중재해야 하는 프리드리히 3세[7] 역시 아버지로서 막장이었는데, 공처가라서 무책임하게 아내의 편만 들면서 갈등의 봉합은커녕 자식들의 상처만 더욱 커지게 했다. 결국 ‘아버지가 나약해서 어머니에게 휘둘린다’는 빌헬름 2세의 의심은 완전한 망상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또한 프린세스 로열이라는 높은 신분과 친정의 위세 역시 빅토리아의 프로이센 궁정 생활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일부 프로이센 귀족들은 ‘영국이 빅토리아를 통해 내정간섭을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앞서 언급된 비스마르크는 물론이고 아들인 빌헬름 2세마저 공유했던 의견이었다.
실제로 빅토리아는 정치적으로는 시아버지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의 견제에 밀려 딱히 정치적으로는 친영적 행보를 드러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녀들을 키울 때는 철저하게 영국인 가정교사의 손을 빌려 영국식 교육법을 고수하고, 주치의를 선별할 때도 독일인 의사들을 제치고 영국인 의사들을 최우선적으로 신임하는 등, 일상적인 궁정 습관이나 가정 생활에서는 철저히 친영국적이었다. 그나마 영국풍을 선호했던 남편 프리드리히 3세는 아내의 이런 습관들을 나쁘지 않게 여겼지만 독일 국민들 입장에서는 곱게 보일 리가 만무했고, 이런 탓에 빅토리아는 평생 영국 여자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재정적인 면에서도 빅토리아는 독일 궁정에서 푸대접을 받았는데, 왕위계승자였던 시아버지 빌헬름 1세가 형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고 남편 프리드리히 왕자도 정식으로 왕세자가 되어 신분이 완전히 바뀐 뒤에도 연금이 거의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프리드리히와 빅토리아 부부가 연유를 묻자 “전하께는 부자인 황태자비께서 계시니까 연금을 올릴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식의 대답이 돌아왔다고.(...)
이는 아들 부부가 자신과 정치 성향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던 빌헬름 1세가 안 그래도 부유한 그들에게 연금까지 올려주면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에 반하는 정치 세력을 거느리게 될 것을 염려한 노골적인 견제였지만, 빅토리아의 신분과 재력이 독일 정계에서 어느 정도로 위협적이었는지 반증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때문에 빅토리아 황태자비는 황태자의 체통에 맞는 궁정을 운영할 경비가 부족해서 지참금과 개인 재산을 써야 했고, 부부 동반이 당연한 공무 여행에서마저 공금이 안 나와서 제대로 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3.4. 말년
1888년 3월 9일, 시아버지 빌헬름 1세 사후 남편 프리드리히 3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황후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즉위 전부터 심각한 후두암에 걸려 있어서, 빅토리아 황후가 남편 대신 온갖 정무를 처리했다.그런데 프리드리히 3세의 후두암 치료를 둘러싸고 영국과 독일 의료진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영국인 의사 멕켄지 박사가 “후두암이 아니다”라고 진단을 내리는 바람에[8], 프리드리히 3세는 치료 시점을 놓쳐 제대로 된 수술을 받지 못하고 즉위 3개월 만에 사망했다. 이 때문에 1888년은 ‘세 황제의 해(Dreikaiserjahr)’로 불리게 된다.
프리드리히 3세의 오진과 사망 또한 빅토리아의 평판을 더더욱 깎아내리는 데 일조했고, 아들 빌헬름 2세는 이 일로 인해 두고두고 어머니를 원망했다.
영국 의사가 내 아버지를 죽였고, 영국 의사가 내 팔을 불구로 만들었다. 이는 내 어머니의 잘못이다.
