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5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60><tablebordercolor=#ffff00> 대월의 국성花山 李氏 화산 이씨 | }}} | |
관향 | <colbgcolor=#fff,#191919>황해도 옹진군 북면 화산동리 | ||
시조 | 이공온(李公蘊) | ||
중시조 | 이용상(李龍祥) | ||
집성촌 | 황해도 옹진군 황해도 벽성군 황해도 신천군 경상북도 봉화군 경상북도 영주시 | ||
인구 | 1,237명(20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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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花山 李氏11~13세기에 대월(大越) 리 왕조(李王朝)를 건국한 태조(太祖) 이공온(李公蘊)을 시조로, 그의 6대손인 이용상(李龍祥)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1] 이용상은 6대 황제 영종(英宗)의 아들이고, 7대 황제 고종(高宗)의 동생이며, 8대 황제 혜종(惠宗)의 숙부이다.[2] 진가(陳家) 때 전조인 이가(李家)의 일족을 몰살했기 때문에 이가의 후손은 응우옌(阮)씨로 흡수되거나 다른 성씨로 바꾸어 살았으며 이(李)씨 성을 가진 후손은 한반도에만 남아있다고 한다. 다만 북한의 경우 1960년대 말부터 종파주의를 이유로 족보를 회수하고 본관을 거론하기 어려운 사회 정서가 형성되어 화산 이씨 후손들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현재 화산 이씨는 옹진군을 포함한 황해도 남부에 밀집되어 있고, 경상북도 안동시와 경상남도 밀양시, 진주시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진씨가 제위를 찬탈하여 리 왕조가 멸망할 때 이용상(李龍祥, Lý Long Tường)이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고려로 망명, 귀화했다. 이후 고려에 정착한 후손들은 그를 화산 이씨의 시조로 삼았다고 한다. 다만 이용상이 고려에 귀화했다는 기록을 화산 이씨의 족보인 《화산이씨세보》에 의존하고 있는데,[3] 교차검증은 되지 않는다. 고려사에는 이용상과 관련된 것이 기록된 바가 없고 베트남 측의 기록과는 관계와 행적이 차이가 난다. 또한 이용상의 고려에서의 행적을 기록하는 다른 기록인 수항문기적비는 1903년에 세워진 것이다.[4]
2. 현대 베트남에서의 인식
베트남 정부에서는 화산 이씨를 리 왕조의 후예로 공식 인정했다. 이용상은 망명할 때 리 왕조의 계보를 챙겼고, 이 내용은 이용상의 후손이 《화산이씨세보》에 남김으로써 오늘날까지 전해졌다. 《화산이씨세보》에 기록된 리 왕조의 계보와 쩐 왕조가 기록한 리 왕조의 계보가 일치함으로써 화산 이씨가 리 왕조의 후손으로 인정받는 근거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화산 이씨는 리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공온을 시조로, 중시조를 이용상으로 삼게 되었다.[5]화산 이씨 후손들은 베트남 거주시 출입국, 세금, 사업권 등에서 베트남인과 동일한 혜택을 받고, 이들이 베트남에 거주하기를 원할 경우 베트남에서 까다로운 외국인의 건물 및 토지 구입 제한을 면제받는 우대를 해주고 있다. 즉 명예 베트남인이다. 베트남으로 귀화를 원한다면 아예 베트남인으로 여겨 베트남 귀화 과정이 다른 사람들보다 쉽다.[6] 이가가 출범한 음력 3월 15일이면 공식 행사까지 연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리 왕조의 시조인 리 태조가 한국으로 치면 세종대왕처럼 여겨지며 존경을 받고 있고, 외세의 침략이 많았던 베트남 역사에서 그나마 리 왕조가 통치했던 시기가 편하고 안정된 편이었기에 전성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15세기 이후 19세기까지 나라가 두 쪽으로 나뉘는 일이 무려 세 번이나 일어났다. 이에 대해서는 베트남 정부가 일부러 이용상을 보트피플에 비유하며 베트남 전쟁 당시 떠난 베트남인들을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선전 및 활용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한때 베트남 내부에는 화산 이씨가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오면 베트남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그 왕조의 후손이 베트남을 먹여 살릴 거리를 가지고 온다는 내용인데, 1996년에 베트남에서는 770년 만에 이가(李家) 후예들이 고향에 왔다고 화제가 된 적도 있고,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 처음으로 진출할 때 해당 소문을 적당하게 이용한 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후문이 있다.출처 링크의 글을 보면 2000년대 초반의 이야기로 보인다. 화산 이씨가 베트남을 먹여 살린다 운운하는 부분은 명백히 과장이지만 어느 정도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것은 사실이니 지금 와서 볼 때 아주 뜬소문은 아니다. 특히 베트남 GDP 전체의 약 35%가 삼성전자 공장에서 나온다고 하니...
