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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 |||
출생 | 1754년 10월 1일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사망 | 1801년 3월 23일 (향년 46세)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미하일롭스키 성 | |||
묘소 |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 ||
재위기간 |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 ||
1762년 7월 17일 ~ 1773년 7월 1일 | |||
올덴부르크 백작 | |||
1773년 7월 1일 ~ 1773년 12월 14일 | |||
전러시아의 황제 | |||
1796년 11월 17일 ~ 1801년 3월 23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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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파벨 페트로비치 로마노프 (Па́вел Петро́вич Рома́нов) | ||
아버지 | 표트르 3세 | ||
어머니 | 예카테리나 2세 | ||
형제자매 | 여동생 안나 | ||
배우자 |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네 루이사 (1773년 결혼 / 1776년 사망) |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1776년 결혼) | |||
자녀 |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알렉산드라, 옐레나, 마리야, 예카테리나, 올가, 안나, 니콜라이 1세, 미하일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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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황제.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의 외아들이자 알렉산드르 2세의 친할아버지이다. 또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알렉산드르 3세의 친증조할아버지이며, 니콜라이 2세의 친고조할아버지이다.2. 생애
2.1. 즉위 전
1761년 8살 때의 모습 |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카테리나가 외도해서 생긴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소문일 뿐, 근거는 없다.[1]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 옐리자베타 여제 밑에서 자라났다.
아버지 표트르 3세가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쿠데타로 폐위당한 후 줄곧 황태자였으나 실제로는 어머니의 제위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위험한 위치에 있었고, 실제로 예카테리나 2세의 즉위 초엔 그녀의 정통성을 이유로 여러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예카테리나는 로마노프 왕조와 무관한 외국인 출신이면서 표트르 3세를 축출했지만 당시 9세였던 파벨이 어리다는 이유로 아들 대신 자신이 직접 황제로 즉위하여 통치했기 때문이다.[2]
파벨은 애초에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서 성장했다. 옐리자베타 여제가 파벨이 태어나자마자 예카테리나가 아이를 볼 틈도 없이 안고 나간 후 자기가 독점해 길렀고 예카테리나와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정치적 입장도 미묘해서 생모와 불편한 관계였지만 예카테리나 2세도 낳은 정이 있기 때문에[3] 아들과의 관계회복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유일한 적자 파벨을 위해 며느리 간택 때 미모를 고려하여 아들과 함께 직접 간택했고, 많은 자금을 하사하여 저택과 취미 생활이던 밀덕질에 돈을 펑펑 쓰게 해주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모자 관계에 타격을 준 건 푸가초프의 난이었다. 3여년의 반란으로 남러시아를 초토화시킨 이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 푸가초프가 자신을 표트르 3세라고 사칭하며 파벨의 옹립을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
이 때문에 모자 사이는 서먹해졌고 이들을 이간질하려는 여러 야심가들이 카더라 통신을 배포하면서 험악해졌다. 더군다나 이런 카더라 때문에 예카테리나는 아들의 정사 개입을 원천 차단하고 가치나를 주어 거의 쫓아냈고, 파벨은 수도에서 떨어져 나와 정사에서도 배제되자 예카테리나 2세 치하에 찬밥 신세였던 신하들을 측근으로 삼았다.
2.2. 즉위와 치세
결국 예카테리나 2세는 유일한 적자이면서 정적이었던 파벨을 꺼려서, 장손자 알렉산드르와 둘째손자 콘스탄틴이 태어나자 아들 부부에게 빼앗아서 자신이 키웠다. 그러니 알렉산드르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부모와 별 애정 없이 자랐고 예카테리나도 승하하기 10여년 전부터 아들 대신 손자인 알렉산드르를 즉위시키려 구상했지만, 애초에 명분도 약한 데다 알렉산드르도 준비가 안 되었다고 반대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진 못하고 수순대로 황태자 파벨이 파벨 1세로 즉위하게 되었다.즉위하자마자 어머니와 관련된 모든 것을 부정하려 했고, 러시아 제국 궁정에 만연한 프랑스풍은 물론 외국의 풍습과 물건까지 금지하려 했다. 파벨 1세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 제국에서 귀중한 것은 자신과 자신의 군대와 자신과 이야기하는 사람 뿐"이었다. 다만 그 사람도 가치 있는 것은 이야기하는 그 순간 뿐.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하긴 집안 사정이 저 모양이니 문제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1797년 대관식을 치르자마자 제위계승법을 발표해 장자계승원칙을 확립시켰다. 그전까지 러시아의 제위 계승은 황제가 생전에 직접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식이었는데 파벨 1세는 제위계승법을 서유럽처럼 법령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장자계승원칙은 왕위계승자를 사전에 확정하고 정치적 혼란을 막는 조치였다.[4] 이것은 앞서 어머니 치세에 대한 반발로 자신을 건너뛰어 황위계승을 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외교정책에 있어서 프랑스 혁명을 극도로 증오하여 사상은 물론이고 프랑스풍의 옷까지 규제했다. 이 당시 러시아 제국 최고의 군인 중 하나로 꼽히는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기도 하였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몰타를 잃어서 방황 중인 가톨릭 몰타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 쳐발려서 굴복한 유럽 나라에서 대인배 취급을 받았으나 곧 러시아 빼곤 죄다 프랑스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강화에 응해야 했다. 여담으로 프랑스 방문 때 파벨은 루이 16세의 딸인 어린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에게 '당신을 모시게 된다면 큰 영광'이라는 예의상 드립을 날렸는데, 혁명 후 망명한 마리 테레즈가 러시아에서 살게 되고 파벨이 먹고 살게 해주었으니 좀 이상하게 이루어진 셈.