빌헬름 2세
빌헬름 2세
말년의 빅토리아 황태후 |
장남 빌헬름 2세의 즉위하면서 황태후가 되었으며, 2년 뒤 시어머니 아우구스타 태황태후가 사망하면서 황실에서 가장 큰 어른이 되었다. 정치 성향이 정반대인 빌헬름 2세가 황제가 된 이후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가 유방암에 걸려 1901년 8월 5일[9] 6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독일 황후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해서, 유언으로 자신의 관을 유니언 잭으로 감싸서 매장해 달라고 했으며, 남편과 같은 영묘에 묻혔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똑똑한 인물이었고 자유주의에 대한 신념도 강했지만 어머니로서는 결국 0점짜리 어머니였고, 한평생 아들과 적대관계가 되고 말았다.
4. 가족 관계
자세한 내용은 호엔촐레른 가문 문서 참고하십시오.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Victoria, Princess Royal) | <colbgcolor=#fff3e4,#331c00>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자 (Prinz Albert von Sachsen-Coburg und Gotha) | <colbgcolor=#ffffe4,#323300>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Herzog Ernst I. von Sachsen-Coburg und Gotha) | |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프리드리히 (Francis Frederick, 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 |||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카롤리네 여백작 (Auguste Caroline Sophie Reuß zu Ebersdorf) | |||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Luise, Prinzessin von Sachsen-Gotha-Altenburg) | |||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아우구스투스 (Herzog August von Sachsen-Gotha-Altenburg)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루이제 샤를로테 여공작 (Luise Charlotte, Herzogin zu Mecklenburg) | |||
빅토리아 여왕 (Queen Victoria) | |||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 |||
조지 3세 (King George III)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Princess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 |||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zessin Victoria von Sachsen-Coburg-Saalfeld) | |||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프리드리히 (Herzog Franz Friedrich von Sachsen-Coburg-Saalfeld) | |||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카롤리네 여백작 (Auguste Caroline Sophie Reuß zu Ebersdorf)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빌헬름 2세 (Kaiser Wilhelm II.) | 1859년 1월 27일 | 1941년 6월 4일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공녀 슬하 6남 1녀[10] |
로이스그라이츠의 헤르미네 로이스 | ||||
1녀 | 작센마이닝겐 공작부인 샤를로테 (Charlotte, Herzogin von Sachsen-Meiningen) | 1860년 7월 24일 | 1919년 10월 1일 | 베른하르트 3세 슬하 1녀 |
2남 | 하인리히 왕자 (Prinz Heinrich von Preußen) | 1862년 8월 14일 | 1929년 4월 20일 | 헤센의 이레네 공녀[11] 슬하 3남 |
3남 | 지기스문트 왕자 (Prinz Sigismund von Preußen) | 1864년 9월 15일 | 1866년 6월 18일 | |
2녀 | 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자비 빅토리아 (Viktoria, Prinzessin Adolf zu Schaumburg-Lippe) | 1866년 4월 12일 | 1929년 11월 13일 | 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자 |
알렉산더 줍코프 | ||||
4남 | 발데마어 왕자 (Prinz Waldemar von Preußen) | 1868년 2월 10일 | 1879년 3월 27일 | |
3녀 | 그리스 왕국의 왕비 소피아 (Βασίλισσα Σοφία της Ελλάδας) | 1870년 6월 14일 | 1932년 1월 13일 | 콘스탄티노스 1세 슬하 3남 3녀[12] |
4녀 | 헤센카셀 방백비 마르가레테 (Margarethe, Landgräfin von Hessen-Kassel) | 1872년 4월 22일 | 1954년 1월 22일 | 프리드리히 카를 슬하 6남 |
5. 여담
-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중 혼례의 합창과 멘델스존의 관현악곡 한여름 밤의 꿈 중 제 5막 알레그로 비바체 C장조를 본인의 결혼식에서 직접 선곡한 뒤로 21세기까지 결혼식 입장과 퇴장에 이 음악을 쓰는 전통이 확립되었다.
- 프로이센으로 시집 간 후에도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수천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갈등 문서에서도 보다시피 이 편지들로 인해 나중에 아들 빌헬름 2세의 주도로 반역적인 편지를 주고받은 혐의로 몰리기도 했다.