2.1. 경과
2.1.1. 베트남 통일 이전
1959년에 북베트남의 문화사절로서 북한을 방문한 역사학자 쩐반잡이 이용상의 전설을 확인하려고 북한을 방문했다. 북한 학자의 도움을 받아 황해도 옹진의 망국단과 <수항문기적비> 등을 답사하여 이용상의 전설을 확인한 뒤에 보고서를 남기면서, 서문에 이용상은 (북)베트남과 북한의 우호 관계를 상징한다고 기록하였다.베트남 전쟁으로 북베트남에서 더 이상 이용상에 대해서 연구하지 못하던 1967년, 남한에 사는 화산 이씨의 25대 후손인 이훈이 남베트남 대사관을 방문하여 자신이 베트남의 왕자 이용상의 후손임을 밝혔다. 그 뒤 이훈은 남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며 자신의 뿌리찾기 활동을 하였고, 이훈의 활동은 <1226년 리 왕조가 멸망한 뒤 741년 만의 귀향>이라는 제목으로 남베트남과 한국의 언론에 자세히 소개되었다. 응우옌반티에우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까지도 관심을 보였지만,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하고 이훈이 1976년에 화병으로 사망하면서 화산 이씨의 뿌리찾기는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다.
사실 화산군은 현재 북한 지역이고, 화산 이씨의 본래 집성촌도 대부분 북한 황해도 지역에 있다. 북한에서 월남했거나 경상도 지역에 살고 있는 일부 후손들이 있다고 해도 화산 이씨 혈통은 북한에 가장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던 북한계 화산 이씨는 베트남과 접촉 관계가 없고 남한에 남은 화산 이씨만이 베트남과 접촉한 것은 기묘하게 여겨질 수 있다.
이는 북한이 김일성 일가인 백두혈통 이외에는 족보를 불태우는 등 조상 계승 의식을 봉건 잔재라며 강력하게 억압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었다.[7] 북한에선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족보들이 소실되었고, 후에 족보를 역사적인 사료로 쓰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 지역의 화산 이씨는 자신의 세계(世系)를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훗날 자신의 가계에 대해 공공연하게 말하는 금기는 풀린 상황이지만 혈통관념이 강했을 세대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면서 젊은 사람들은 본관의 개념조차 모르기도 한다.
그래서 이용상 연구를 위해서 북한을 방북한 북베트남의 학자 쩐반잡이 북한의 화산 이씨들과 접촉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사회주의 정권이 외부 세계와 완전 폐쇄하는 것은 아니고, 특히 국제주의 원칙에 따라 같은 공산국가끼리는 교류를 그런 대로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학문적 기반이 약한 북한은 사회주의 정권이라기에도 어설프고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도 외교적 도발을 일삼곤 했다. 통일되어도 사회주의 국가에 사는 화산 이씨가 뿌리를 정확하게 찾을 가능성은 없다.