한편으로는 유럽 대륙 내에서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을 넓히고자 하였으며 실제로 덴마크를 러시아편으로 끌어들이는 등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해상 교역에 차질이 생긴 영국이 하이드 파커와 호레이쇼 넬슨 지휘 하에 함대를 파견했고, 영국이 덴마크를 코펜하겐 해전에서 탈탈 털어버렸다. 황제는 분개했으나 해상에서는 영국 해군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국내에선 폭압적인 정책으로 인기를 잃고 있었다. 무엇보다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하는 것[5]으로 많은 반발을 샀다.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가 재위하던 시절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군대와 귀족의 인기를 얻어 만회하려고 국가 소유의 농노까지 마구 퍼주면서 귀족의 농노제 특권을 강화시켰는데, 파벨은 일단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총신들에게 뿌려진 국가 소유 농노들을 환수하고 여제의 애첩들을(...) 궁정에서 쫓아내는 한편, 당시 1주일에 4일간 지주에게 봉사해야 하는 농노의 의무를 3일로 단축시키고 남는 시간에는 국가농장에 투입하려 했다. 단순 산술적으로 지주들의 수입이 4분의 1은 줄어드는 격.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농노에게 자비로웠던 것은 아니라 새로 개척된 러시아 남부까지 농노제를 퍼뜨리고 자신들을 지지하는 총신들에겐 예카테리나 2세보다 더 빠르게 농노들을 분배했다.
게다가 군대에는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이후 독일풍이라면 알레르기 돋는 러시아 제국군에 자신의 취미였던 프로이센 왕국군 복장을 입히고 군제마저 개혁하려 했다. 심지어는 불패의 명장인 수보로프 대원수를 박대하고 개선식조차 금지시켜서, 고국으로 돌아온 수보로프 대원수는 자택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허망하게 사망했다.
이러니 공공연히 귀족들 사이에서 쿠데타 카더라가 돌았고 반대파에선 의심 많은 파벨의 의심을 더 자극하려고 아내와 아들 알렉산드르와 콘스탄틴까지 황제를 죽이려 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파벨은 가족들을 궁정에서 내쫓는다. 이것이 치명타가 되는데...
2.3. 암살
의심병이 점차 심해지면서 자기 가족들과 분리된 파벨 1세는 자신의 호위연대를 궁에 상주시켜 놓고 있었는데 마침 호위연대장을 출타시킨 그날밤 사건이 터졌다.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과 장교들이 침실을 급습해 퇴위를 선언할 것을 강요했다. 파벨 1세가 거부하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주보프가 파벨 1세를 칼로 쳐 죽였다.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이 주도했다곤 하는데 영국의 지원설도 있고 단독적인 범행은 아니었다. 이미 귀족들에게 인심을 잃은 건 오래 되어서... 후일담으로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은 소식이 알려지고 3일 연속 잠도 못자고 울고 있는 알렉산드르에게 "그만 울고, 통치를 하십쇼!" 라 일갈했다고 한다. 후에 알렉산드르는 쿠데타 가담자들을 포상하지도 않고 추방하지도 않고 그냥 면직 처리만 했다. 이것이 알렉산드르의 솔직한 심경이었을 듯.
