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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카스 왕조 Δυναστεία τῶν Δουκῶν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시기 | 1059년~1081년 |
성씨 | 두카스(Δούκας) |
창건자 | 콘스탄티노스 10세 |
주요 황제 | 콘스탄티노스 10세 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 미하일 7세 파라피나키스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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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왕조. 저명한 군인귀족이었던 콘스탄티노스 10세가 창건한 왕조이며 11세기 동로마 제국의 위기를 상징하는 왕조이기도 하다.2. 상세
두카스 가문의 기원은 다른 동로마 제국의 귀족 가문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하지 않다. 이들은 스스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둑스(Dux)를 맡아온 가문이며 이 때문에 '두카스(Δούκας)'라는 성을 가지게 됐다고 주장했지만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대 로마 시대의 귀족 가문들은 7~8세기의 위기 시대에 거의 모두 사라졌고[1], 동로마 시대의 귀족 가문들은 가장 오래된 이들도 9세기 경에야 등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카스 가문은 소아시아 북동부 파플라고니아의 해안 지대에서 성장한 군인 귀족인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건 동로마 제국에서 알려진 귀족 가문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편으로, AD 842~855년에 재위한 섭정 황후 테오도라 시대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2]두카스 가문의 계보. |
11세기에는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콤니노스 왕조의 이사키오스 1세가 병으로 인하여 1059년 두카스 가문의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에게 제위를 물려줌으로써 드디어 황제를 배출하여 왕조로 등극한다. 이 시기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이후 제위를 내어준 상태였음에도 알렉시오스 1세의 등극을 위한 쿠데타에 참여하여 병력 및 자금 조달에 관여함은 물론 누가 황제가 될 것인지[3]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에 대해 안나 콤니니가 알렉시아스에서 '두카스 가문이 못 할 것이 무엇이며,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라고 평할 정도.
왕조의 초대 황제 콘스탄티노스 10세는 군인황제 이사키오스 1세의 쿠데타를 수면 밑에서 조력하였고, 이후 정권을 이양받아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스스로가 쿠데타에 관여하였음은 물론 자신도 쿠데타를 겪은 황제는 연이은 전쟁으로 악화 된 재정을 정상화하는 김에 군부를 견제하기 위해 군비를 감축하였는데, 마침 셀주크 제국의 공세가 이어지자 위태하던 동부전선은 1064년의 아니(Ani) 함락을 시작으로 무너지게 되었다. 결국 그의 오판으로 아나톨리아가 함몰되었으며, 말년엔 와병하여 국정이 반쯤 마비되게 하였다.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장남 미하일 7세는 아버지가 죽은 후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 에브도키아와 재혼하여 황제 지위에 오른 로마노스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한 후 간신히 셀주크 제국의 알프 아르슬란과 맺어놓은 평화협정을 깨버리는 실책을 저지른다. 이와 더불어 내전과 이민족의 침입이 이어지면서 각지의 영토가 침탈되었고,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미하일 7세는 얼마 후에 정권에 실망한 시민들과 니키포로스 3세에 의해 퇴위당하고 아내도 빼앗긴 채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꿋꿋이 살아남아 명문가의 지위를 유지했다. 콘스탄티노스 10세의 형제이자 부제(카이사르)였던 요안니스 두카스의 손녀인 이리니 두케나가 콤니노스 왕조의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와 결혼함으로써 이 두카스 가문의 지지가 알렉시오스 1세의 즉위와 이후의 위기 돌파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위세는 두 명의 두카스 황제들이 11세기에 실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4차 십자군 이후 난립한 대립 황제들이 너나할 것 없이 두카스와 콤니노스를 자칭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알렉시오스 1세 이후의 황제들이 대부분 그의 후손인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그 알렉시오스의 아내가 두카스이며 라스카리스 왕조의 데릴사위인 요안니스 3세조차 어머니가 두카스이다.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주요한 시조인 요르요스 팔레올로고스의 아내도 두카스로, 요르요스는 알렉시오스 1세의 동서가 된다. 앙겔로스 왕조마저 두카스와 깊은 친척 관계이므로, 다르게 보면 콤니노스 왕조를 뛰어넘는 황제들의 시조이다.
동로마 멸망 이후의 가계도는 확실하지 않지만 오스만 제국 통치 시기에 두카스 성을 가진 인물들이 간간히 등장하기도 한다. 예컨대 몰도바와 왈라키아의 공작 게오르게 두카스와 그 아들 콘스탄틴 두카스 등이 있다. 현대에도 그리스에서는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성씨 중 하나이며, 미국 이민자들의 성씨 중에도 가끔씩 찾아볼 수 있다. 현대의 인물로는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지냈고 미 대선에 출마한 경력이 있는 마이클 두카키스 등이 있다. 물론 같은 성일 뿐, 실제 두카스 왕조의 후손인지 알 수 없기는 하지만.
