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북양정부| 북양정부의 주요 파벌]] | ||
안복계 | 교통계 | 연구계 |
進步黨 |
Progressive Party |
<colbgcolor=#b69400><colcolor=#fff> 진보당 | |
창당 | <colbgcolor=#fff,#000>1913년 5월 29일 |
해산 | 1916년 |
창당인 | 량치차오, 탕화룽(湯化龍) |
이념 | 보수주의 오족공화 중국 내셔널리즘 입헌주의 중앙집권제 과거: 입헌군주제 |
후계 조직 | 중국민주동맹, 중국 민주사회당 |
[clearfix]
1. 개요
중화민국의 정당. 중화민국 북양정부 시기의 대표적 정당이었다.2. 역사
2.1. 창립 초기
진보당은 청나라 시기있었던 입헌주의 운동의 후신 세력이었다. 입헌주의 운동은 쑨원과 중국동맹회의 공화주의 운동과 다르게 청나라 황실을 유지하면서 근대화를 이륙하려는 세력이었다.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중국에 근대화의 뿌리가 될 헌법이 없기 때문에 봉건 사회가 벗어나질 못한다고 보았다.[1] 그렇기에 이들의 목적은 한족 내셔널리즘 공화정을 새우는 것이 아니라 헌법을 중심으로 중국을 개혁하는데에 있었다.그렇다고 이들이 수동적인 개혁활동에만 목을 맨 것은 아니다. 서태후의 무술정변으로 변법자강 운동이 무위로 돌아가자 이들은 보황회를 설립하고 서태후와 위안스카이를 실각시키고 광서제 정권을 복구시킬 계획을 새웠다. 그러나 여기서도 쑨원과의 입장차이로 연합전선이 붕괴하고 설상가상으로 국내에서 봉기를 준비하던 탕카이창 마저 체포되며 복위운동은 실패한다.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상황은 급변한다. 신해혁명이 터지자 입헌운동의 거두들은 정당을 만들어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기로 한다.[2] 량치차오와 탕화룽이 민주당을 설립하였으나 이들은 혁명의 주역인 국민당과 의석싸움에서 이길 수 없었고 리위안훙의 공화당[3], 장빙린의 통일당[4]과 연합하여 진보당을 창당한다.이들은 모두 강력한 중앙정부와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정당이었다. 량치차오는
2.2. 헌법토론회와 헌법연구회
국민당이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 쑹자오런 암살 사건 그리고 결정적으로 계축전쟁으로 위안스카이에게 와해되고 있는 와중에도 량치차오는 위안스카이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야당활동을 지속해 왔다.그러나 부원지쟁을 거치며 범진보당계는 당론이 둘로 분리된다. 당시 가장 큰 주제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문제였는데 리위안훙과 국민당은 참전 반대, 돤치루이는 참전 찬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량치차오는 이 전쟁이 독일, 오스트리아에 뺏긴 이권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라고 찬성하고 옛 공화당 출신 우팅팡은 리위안훙과 함께 이 전쟁이 국력 낭비이자 돤치루이의 독재를 위한 초석이라며 반대하게 된다. 탕화룽은 안복계와 친해지면서 참전에 찬성했다. 이런 갈등에 리위안훙은 장쉰에게 갈등을 중재할 것을 부탁하고 이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온다.
이런 혼란상에 일부 진보당원들과 국회의원들은 중화민국 호법정부를 지지하며 남하하였으나 량치차오와 지도부는 호법정부의 군정적 성격을 지적하며 북양정부에 남아있었다.