사실 아들들인 알렉산드르 1세와 차남 콘스탄틴 대공은 그 암살 음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암살까지 동의했는지는 현재까지 불분명하다고 하는데 최소한 아버지의 퇴위까지는 동의했고 "해치지는 않는다" 정도로의 동의가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덕분에 알렉산드르는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에게 부친을 살해했다는 강한 의심과 질책을 들었고 치세 내내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파벨 1세도 가족들이 자신을 암살한다는 음모론
3. 평가
최근까지는 예카테리나 여제와 알렉산드르 1세에게 가려진 데다가 짧은 치세에 암살당했기 때문에 러시아에선 부정적인 평가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그가 진지하게 개혁을 원했는지는 차지하고서라도 농노제를 건드린 것만으로 영국 같은 자유주의 국가에선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고, 톨스토이도 소설에서 농부들의 대사를 통해 "파벨 황제가 살아계셨더라면 우리가 더 평안했을 텐데" 드립[7]이 나오기도 한다. 예카테리나 2세와 알렉산드르 1세 모두 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즉위 후엔 어른의 사정으로 반동적으로 변모하는데, 예카테리나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은 반면 파벨은 아버지와 닮았다는 점 탓에 제대로 된 평가나 연구가 좀 부족하다무엇보다 적으로 돌린 사람이 너무 많다. 특히 수보로프 대원수가 어머니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개선식부터 알현도 거부하는 치졸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수보로프가 사망했을 때에도 전례없는 전공을 세운 그의 장례식을 대원수의 격에 맞게 치르는 것을 막고, 일반 원수의 격식으로 의전을 했다. 남자 애인들을 불러들여 즐기고 장자인 자신은 홀대한 어머니에 대한 복수라는 분석이 많다.
죽기 직전 코사크 부대에게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인도를 공격해서 인도에서 영국 세력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일을 두고 비현실적인 망상에 시달린 광기라고 조롱하는 의견들이 많았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로는 그렇게까지 무모하고 어리석은 명령은 아니고 나름대로 가능성은 있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그의 암살에 영국이 개입했다는 음모론이 이 조치와 연관되기도 한다.
4. 가족관계
4.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알렉산드르 1세 (Alexander I) | 1777년 12월 23일 | 1825년 12월 1일 | 바덴의 루이제 공녀 슬하 2녀 |
2남 |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Grand Duke Constantine Pavlovich) | 1779년 4월 27일 | 1831년 6월 27일 | |
자네타 그루진스카야 | ||||
1녀 |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Alexandra Pavlovna, Archduchess of Austria) | 1783년 8월 9일 | 1801년 3월 16일 |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슬하 1녀 |
2녀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세자비 헬레나 파블로브나 (Elena Pavlovna, Hereditary Princess of Mecklenburg-Schwerin) | 1784년 12월 24일 | 1803년 9월 24일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세자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슬하 1남 1녀[9] |
3녀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비 마리야 파블로브나 (Maria Pavlovna, Grand Duchess of Saxe-Weimar-Eisenach) | 1786년 2월 16일 | 1859년 6월 23일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슬하 2남 2녀[10] |
4녀 | 뷔르템베르크의 왕비 카타리나 파블로브나 (Catherine Pavlovna, Queen of Württemberg) | 1788년 5월 21일 | 1819년 1월 9일 | 올덴부르크의 게오르크 공작 슬하 2남 |
빌헬름 1세 슬하 2녀[11] | ||||
5녀 | 올가 파블로브나 여대공 (Duchess Olga Pavlona) | 1792년 7월 22일 | 1795년 1월 26일 | |
6녀 | 네덜란드의 왕비 아나 파울로브나 (Anna Pavlovna, Queen of Netherlands) | 1795년 1월 18일 | 1865년 3월 1일 | 빌럼 2세 슬하 4남 1녀[12] |
3남 | 니콜라이 1세 (Nicholas I) | 1796년 7월 6일 | 1855년 3월 2일 |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슬하 4남 4녀[13] |
4남 |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 (Grand Duke Michael Pavlovich) | 1798년 2월 8일 | 1849년 9월 9일 | 뷔르템베르크의 샤를로테 슬하 5녀 |
4.2. 결혼과 후손
첫번째 아내는 1773년 대공 시절 결혼한 독일 출신의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1755~1776,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나 루이사)였다. 파벨은 나탈리아를 열렬하게 사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탈리아는 하필이면 남편인 파벨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피웠다. 이를 알게 된 예카테리나 2세가 이 내연남을 외지로 보내버리자 파벨은 친구를 보호하려고 했던 걸 보면 이 불륜을 그저 루머로 여긴 것 같다. 나탈리아는 1776년(22세) 출산 중에 사망했다.이후 1776년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와 재혼했으며 그 사이에서 장남 알렉산드르(1777년생), 차남 콘스탄틴(1779년생) 이후 알렉산드라(1783년생), 옐레나(1784년생), 마리야(1786년생), 예카테리나(1788년생), 올가(1792년생), 안나(1795년생) 등 딸만 6명을 두다가 3남 니콜라이(1796년생)와 4남 미하일(1798년생)이 태어났다.
