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22:35:15

화순탄광 사건

화순탄광 사건
화순탄광 노동자 학살 사건
날짜
1946년 8월 15일 ~ 1946년 11월 6일
지역
대한민국 전라남도 화순군
원인 미군정의 무자비한 노동자 탄압, 물가 상승과 쌀 부족으로 인한 노동자의 고통
목적 미군정의 지배체제 확립, 좌익세력 척결
사상자 사망 36명
부상 500여 명

1. 개요

1946년 전라남도 화순군에서 미군이 일으킨 민간인 학살

2. 배경

1905년 화순 동면 대지주인 박현경이 화순탄광을 열었으나 일제는 1934년 그 운영권을 빼앗았다. 해방이 되자 간부들이었던 일본인이 없어지고 노동자들끼리 자치위원회를 열어 스스로 운영한다. 화순탄광 자치위원회는 100%의 지지를 받아운영되고 있었다. 자치위원회 간부였던 심상기의 증언에 따르면 실무를 거의 모두 한국사람들이 해왔었기 때문에 금방 질서가 잡혀 오히려 일제때보다 생산량이 더 늘어났었다[1]는 등 성공적인 자주관리를 하고 있었다.

3. 미군의 강제 접수

화순군의 군민들은 인민위원회를 성립하였다. 이 위원회는 당시 80%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인민위원회는 자체적으로 남아있던 일본군을 무장해제시켰다. 이를 보고 받은 미군정은 화순을 위험지구로 판명하여 미군 부대 4~5백명을 화순에 파견했다. 또한 미군은 11월 미군대위 율러를 앞세워 탄광을 무조건 접수한다고 공포하였다. 이후 탄광소장으로 극우인사이자 서울에서 온 외지인인 임성록을 앉혔다. 그리고 노조 지도자들에게 위협[2]을 가했다. 또한 지도자들이 노동자를 잠재우지 못하자 남호진 외 3인의 간부를 해고시키고 노동자 백여명을 해고시켰다.

4. 노동자의 항의




[1] 월간 말, 1989. 1월호[2] 임금투쟁이나 파업을 할 시 징역 5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