2.1.2. 금의환향
1992년, 한국이 베트남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뒤, 이훈의 조카인 화산 이씨 26대 이창근씨가 주한베트남대사관을 방문했을 때 베트남 대사가 직접 대사관 문 밖에 나와 이창근을 맞이하였다. 베트남 대사가 한국으로 부임할 당시, 베트남의 역사/문화학자들이 한국에 가면 이용상 왕자의 후손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그리고 1995년 3월, 이창근을 비롯한 화산 이씨 종친회 대표들이 선조들의 고향 베트남을 방문했다. 이 때 도므어이 공산당 총비서를 비롯한 베트남 정부의 삼부요인이 모두 나와 대한민국에서 찾아온 화산 이씨 종친들을 맞아 깍듯이 황손으로 예우했다.
화산 이씨 후손들이 이토록 열렬한 환영을 받은 이유는, 외세의 침입을 물리치고 독립국가를 세워 베트남의 정통성을 확립한 리 태조와 리 왕조에 대한 향수가 지금도 강하기 때문이었다. 응오 왕조가 10국 중의 하나인 남한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응오 왕조-딘 왕조-전 레 왕조로 이어지는 동안 분명 잘나가기는 했어도 왕조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했고, 응오 왕조 말엽에는 2년간 12 사군 시대라는 내전기도 있었다. 반면 리 왕조는 무려 200년 넘게 장기 집권했다. 명목상 후 레 왕조는 중간에 끊어졌던 시기를 제외해도 후기 레 왕조 시기만도 리 왕조보다는 오래 갔지만 그 후기 레 왕조 시기는 허수아비 정권이었다.
이 시기는 쩐 왕조처럼 멸망 위기급 외침도 없었고,[8] 여러 전란에 휘말린 후대와 달리 안정적인 국정을 운영했다. 쩐 왕조에 의해 리 왕조의 후손들이 멸족된 이후에도 베트남에서는 현재까지도 리 왕가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화산 이씨가 베트남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왕가의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9] 하노이 시장이 제주를 대행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화산 이씨 종친의 방문은 리가의 혈통이 800년 세월을 뛰어넘어 3,600여km나 떨어진 한국에 온전히 남아있음을 확인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당시 현지 언론에서는 800년 만에 끊겼던 리 가의 혈통이 부활했다고 대서특필할 정도였다. 현재까지도 해마다 리 왕조 건국 기념식에 종친회 대표들이 초청되고 있다.
2.2. 전설이 실현되다
하노이 북부 박닌성 딘방에는 1,000동 주화에 새겨질 정도로 베트남 국민이 신성하게 여기는 리 왕조의 종묘가 있어, 리 왕조의 역대 황제 8명을 모시고 있다. 이곳은 1019년에 세워진 이래 1952년 프랑스에 의해 전소되었다가 1989년에 재건되었다.
1952년 훼손 당시 종묘에 있던 제기들 중 신성한 향로의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1995년에 베트남을 찾은 화산 이씨 26세손인 종손 이창근이 여기서 첫 제사를 지낸 뒤 종묘의 땅속에 묻혀 있던 우물에서 사라졌던 향로가 발견되었다.
"나무 숲이 사라지고 따오케 강물이 마를 때, 리 왕조가 다시 돌아온다는 전설이 실현되었다."