그러나 올가는 1795년에 요절했고 알렉산드라와 옐레나는 출산 중에 죽었다. 파벨 1세 이후로 러시아 제국의 황위 계승에는 살리카법이 개정되었는데, 아들 넷 중 장남 알렉산드르 1세는 두 딸만 남겼고, 차남 콘스탄틴은 사생아만 있는 데다 귀천상혼을 했고, 4남 미하일도 딸만 다섯을 두었기 때문에 로마노프 가문의 계보는 3남 니콜라이 1세의 계보로만 이어지게 된다.
초상화를 보면 파벨 1세가 추남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대비되게 후처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는 로마노프 가문에 뷔르템베르크의 잘생긴 외모를 가져왔다고 할 정도의 미녀에 단신의 추남 파벨보다 키까지 훨씬 컸다. 덕분에 파벨 1세와 대조적으로 아들 니콜라이 1세는 유럽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라 일컬어질 정도로 당대에 손꼽히는 미남이 되었다. 조피 도로테아가 로마노프 가문의 외모를 업그레이드해준 덕에(?) 니콜라이 1세 이후 로마노프 왕조의 대공들은 장신인데다 외모도 아주 준수했다.
엄밀히 말하면 파블로비치/파블로브나 세대의 경우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의 뛰어난 외모를 물려받은 자녀가 있는가 하면 추남 파벨 1세의 외모를 물려받은 자녀도 있어서 좀 갈렸지만 아들 니콜라이 1세는 어머니의 외모를 물려받은 케이스고, 니콜라이 1세 역시 뛰어난 미녀인 프로이센의 샤를로테[14]와 결혼해서 낳은 자녀들과 후손들부터는 진짜로 장신에 미남미녀들이 많게 된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나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9세처럼 그의 후손들이 유럽의 군주로 이어지고 있다. 차녀 옐레나와 삼녀 마리야, 6녀 안나, 삼남 니콜라이 1세가 각각 영국, 덴마크,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 국왕들의 조상이 되었다.[15]
4.3. 가족에 대한 일화
파벨 1세의 사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파벨의 넷째 딸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를 후처로 삼고 싶어했지만 마리야 황태후는 유럽의 폭도떼 두목(?)인 나폴레옹이 사위가 될 상황을 펄펄 뛰며 반대했고, 러시아 관습상으로도 이 문제에서는 모후를 이길 수 없었던 알렉산드르 1세가 얼른 이종사촌인 올덴부르크의 게오르크 공작[16]에게 예카테리나를 시집보내 버렸다.[17]당연히 나폴레옹에게 거절 편지를 보내야 했는데 당시 높으신 분들 예법은 직접적인 거절이나 비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이 40줄에 후계자가 급한 나폴레옹에게 전한 말이 "넷째 여동생 대신 14살인 막내 여동생 안나 파블로브나가 있는데 성인으로 장성할 때까지 기다려달라" 였다. 그나마도 이 편지가 도착한 것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쳐바르고 빈에서 프란츠 2세의 딸 마리아 루도비카 공주에게 청혼하고 나서였다. 당연히 나폴레옹 이를 꽤 불편하게 받아들였고 호사가들에겐 if 떡밥으로 "나폴레옹에게 순순히 여동생을 조공으로 바쳤으면 러시아 원정도 없었고, 나폴레옹의 몰락도 없고, 유럽의 역사가 바뀌었을 거다" 하는 카더라가 퍼지기도 했다.
