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숭질 1435(세종 17) ∼1507(중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가(仲嘉)·중소(仲素). 할아버지는 우의정 박은(朴訔)이고, 아버지는 부윤(府尹) 박훤(朴萱)이며, 어머니는 구강(具綱)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정과로 임원준, 이극균 형제, 어세겸 형제 등과 같이 급제하였고, 권지로 승문원 정자, 예문관 대교, 사헌부 감찰, 사헌부 지평, 강원도도사, 병조 정랑을 역임하고 경기도도사를 거쳐 세조실록 편수관과 성균관 사예 행 세자시강문학으로 성종을 가르쳤다. 성종 즉위 후 1471년 사헌부 장령, 1472년 사간원 사간으로 있으면서 성종을 경연에 반드시 참석토록 하여 25년간 참석하였다. 정희왕후의 친정이 끝나고 1477년 대구부사로 나갔다. 대구부사 시절에 폐비윤씨 문제가 있어 후에 갑자사화에 무사할 수 있었다. 통례원 우통례 후 좌통례를 할 때 임금의 명을 받고 양성지, 노사신 등과 <팔도지지>,<동문선>을 합하여 <동국여지승람>을 완성하였다. 1484년 예조참의, 1485년 승정원 우부승지에서 1486년 좌부승지를 건너뛰고 도승지를 하였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 시묘살이를 하고, 조정에 나가 <삼강행실도>를 주자 인쇄하여 배포할 것을 건의하여 다음해에 반포하였다.
1489년 공조참판, 특진관이 되고, 1490년 호조참판에 이어 사헌부 대사헌,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91년 성절사로 중국에 가는 길에 여진족의 동태를 보고하여 성종은 그해 여진정벌에 나서게 하였다. 한성부 우윤을 거쳐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493년 호조판서가 되었고, 1494년 한성부 판윤을 하였다.
성종이 성군으로 불리우는데 대표적인 치적들을 간언하여 이루어낸 것 들이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형조판서, 전라도관찰사을 하고, 1497년 지중추부사 겸 지의금부사를 거쳐 1498년 호조판서 당시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1501년 공조판서, 체찰사로 하삼도를 순찰하였으며, 연산군이 사심없는 자를 순찰사로 천거하라 하여 순찰사가 되었다.
1503년 연산 9년에 특진관으로서 궁중의 사치가 심하니 아껴야한다고 직언하였으며, 연산 10년 갑자사화에 친인척과 지인들이 대거 부관참시, 사형, 유배 등을 당하였다. 피바람이 부는 사이 영의정 성준이 병으로 사직하고 정승자리에 유고가 생기자 연산군은 우의정을 천거하라 하여 우의정이 되었다. 좌의정 허침이 죽자 좌의정이 되었으며,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여러번 사의를 표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례 때에 백화를 신고 나왔고, 5만의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꿩 한마리를 임금에게 바치는 등 항거하는 모습을 비추어도 사직이 안되자 연산 12년에 말에서 떨어져 등청을 하지 않아 결국 경질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재 등용되어 영중추부사로 복권되었다. 중종이 등극하자마자 박숭질을 복권하라고 한 첫마디는 중종의 반정 후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한 것이다. 40대 젊은 관원들이 가득한 조정이라 산만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인데 노대신이 있어 우와좌왕하지 않고 일처리도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고 분위기 또한 엄숙해지니 조정은 곧바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중종 2년 73세에 세상을 떠나니 중종이 소찬을 먹고 쌀.베 등을 부의 하였다.
중종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데 중종의 호가 낙천으로 박은이 태종의 명으로 정자 이름을 지은 것에서 따왔고, 세자빈을 박씨 문중 박용의 딸을 간택하였다.
참판 박규, 신기전 미사일을 만든 중추원사 관찰사 박강은 백숙부이고, 영의정 구치관, 구수영은 외가 집안이며, 좌의정 어세겸, 어세공 형제와는 내종간이고 , 영의정 성현, 성희안 형제, 좌의정 허침, 허종 형제, 중추부지사 도총관 박원종 등은 모두 혼맥인척이다.
사후에 아들 조의 딸인 손녀가 종실 세조의 아들 덕원군 서의 손자요 연성군 지의 아들 이정에게 출가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기로 유명하였고, 예조참의 시절 예법을 연구하여 중종의 칭찬을 들었는데 책은 전해지지 않으며, <춘추>를 즐겨 읽었다. 시호는 공순(恭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