2.3. 연구계
장훈복벽을 진압한 공을 새운 돤치루이는 이제 아예 총통 리위안훙과 후임 총통 쉬스창을 찍어누르고 자신의 독재권력을 위한 신국회(안복 국회) 설립하기에 이른다. 부원지쟁이 결국 참전으로 끝이나자 탕화룽의 헌법토론회는 헌법연구회와 합당하며 연구계 파벌을 설립하며 선거에 나선다. 1918년 총선에서 제1당으로는 안복계, 제2당으로는 교통계 그리고 제3당으로 연구계가 선출된다. 그러나 신국회는 안직전쟁으로 폐기되고 1912년 총선때 당선된 구국회가 다시 복구된다.안복계, 교통계, 연구계를 제외하고도 민우사, 익우사, 신공화당, 민치사, 정학회 등 구공화당, 국민당 출신 소수 교섭단체가 난립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6] 이런 상황에서 차오쿤은 총통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 간단한 방법을 이용한다. 회선 사건으로 안그래도 혼란한 국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오쿤과 천춘쉬안은 서둘러 헌법을 만들게 된다. 그 과정이 얼마나 졸속이고 강압적이었던지 수많은 국회의원들이 쑨원의 호법운동에 합류했다.[7]
2.4. 국민혁명 이후
국민당의 2차 북벌로 연구계는 완전히 해산된다. 탕화룽은 신국회 선거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캐나다에서 국민당원에게 암살당했고 은퇴한 량치차오도 북벌 이후 2년 뒤 사망하며 구심점마저 제거되었다. 량치차오의 후계자들은 국외에서 활동하며 민주입헌당을 설립한다. 연성자치론 중심의 중국치공당, 사회주의 중심의 중국농공민주당과 함께 제3당 운동의 축으로 활동한다. 일부는 중국민주동맹에 합류한다.2.5. 현재
1945년 중일전쟁 종전 이후 이들은 귀국하여 중국 민주사회당을 설립한다. 한편 민맹은 장제스의 일당독재를 비판하는 운동을 계속한다. 민주사회당은 장제스의 3당 훈정안에 동참하고 민맹은 3당훈정을 끝까지 반대하다 국민당 정권의 탄압을 받는다. 민맹은 탄압을 피해 국공내전 시기 중국공산당의 민주당파에 합류하게 된다. 두 정당의 말로는 모두 비참했다. 민맹은 반우파투쟁으로 관제야당으로 전락하고 민주사회당 또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의 폐지 이후 이름만 남아있다가 2020년 공식적으로 해산한다.3. 영향
량치차오와 진보당은 오랫동안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의 지탄을 받아왔다. 만주족 전제왕정을 비호한 점과 군벌 정부인 북양정부에 합류하며 북양정부가 마치 민주 정부인척 둔갑하게 만든 점 때문에. 무엇보다 국민당과 공산당을 일당제 독재 정부로 비난해온 점이 이들의 평가를 낮추었다. 즉 형식상의 민주주의만을 추구하고 실질적인 개혁에는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8] 그러나 진보당과 연구계는 국민당과 차별화된 노선을 이끌며 미뤄지기만 하였던 헌법 제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며 군벌의 난립으로 얼룩진 북양정부를 정식정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국민정부의 수립 이후 수십년간 이어진 제3당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4. 소속 정치인
[1] 이는 헌법을 시행하기전에 봉건적 질서를 제거해야 한다고 본 국민당의 행적과 정확히 대비된다.[2] 당시 탕화룽은 가장 먼저 신해혁명에 합류하고 량치차오는 대세가 공화정으로 기울자 그제서야 지지선언을 하고 캉유웨이는 끝까지 청나라를 옹호했다.[3] 위안스카이의 영향으로 강력한 팽창주의, 실지회복주의 정당이었다.[4] 한족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정당이었다.[5] 그러나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자 량치차오는 차이어의 호국군에 동참하여 호국전쟁에서 토원파의 좌장 역할을 한다.[6] 당시 국민당 국회의원들도 의원직을 돌려받았는데 문제는 국민당은 호법정부를 만들며 북벌을 외치고 있었다.[7] 웃긴건 이 사태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천춘쉬안은 이후 남하하여 호법정부 정무총재를 지내며 호법정부의 노선을 무력통일론에서 연성자치론으로 변경시켜서 1차 호법운동을 사실상 끝내버렸다.[8] 물론 쑨원의 훈정 이론과 오권분립 그리고 공산당의 인민민주주의가 얼마나 실효성이 있었는지 또한 살펴야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