6번째 딸 안나 파블로브나는 네덜란드 빌럼 2세의 왕비가 되었는데, 서로 종교나 취향이 달랐지만 남편이 정교회 신앙을 존중해 준 덕분에 생활에 딱히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자식들은 결혼계약에 의해 개신교 신자로 자랐다. 유럽에서 종교색이 옅어지는 19세기부터는 종교가 다른 국가나 가문끼리 결혼을 할 경우 한 쪽이 개종하거나 자식들을 특정 종교로 키운다는 합의[18]를 하기 때문에 종교의 차이가 그 이전 시기만큼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벨 1세의 아버지 표트르 3세부터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까지는 거의 모두 정교회를 믿지 않는 독일 제후국 군주 가문과 통혼했다.[19]
[1] 무엇보다 아버지와 생김새와 성격이 비슷하고, 표트르 3세가 지능이 떨어져도 자기 자식도 못 알아볼 정도로 백치는 아니었다. 물론 옐리자베타가 살아있던 시절에도 예카테리나 2세는 미래의 폴란드 왕을 비롯한 여러 남자들과 불륜을 했으나 현재는 많은 이들이 후대에 예카테리나 2세가 여러 남첩을 두고 문란한 것을 두고 공격하기 위해 만든 헛소문으로 본다.[2] 아들이 멀쩡히 있는데 아내가 제위를 계승한다니 뭔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표트르 1세의 뒤를 예카테리나 1세가 뒤를 이은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는 당시 러시아가 지명 상속제를 택하고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지 법제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는 다른 유럽 국가들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계승법이 유럽처럼 되었다면 파벨 1세는 아버지 사후 즉시 즉위했을 것이고, 나이가 어려서 문제가 된다면 귀족들이 섭정위원회를 꾸려서 보좌를 했으면 했지 왕비가 마음대로 정사에 관여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러시아 귀족들도 아직까지 지명 상속제를 유지하고 있는 자기네가 미개하다면서 자조했을 정도.[3] 게다가 6~8살 시점에선 옐리자베타 여제가 오늘내일하던 상태였고, 실제로 파벨이 8살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뒤늦게나마 예카테리나 2세와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었다.[4] 당시 서유럽에서는 왕위 승계시마다 쿠데타가 일어나는 러시아의 야만성을 비웃었다. 특히 예카테리나 2세와도 서신을 교환했던 볼테르까지 지명상속제를 두고, 지명제가 아니라 점령제가 아니냐고 예카테리나를 비웃을 정도.[5] 이는 서유럽 절대왕정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 1차로 서유럽화를 추진한 군주가 표트르 1세라면 2차로 서유럽화를 추진한 군주는 파벨 1세인 셈이다. 실제로 상술한 장자계승원칙 확립과 후술할 내용처럼 러시아군에 프로이센 복장을 입힌 것 또한 파벨 1세가 러시아의 서유럽화를 추진한 것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표트르 대제와 달리 파벨 1세는 상술한 것처럼 프랑스풍을 배척했다는 것.[6] 이는 파벨 1세 본인이 살리카법까지 제정하며 확립한 후계구도를 엉망으로 만드는 행위였다.[7] 톨스토이는 저서 전쟁과 평화에서 주인공 대사로 "위대한 예카테리나 대제" 드립을 치기도 하지만, 예카테리나가 농노제를 강화한 것 때문에 소설 밖에서 개인적으론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8] 1796년 결혼/1820년 이혼. 에른스트 1세와 레오폴드 1세의 누나이자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의 언니.[9]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 파울 프리드리히 등[10] 독일 제국의 황후이자 프로이센의 왕비 아우구스타 등.[11] 네덜란드의 왕비 소피아 등.[12] 빌럼 3세, 헨드릭 왕자 등.[13] 알렉산드르 2세,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마리야, 뷔르템베르크의 올가 왕비,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자비 알렉산드라,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14] 샤를로테의 어머니이자 니콜라이 1세의 장모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가 아름답고 뛰어난 외모의 미녀였다.[15] 영국 국왕 찰스 3세(니콜라이 1세), 네덜란드 국왕 빌럼알렉산더르(옐레나, 안나),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10세(옐레나, 마리야, 니콜라이 1세),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마리야, 니콜라이 1세),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마리야).[16] 올덴부르크 대공 페터 1세와 예카테리나의 이모 뷔르템베르크의 프리데리케의 차남.[17]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는 이후 올덴부르크의 공작부인이 되어 두 아들을 낳고 잘 살다가 남편과 사별한 뒤, 뷔르템베르크 국왕 빌헬름 1세와 재혼하여 왕비가 되었으나 딸 조피를 낳은 뒤 얼마 되지않아 사망했다.[18] 대부분 아내가 남편 쪽을 따르지만 드물게 상속녀와 결혼하는 데릴사위의 경우에는 아내의 종교를 따르기도 했다.[19] 알렉산드르 1세의 황후 바덴의 루이제, 니콜라이 1세의 황후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 헤센의 마리 공녀, 니콜라이 2세의 황후 헤센의 알릭스 공녀. 예외는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와 결혼한 알렉산드르 3세인데 덴마크 왕국도 러시아 정교회를 믿지않는다는 건 동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