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000000>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비 영국의 베아트리스 공주 Princess Beatrice of the United Kingdom | |
<colbgcolor=#D9D0B4> 이름 | 베아트리스 메리 빅토리아 페오도르 (Beatrice Mary Victoria Feodore) |
출생 | 1857년 4월 14일 |
잉글랜드 런던 버킹엄 궁전 | |
사망 | 1944년 10월 26일 (향년 87세) |
잉글랜드 서식스 브랜트리지 파크 | |
배우자 |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 (1885년 결혼 / 1896년 사망) |
자녀 | 알렉산더, 빅토리아 유지니, 레오폴드, 모리스 |
아버지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
어머니 | 빅토리아 여왕 |
형제 |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앨리스, 앨프리드, 헬레나, 루이즈, 아서, 레오폴드 |
서명 |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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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9번째 자녀이자 막내딸이다. 스페인의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왕비의 어머니로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의 외할머니. 현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의 고조할머니이기도 하다.[1]2. 작위
<colcolor=#000> 문장 |
- 베아트리스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Beatrice (1857년 4월 14일 ~ 1885년 7월 23일)
-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비 베아트리스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Beatrice, Princess Henry of Battenberg (1885년 7월 23일 ~ 1917년 7월 14일)
- 베아트리스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Beatrice (1917년 7월 14일 ~ 1944년 10월 26일)
3. 생애
3.1. 어린 시절
어린 시절 |
공주의 이름은 조지 3세의 4녀 메리 공주와 빅토리아 여왕, 그리고 여왕의 이부 언니인 라이닝겐의 페오도라 공녀의[2] 이름에서 딴 '베아트리스 메리 빅토리아 페오도르'로 결정되었고, 1857년 6월 16일 버킹엄 궁전의 성당에서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았다.
아이를 싫어했던 빅토리아 여왕도 막내딸인 베아트리스에게만은 태어나자마자 애정을 주며 매우 사랑했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귀여웠던 베아트리스는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막내딸이라서 다른 형제들처럼 동생이 태어나 사랑을 나눌 필요도 없었고, 아홉 형제들 중 가장 사랑받는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3.2. 빅토리아 여왕의 집착
빅토리아 여왕과 베아트리스 공주 |
앨버트 공이 사망하자 여왕은 앨리스 공주와 베아트리스 공주를 제외한 모두와 연락을 끊어버리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특히 남편의 죽음이 장남 탓이라고 여겨, 웨일스 공 에드워드와는 거의 연을 끊다시피 한다. 앨버트 공의 사망 이후 딸들을 시집보내기 싫어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1871년 이후 남아있던 딸들이 모두 결혼하자 막내 베아트리스에게 더 집착하기 시작했다. 1883년 여왕의 하인 존 브라운이 사망하자 베아트리스에 대한 집착은 극심해졌다.
결혼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하는 어머니 탓에 베아트리스 공주는 어린 시절부터 "결혼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며, 평생 어머니 곁을 지킬 것이다" 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3.3. 결혼
결혼식날 웨딩드레스를 입은 베아트리스 공주[4][5] | 1885년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찍은 기념사진 |
1873년 나폴레옹 3세가 사망한 후 빅토리아 여왕과 외제니 황후는 더 가까워졌고 두 자식들도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면서 언론에서는 루이 나폴레옹 황태자와 베아트리스 공주의 약혼을 발표했다. 그러나 1879년 6월 1일 루이 나폴레옹이 줄루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이 혼담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7]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에 의하면 베아트리스 공주가 새벽에 먼저 전사 통지 전보를 받았고, 즉시 빅토리아에게 달려와서 집안이 눈물 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여왕 본인도 비극에 가슴이 아파 눈물을 보였다고.[8]
이후 에드워드 왕세자는 1878년 사망한 앨리스 공주의 남편인 루트비히 4세와 결혼할 것을 제안하지만, 법적인 문제로 형부와 결혼하는 것은 금지였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베아트리스가 법률상 결혼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은근히 좋아했다고 한다.
다른 후보들로는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와 남동생 바텐베르크의 알렉산더 공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 둘과도 이어지지 못했고 대신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는 베아트리스의 조카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9]와 연애 결혼을 했다. 그런데 베아트리스는 뜻밖에도 빅토리아와 루트비히의 결혼식에서 신랑의 또 다른 남동생인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와 사랑에 빠진다.
