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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A251D><colcolor=#fdfa00> 베트남 공산당 제4대 총비서 도므어이 杜梅(두매) | Đỗ Mười | |
출생 | 1917년 2월 2일 |
투아티엔후에주 프록구역 | |
사망 | 2018년 10월 1일 (향년 101세) |
국적 | [[베트남|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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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의 정치인.2. 생애
하노이 탄트리에서 본래 응우옌주이꽁(Nguyễn Duy Cống)으로 태어났으나, 이후 도므어이로 개명한 듯 하다. 다만 호치민도 본명이 응우옌신꿍(Nguyễn Sinh Cung)이었던 것을 보면, 공산주의 비밀투쟁 차원에서 가명을 사용했거나, 혹은 아예 다른 이름으로 개명한 듯. 1939년부터 베트남 공산당에 입당해 일찌감치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항거했으나, 이 때문에 체포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그렇게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나, 일제로부터 독립했던 한반도가 그랬듯이 강대국들은 17선(정확히는 벤하이강)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갈라놓았고, 공산당원에 하노이 출신인 도므어이는 당연히 북베트남에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개시한다. 1955년부터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소속된 것을 시작으로, 1956년 국내무역부 차장으로 처음 입각하다가 1958년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당 내에서 빠르게 성장한다. 이후 호치민이 사망하자 그의 능 건립을 주도했는데, 이 때 소련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Leifer 1995, 60쪽). 다만 이게 진짜 지원을 받았는 지 100% 검증된 바는 아니다. 여하튼 이 때문인지 당 내에서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부수상으로 임명되었다. 1973년부터는 건설부장직을 겸직했고, 베트남 통일 후에도 한동안 직을 유지하다가 남베트남을 온전히 흡수한 1976년 부수상직에서 물러난다(건설부장직은 그 이듬해에 물러났다).
건설부장 퇴임 4개월 전 쯤, 응우옌반린이 위원장직을 수행하는 산업무역전환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도므어이는 이 때 위원회 부주임직을 맡고 있었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약 20여년 간을 자본주의 치하에서 살아온 구 남베트남지역을 공산화하는 것으로, 사유재산과 개인주의로 물든 남베트남의 경제체제를 공산주의의 상징인 국유화 및 집단주의로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응우옌반린이 당 내에서 "우익분자"로 몰리면서 1년도 못 가 주임직에서 짤렸고, 그 자리를 도므어이가 대체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자본가놈들은 시궁쥐들과도 같다. 그들이 튀어나오면 반드시 때려잡아야 한다"며 강경하게 나섰고, 아예 작정한 듯 사유재산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한다.
허나 오랜 세월을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온 남베트남 주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고, 이러한 강경 조치들은 여러 부작용만 남기게 되었다. 되레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구 북베트남 지역에서도 경기침체를 겪는 등 문제점들이 나타나자, 도므어이는 현행 체제로는 안 된다고 판단해, 각종 개혁개방을 추진하게 된다. 물론 공산주의를 온전히 버리는 것은 반대했으나, 최소한 자본주의의 장점들을 접목시키는 방식, 일명 "혁신(도이머이)"을 시행했다. 즉, 아예 100% 자본주의로 전환한 동유럽식이 아닌, 공산주의를 유지하되 자본주의를 결합한 중국식 개혁개방을 실시한 건데, 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러한 공로 덕에 차기 지도자감으로 급부상하던 1988년, 팜훙 수상(정확히는 내각수상인데, 내각의 부장들을 통솔한다는 것은 곧 수상을 의미한다)이 사망하자, 곧바로 수상직을 물려받았다. 수상직을 맡으면서도 개혁개방을 계속 이어갔는데, 일례로 중앙에 집중된 경제 체제를 분권화하고, 외국인 투자자를 유치하는 등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때마침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종말을 고했으니, 어쩌면은 당연한 조치였다.
수상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가 되었는데, 이 때 개헌을 통해 권력을 분권화하여, 중앙위원회 총비서가 당의 실권을 쥐되, 국가주석직은 가져가지 않도록 했다. 이 때문에 도므어이는 평생을 국가원수(베트남 국가주석)로 지낸 적은 없었다. 다만 헌법 제4조에 "당이 국가와 사회를 주도한다"고 명시해 놓아서, 실권은 도므어이가 쥐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국가주석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고도 볼 수 있다(하지만 2018년 응우옌푸쫑이 두 직책을 겸직해서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하지만, 그간의 성과와는 달리, 총비서 시절은 매우 깔끔하지 못했다. 개혁개방 덕에 비록 경제적인 성과가 뚜렷했지만,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어느정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커지면서, 당은 보수파와 개혁파로 양분되었다. 개혁파들은 완전한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주장한 반면, 보수파들은 현행 체제 유지, 즉 자본주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나 공산주의 틀 자체는 건드리지 않는 쪽을 주장했다. 도므어이 시절 당 정치국은 보수파들이 장악한 편이었으나, 개혁파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보수파들도 한국의 재벌의 성공 사례를 언급하며 베트남에서도 적용하자고 외쳤던 것을 보면, 자본주의를 무조건 버릴 마음은 없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대 계파 사이에서 이도저도 구심점을 잡지 못한 도므어이는 1997년 총비서직을 사임한다. 이후에도 정계에서 이런저런 영향력을 미치기는 했으나,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은 채 2001년 완전히 은퇴했다.
건강이 좋았던 덕인지 꽤 장수했으며, 2017년 100세를 맞이했으나 이듬해 향년 101세로 사망했다. 큰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피에트 데 용 전 네덜란드 수상이 2016년 7월 27일 사망한 이후 도므어이가 세계 최장수 정부수반이 되었다고 한다.
개혁개방과 (비록 공산주의라는 한계 속에서도) 어느 정도 통제를 완화하는 등 여러 족적을 남긴 점에서 중국의 덩샤오핑과도 비슷하지만, 정작 덩샤오핑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잘 알려진 편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