3. 두카스 왕조를 위한 변명
사실 이 왕조의 정책 방향 자체는 크게 틀리지 않았다. 특히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쿠데타를 최초로 성공시켜 제위에 오른 군인 황제 이사키오스 1세로부터 평화적으로 제위를 이양받고, 팽창되어 있던 군비를 감축했다는 점에서는 좋게 평가 할 수 있다. 이미 1025년의 군비가 전체 국가 재정의 7할을 차지한바 있고,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치세 즈음의 제국은 외적과의 연이은 전쟁으로 상당한 군비를 소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게다가 11세기 중반에 이르면 테마 제도에 의해 편성 된 테마군은 대부분 2~3선급의 전력으로 취급받고 있었고, 변경방위의 핵심은 파견 중앙군인 분견군이었다. 실제로 이후 등장한 콤니노스 왕조는 중앙군인 타그마군의 규모를 크게 늘리고 지방에는 수비군을 두어 방위를 맡게하는 대신 도로를 정비하고 해군을 증강해 기동력을 높이는 군제를 택한 바 있다.
문제는 기존의 주적이었던 파티마 왕조가 망조가 들어 남쪽으로부터의 안보위협이 줄어든 대신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과 페르시아의 셀주크 튀르크가 새로이 부상하여 결과적으로 안보위협이 증대되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혹은, 이를 예측했음에도 지나친 군축을 밀어붙였거나 말이다.
내부 갈등도 제대로 봉합하지 못했다. 군축에 반발하여 비협조적으로 나오던 군사귀족들 덕에 국방은 엇박자를 그리게 되었고, 결국 남이탈리아 제국령이 함몰되고 아나톨리아 중부까지 튀르크가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입지가 약해진 두카스 가문은 콘스탄티노스 10세 사후 콤니노스 가문 등 다른 유력가문의 지지로 로마노스 4세가 등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미하일 7세는 말할 것도 없다. 학자로서 뛰어나다는 평도 있었고 문신(文臣)들의 호감을 산 황제였지만, 당시 국가가 절실히 요구하던 군재(軍才)를 가지지 못했고 실제 정책 수립과 수행에서는 아마추어였으며 대외정책은 파멸적이었다. 튀르크와의 전쟁을 재개했으면서 비협조적이던 군사귀족들이 만지케르트 전투를 지켜보고 더더욱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는 가운데 국방을 내던지듯 맡겨버렸다. 그들의 수장인 로마노스 4세가 뜻밖에 살아돌아오자 처참한 말년을 선물해서 이러한 경향은 심화되었는데도.
결과는 대파멸이었다. 탁시스(Taxis)로 상징되는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외침과 물가폭등 등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국경을 지킬 군사령관들이 수도로 진군하는 것을 손놓고 지켜봐야했다.
4. 그 외
Crusader Kings II와 Crusader Kings III에서도 등장한다. 867년에는 일개 파플라고니아 공작이며, 1066년 시나리오부터는 제위를 먹고 있는데 이 가문 인물들이 가진 지나칠 정도로 충격적인 저질적 능력치(...) 때문에 영토의 넓이만으로는 강대한 동로마 제국이 상당히 높은 난이도를 가지는 원인이 된다. 때문에 관련 커뮤니티에선 암카스, 똥카스, 독카스 등으로 불리고 있다. 다만 1138년을 끝으로 본가의 대가 끊기며[4] 그 자리는 다른 가문이 이어받게 된다.서양권에서는 공작(Duke)과 단어가 비슷해서인지 동로마의 관직인 둑스(Dux)와 함께 두카스를 공작으로 오기하는 경우가 잦다.
[1] 생존투쟁의 시기이다 보니 학제가 박살났으며, 문맹률이 급증할 정도의 심각한 위기였다 보니 기록 유실 또한 많았다.[2] 다만, 두카스라는 성을 가진 가문은 7세기에도 등장하였으며 9세기에 등장한 두카스와 이후 등장하는 왕조 두카스의 세 두카스가 모두 다른 가문이라는 설도 있다.[3]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외에도 그의 형인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있었으나, 두카스 가문의 가주이던 요안니스 두카스 부제는 손녀사위인 알렉시오스를 지지하였다.[4] 실제로도 본가는 끊어지고 앙겔로스 왕조의 황제들의 이름처럼 피가 이어진 가문들이 두번째 성으로 쓰던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