- 빅토리아 공주가 18세에 임신하자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끔찍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이는 본인 기준으로 어린 나이인 18세에[13] 결혼하자마자 바로 임신해서 그런 것으로 정작 그렇게 해서 태어난 빅토리아 소생의 외손주들은 예뻐했다. 후사를 잇는 것이 중요한 군주임에도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가 싶지만 외손주들은 보고 싶으면서도, 딸이 출산하며 고생하는 것은 보기 싫은 흔하게 볼 수 있는 딸 가진 부모의 양가감정이다. 그 우려대로 첫째 빌헬름 2세를 낳을 때는 아기의 팔이 자궁에 걸려 팔이 잘 자라지 않는 장애를 입기도 했으니.
빅토리아 공주가 세례식 때 입었던 옷 |
- 빅토리아 공주의 성공회 유아세례식 때 사용했던 세례복[14]과 세례반[15]은 현재까지도 영국 왕실 일원의 세례식 때 이용되고 있다. 세례반은 요크의 유지니 공녀를 제외한 모든 엘리자베스 2세의 자녀/손자녀들은 세례식 때 사용되였으며, 세례복 또한 2004년 루이즈 마운트배튼윈저의 세례식 때까지 사용되었고, 그 이후에는 복제품으로 대체되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 태후로서의 공식 칭호가 빅토리아 황태후가 아니라 프리드리히 황태후(Kaiserin Friedrich)이다. 사실 이는 남편의 이름을 아내의 칭호로 정하는 것이 프로이센의 전통이었기 때문에, 남편인 프리드리히의 이름을 딴 것이다. 빅토리아는 이 관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프리드리히 황태후가 아니라 빅토리아 황태후로 불리길 원했으나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했다.
[1] 빅토리아 여왕은 조지 3세의 4남 켄트 공작의 무남독녀이며, 켄트 공작의 손위 형제들(장남 조지 4세, 차남 프레데릭, 3남 윌리엄 4세) 중 후사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군주가 될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빅토리아 여왕보다 계승권이 앞서는 사촌언니 샬럿이 있었으나, 출산 중에 아기와 같이 죽어서 빅토리아 여왕 앞에 선순위 후계자가 없었다.[2] 당시에는 백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살아있었고 아버지 빌헬름 1세는 왕태제였다. 즉 왕위 계승 2순위이다.[3] 왼쪽의 아이는 빌헬름 2세, 오른쪽의 아이는 샤를로테 공주이다.[4] 그에 비해 남동생 에드워드 7세는 완전히 엇나간 걸 보면, 빅토리아 여왕의 육아에 문제가 많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혈혈단신의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할 당시 막내외삼촌 레오폴드 1세 같은 정치적인 멘토는 있어도 가정적인 멘토가 될 만한 어른은 딱히 없었기 때문.[5] 이 때문에 초산이었던 빅토리아가 난산으로 고생했다.[6] 그래도 이 사고가 빅토리아의 성기능에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아서, 빅토리아는 이후에도 자녀를 7명이나 더 낳았다.[7] 이 때문에 ‘프리드리히 3세가 오래 살았어도 독일 제국은 원 역사 그대로 망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당장 1848년 혁명이 가장 활발했던 것도 독일이고, 마르크스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한 곳도 독일이었다.[8] 병리학의 아버지라는 루돌프 피르호의 조직검사에 근거하기는 했다.[9]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약 7개월 뒤였다.[10] 독일의 황태자 빌헬름, 아이텔 프리드리히 왕자, 아달베르트 왕자,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 오스카어 왕자, 요아힘 왕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부인 빅토리아 루이제.[11]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다. 하인리히와는 이종사촌지간이다.[12] 요르요스 2세, 알렉산드로스, 루마니아의 왕대비 엘레니, 파블로스 등.[13] 빅토리아 여왕은 21살 때 빅토리아를 낳았다. 당대에 평민이고 왕족이고 할 것 없이 18살 이전에 아이를 낳는 일이 흔했지만, 본인 기준으로는 어린 것.[14] Christening gown.[15] Lily Font. 세례식 때 이용하는 성수를 담아놓은 큰 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