촌로들은 이렇게 외치며 감격했다고 한다. 그때 그 지방의 나무 숲은 사라져 있었고, 따오케 강이 흐르던 곳은 농토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MBC 방영자료에서 현지인의 얘기에 따르면 이 전설은 리 왕조를 멸망시킨 쩐 왕조의 시조가 한 얘기라고 한다. 즉 리 왕조가 다시는 부활할 수 없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의 호언장담이 현실로 되어 버렸다는 의미. 현재는 그 우물이 복원되어 거기서 길어낸 물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방문 당시 화산 이씨의 종손이었던 이창근 씨가 베트남에 귀화해 리 왕조의 후예로서 선조의 제사를 봉행하고 있다. 베트남으로 귀화했기 때문에 이름을 그대로 베트남어로 옮긴 리쓰엉깐(Lý Xương Căn)으로 쓰고 있다. 이창근 씨가 봉행하기 이전에는 하노이 시장이 제주 역할을 대행해서 제사를 지내왔다. 그리고 이창근씨는 2017년부터 주한 베트남 관광대사를 역임하고 있다.# 지금은 베트남어도 능숙하게 회화가 가능하다.#
3. 유명인
- 이용상: (중)시조
- 이세희: 탤런트
- 이우일, 이우성[10] 형제: 둘 다 만화가
- 한석준의 어머니: 아나운서 한석준의 어머니 집안이 화산 이씨라고 한다. 그 당시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은 고려에 귀화한 이후 황해도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는데, 실제로 외갓집의 고향이 황해도의 사리원, 해주였다고 프리한19에서 밝혔다.#
[1] 원래 이용상을 시조로 하고 있었으나 베트남 정부로부터 리 왕조의 후손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후 태조를 시조로, 이용상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2] 베트남 정부는 화산 이씨와 더불어 정선 이씨도 리 왕조의 후손으로 인정하고 있다. 정선이씨세보에 의하면 시조 이양혼(李陽焜)은 4대 황제 인종(仁宗)의 아들로서 5대 황제 고종(高宗)의 동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베트남의 편년체 통사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 따르면 인종은 후사가 없었고 고종은 인종의 아들이 아닌 조카라는 점, 고종의 동생에 대한 기록이 없는 점, 중국의 사서인 《송사(宋史)》에서 고종을 인종의 아들로 잘못 기록한 점 등에서 후대에 만들어진 정선이씨세보가 《송사(宋史)》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3] 해당 족보는 조선 후기에 완성되었고 1920년경에 간행되었다.[4] 최상수, 韓國과 越南과의 關係 , 한월협회, 1966[5] 화산 이씨는 베트남을 방문하기 전에는 이용상부터 계수했다. 뒤에 나오는 26대 이훈이나 27대 이창근도 모두 이용상으로부터 계수한 것이고, 베트남에서 리 왕조의 후손으로 인정받은 뒤에는 리태조 이공온부터 계수하여 31대 이훈, 32대 이창근으로 한다. 따라서 30대손 이후라는 것은 태조 이공온으로부터 계수한 것이다. 혹시라도 주변에 화산 이씨인 지인이 있다면 30대손 이후의 사람일 것이다.[6] 다만 복수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라면 사실상 어렵다고 봐도 된다. 베트남은 2009년부터 복수국적을 허용하기 시작했는데, 한국은 후천적 복수국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베트남으로 귀화할 경우 한국 국적이 박탈되기 때문이다. 서유럽, 미국 등의 국적을 가지고 있을 경우 복수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7] 족보는 기본적으로 귀족들이 평민과 차이를 두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공산주의적 평등에 반한다. 혈통에 기반한 특권계급을 부정하는 것은 남한도 똑같지만 여기서는 전 국민에게 성과 본을 보급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정작 북한이 가진 백두혈통이라는 관념론적 혈통 세습에 기반한 개념은 매우 반동적이다.[8] 또한 쩐 왕조는 그 마지막이 좀 그런 면도 있긴 하다. 정확히는 후 쩐 왕조인데 초기에는 중국과 맞섰던 왕조가 결국에는 중국의 도움으로 복귀하려다 중국에게 망했으니 마무리도 리 왕조에 비해선 보기 좋기 힘든 측면이 있다.[9] 엄밀히 말해 왕가의 후손들이 리 왕조 멸망 당시 몰살된 것은 아니었으나, 이들은 전부 응우옌으로 성씨를 바꾼 탓에 리 왕가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진 상태였다.[10] 문서는 개설되지 않았지만, 록 밴드 코코어 리더이자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