베아트리스 공주가 하인리히와 결혼하겠다는 선언에 빅토리아 여왕은 서운하다 못해 분개했다. 7개월 동안 베아트리스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쪽지로만 대화했고, 한 자리에 앉아 식사하면서도 할 말을 쪽지에 써서 탁탁 건네면서 살았다고. 그래도 며느리 웨일스 공비 알렉산드라와 주변인들의 꾸준한 설득, 그리고 하인리히가 결혼 후에도 영국에서 사는 조건으로 빅토리아 여왕은 베아트리스의 결혼을 허락했다.
베아트리스 공주와 하인리히 공자는 1885년 7월 23일 위핑엄의 세인트 밀드레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썼던 호니턴 레이스 결혼 베일을 걸치고[10], 아버지 대신 오빠 에드워드 왕세자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신부 들러리로는 큰오빠 에드워드 7세의 장녀 웨일스의 루이즈 공녀, 둘째 언니 앨리스 공주의 3녀 이레네, 4녀 알릭스 등이 참여했다.
베아트리스 공주는 웨딩드레스에 있어서 위의 네 언니들보다 더 굉장한 특혜를 받았는데, 민소매로 제작된 웨딩드레스 팔 부분 윗쪽으로 살짝 보이는 레이스는 무려 튜더 왕조 시절 헨리 8세의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가 소유했던 달랑송 튜닉(D'Alençon Tunic)이었다고 한다. 레이스를 정말 좋아했던 베아트리스 공주를 위해 빅토리아 여왕이 특별히 자신의 결혼식 때 썼었던 호니턴 레이스 결혼 베일과 달랑송 튜닉의 사용을 허가했다고 한다.
3.4. 결혼 생활
결혼 후, 신혼 부부는 여왕과 약속한 대로 영국에 정착해서 살았다. 하인리히가 들어온 이후 궁의 분위기는 예전보다 더 밝아진 듯했다. 하지만 결혼 전부터 군인이었던 하인리히는 결혼 후에도 끊임없이 군에 복무하고 싶어했지만, 장모인 빅토리아 여왕은 이를 억압하며 허락해 주지 않아 하인리히는 매우 답답해했다고 한다. 하인리히가 앵글로-아샨티 전쟁에 참여하고 싶어하자 결국 빅토리아 여왕은 마지못해 허락해주고 말았다. 그러나 그 기회를 채 얻기도 전에 하인리히는 말라리아에 걸려 1896년 사망하고 말았다.베아트리스 공주는 결혼 초 유산을 겪었지만 곧 첫째 알렉산더(드리노), 둘째 빅토리아 유지니(에나), 셋째 레오폴드, 넷째 모리스 등 자녀 4명을 낳았다.
남편의 사망 후 베아트리스 공주는 어머니 곁에서 그녀의 비서이자 동료로 함께 생활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베아트리스 공주를 와이트 섬의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행정 일도 함께 병행했다.
3.5. 말년
1901년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한 후 오빠인 에드워드 7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베아트리스 공주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후 베아트리스 공주는 빅토리아 여왕이 생전에 썼던 일기들을 기록하고 정리하며 말년을 보냈다.[11] 1914년 막내 아들 모리스가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사하자 아예 공직 생활에서 은퇴해버렸다. 베아트리스는 사망할 때까지 와이트 섬의 총독으로 일했으며, 1944년 10월 26일 87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장례식은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이뤄졌고 1945년에 세인트 밀드레드 교회의 남편 옆으로 이장되었다.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베아트리스 공주 (Princess Beatrice) | <colbgcolor=#fff3e4,#331c00>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 <colbgcolor=#ffffe4,#323300>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 |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프리드리히 (Francis Frederick, 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 |||
로이스에보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타 카롤리나 여백작 (Countess Augusta Carolina of Reuss-Ebersdorf) | |||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 |||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아우구스투스 (Augustus, Duke of Saxe-Gotha-Altenburg)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루이제 샤를로테 여공작 (Duchess Louise Charlotte of Mecklenburg-Schwerin) | |||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 |||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 |||
조지 3세 (George III)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Princess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 |||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 and Saalfeld) | |||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프리드리히 (Francis Frederick, 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 |||
로이스-에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타 카롤리나 여백작 (Countess Augusta Carolina of Reuss-Ebersdorf)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캐리스브루크 후작 알렉산더 마운트배튼 (Alexander Mountbatten, Marquess of Carisbrooke) | 1886년 11월 23일 | 1960년 2월 23일 | 아이린 데니슨 슬하 1녀 |
1녀 | 스페인의 왕비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Victoria Eugenie, Queen of Spain) | 1887년 10월 24일 | 1969년 4월 15일 | 알폰소 13세 슬하 4남 2녀[12] |
2남 | 레오폴드 마운트배튼 경 (Lord Leopold Mountbatten) | 1889년 5월 21일 | 1922년 4월 23일[13] | |
3남 | 바텐베르크 모리스 공자 (Prince Maurice of Battenberg) | 1891년 10월 3일 | 1914년 10월 27일[14] |
3남 모리스가 미혼인 상태로 1차대전에서 전사하고 차남 레오폴드가 혈우병으로 요절한 데다 장남 알렉산더는 장수했지만 딸 한명만 두고 사망하여 본인과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의 남계 후손은 대가 끊겨 장남의 지위인 캐리스부르크 후작위는 그대로 단절되었다.[15]
5. 여담
- 둘째 언니 헤센의 대공비 앨리스의 장녀 빅토리아와는 막내 이모-조카 겸 동서지간이 된다. 빅토리아의 남편인 루트비히와 베아트리스의 남편인 하인리히가 친형제이기 때문이다. 베아트리스와 하인리히는 빅토리아와 루트비히의 결혼식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1] 펠리페 6세의 증조할머니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왕비의 어머니가 베아트리스 공주다.[2] 여왕의 어머니인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가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딸.[3] 아버지 앨버트 공이 사망했을 당시 베아트리스는 겨우 4살이었다.[4] 머리 위에 쓴 별 모양의 다이아몬드 서클렛은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준 결혼 선물이다.[5] 웨딩드레스는 흰 새틴, 오렌지 꽃, 머틀로 장식되었고 꽃다발은 프로그모어의 왕실 정원의 꽃으로 만들어졌다.[6] 큰 딸은 독일의 프로이센 왕국으로 시집갔고 둘째 딸도 독일 내 헤센 대공국으로 시집갔다. 그래도 셋째딸은 물려받을 영지가 없는 무일푼 왕족과 결혼해 영국에 머물고 있었고, 넷째딸 루이즈 공주는 아예 영국 귀족과 결혼하여 영국에 거주하고 있었으니 막내딸인 베아트리스 역시 그럴 수도 있었던 일. 이와 정반대로 사돈어른은 딸들 뿐만 아니라 아들도 외국으로 보냈다.[7] 만약 성사되었다면 1662년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와 헨리에타 앤 부부 이후 217년 만에 처음으로 영국 왕족과 프랑스 왕족이 결혼하는 것이다. 물론 217년은 물론 361년이 지난 지금도 그럴 일은 없다.[8] 물론 루이 나폴레옹이 살았다고 해도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완강하게 반대했을 것이다. 당시 유럽 외교계를 쥐고 있던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계속 공화정을 유지해야 유럽 국가들이 프랑스를 왕따시키고 대불동맹을 강화시킬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때 빅토리아 여왕과 베아트리스가 루이 나폴레옹과의 결혼을 밀어붙였다면 외교적 마찰이 불가피했을 것이다.[9] 둘째 언니 헤센의 대공비 앨리스의 장녀.[10] 위의 언니들 4명은 못 썼지만 베아트리스 공주에게는 자신이 결혼식 때 썼던 본인의 호니턴 레이스 결혼 베일의 사용을 허락했다.[11] 이때 베아트리스 공주가 여왕의 사적인 기록들을 다 삭제해서, 남아있는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 기록들은 원본의 고작 1/3 정도라고.[12]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등.[13] 혈우병 환자로 후에 수술 중 사망.[14]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15] 영국은 엘리자베스 2세로 유명한 만큼 여자도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있고 패트리샤 마운트배튼처럼 여자도 백작 같은 귀족 작위 계승자가 될 수 있지만 왕위와 달리 귀족위의 경우는 직위에 따라 여자가 계승할 수도 있고 계승하지 못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