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01:53:37

회선 사건

曹錕賄選
The bribery scandal of 1923 Republic of China Presidential Election

1. 개요2. 배경3. 전개
3.1. 1923년 시점의 국회의 상황3.2. 국회의원들의 남하3.3. 회선과 차오쿤 헌법 제정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6.1. 인물6.2. 사건

1. 개요

정식명칭은 1923년 중화민국 대총통 선거로, 1923년 10월 5일, 직예군벌의 수령인 차오쿤이 뇌물을 뿌려 중화민국 총통에 당선된 일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쑨원중국국민당이 전개하던 호법운동의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 회선(賄選)이란, 뇌물 賄자를 써서 말 그대로 뇌물선거를 말하는 단어로 차오쿤이 일으킨 뇌물선거이기 때문에 차오쿤 회선(조곤 회선)이라고도 한다.

2. 배경

1922년 1차 직봉전쟁에서 안휘군벌, 봉천군벌, 중국국민당의 반직삼각동맹을 격파한 직예군벌은 천하의 패권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그동안 대총통 쉬스창에게 불만이 많았던 직예군벌은 우징롄을 비롯한 구국회의원들의 주장을 수용하여 쉬스창이 돤치루이의 어용국회인 안복국회에서 당선되었음을 지적하면서 구국회 회복을 주장, 쉬스창의 정통성 문제를 공격했고 결국 쉬스창은 직예군벌의 압력에 못 이겨 사퇴하여 2대 대총통이었던 리위안훙이 다시 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직예군벌이 국회를 회복한 것은 민주주의 복구가 아니라 직예군벌의 수령인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선출하는 데 있었으므로 리위안훙은 차오쿤의 당선 이전에 잠시 거치는 징검다리 총통에 불과했다.

차오쿤은 옌후이칭 내각을 핍박하여 붕괴시켰고 이어 왕충후이 내각 역시 자신이 총통이 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뤄원간 사건을 일으킴으로 붕괴시키고 만만한 장소증을 총리로 세웠다. 리위안훙이 제헌파와 합작하여 중임을 시도하자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옹립하려던 직예군벌의 보정파는 이에 반발하여 리위안훙을 위협하여 1923년 6월 13일에 하야시켰다. 리위안훙이 제거되고 내무총장 고능위가 대총통 대행을 맡게 되자 차오쿤은 본격적인 선거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페이푸를 비롯한 낙양파는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옹립하기 이전에 중국을 안정화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기 때문에 차오쿤을 서둘러 대총통에 옹립하는 것을 반대했다. 일부 지역에 한정적인 지배력만 행사할 수 있는 베이징 정부의 입장에서는 선거를 위해 많은 돈을 낭비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겼다. 낙양파에 속하는 소요남, 장복래 등은 차오쿤에게 일을 신중하게 하라고 조언했으나 대총통 선출과 헌법 제정을 통해 베이징 정부의 정통성과 권위를 회복해야 중국을 안정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차오쿤과 보정파는 막무가내로 총통 선거를 서둘렀다.

3. 전개

3.1. 1923년 시점의 국회의 상황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끝나고 구국회가 회복된 시점에서 차오쿤이 총통 자리를 쟁취하려 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었다. 당시 국회는 차오쿤을 추대하려는 차오쿤 옹호파와 차오쿤의 대총통 추대를 반대하는 차오쿤 반대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의원 의장 우징롄, 저보성 등이 이끄는 구국민당계의 익우사[1], 구 공화당원으로 구성된 중의원 부의장 장백렬 등이 이끄는 신공화당, 구 국민당원들로 이루어진 민치사[2], 과거 홍헌제제를 이끌었던 제제파와 교통계의 잔여세력이 합작한 헌정 토론회[3], 구진보당원들로 구성된 헌법 연구회 등이 대표적인 차오쿤 옹호파로 이 6개 주요 단체를 제외하고도 총 20여개의 단체가 차오쿤을 옹호했다. 이들이 차오쿤을 옹호한 이유는 당연히 정치적 이익이나 재물을 얻기 위함이었지만 후스의 경우, 군벌이 군사통치를 하려하지 않고 국회를 통해서 대총통 자리를 얻으려는 것 자체를 정치적 진보로 평가하기도 했다.

반대 진영에는 정학회, 안복계, 삼성의원구락부 등이 있었다. 정학회는 구중슈(谷鍾秀), 이근원 등이 이끄는 구국민당계 정당[4]으로 리위안훙의 중임을 지지했다. 안복계는 돤치루이쉬수정이 만들었던 안복구락부의 잔여세력으로 유은격 등이 지도자였는데 안복구락부가 1920년 안직전쟁의 결과로 해산당했으나 안복계는 당연히 직예군벌의 수령인 차오쿤의 대총통 선출에 반대했다. 삼성의원구락부는 만주의 동북 삼성 출신의 의원들로 구성된 파벌[5]이었는데 장쭤린의 원조를 받아 차오쿤의 대총통 선출을 반대했다.

차오쿤이 우선적으로 착수했던 작업은 총통 선거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여론이 차오쿤의 대총통 선출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의원들이 출석을 꺼렸는데 이에 차오쿤은 우징롄으로 하여금 매주 목요일마다 50원의 출석비를 지급하게 하였다.

3.2. 국회의원들의 남하

1923년 5월 13일 리위안훙이 사퇴하자 5월 14일 양원은 중의원 의장 우징롄이 사회를 맡은 가운데 연합 담회회를 열었다. 우징롄은 익우사에 우호적인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선출할 것을 제안했으며 차오쿤 옹호파 의원들은 국무원이 대총통 직무를 대행하여 대총통 선거 사무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저보성은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선출하는 것에 반대하며 직예군벌과 고능위 총리가 리위안훙을 핍박하여 하야하게 한 것을 항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차오쿤 옹호파들이 저보성 등의 발언을 저지하고 국무원이 대총통 직무를 대행한다는 결의를 발표하였다. 10월 16일, 양원은 연합회를 개회하여 13일 이후에 리위안훙이 발표한 명령은 효력이 없다고 의결했다.

국회 내부에서 리위안훙 하야에 대한 정쟁이 벌어지자 쑨원은 참의원 유성우를 북방으로 파견하여 국회의원들에게 남하할 것을 촉구했고 안휘군벌인 절강독군 루융샹도 의원들에게 남하하여 헌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톈진에서 각 의원들에게 여비로 500원을 지급하고 상하이에 도착하면 매월 300원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익우사 내부가 분열되어 우징롄 등은 베이징에 남아 익우사를 민헌동지회로 개칭하고 회선을 지지했지만 저보성 등 201명의 국회의원이 연명으로 6월 22일 연합회의 의결을 승인하지 않겠다는 전보를 전국에 통전하고 국회를 남쪽으로 옮기는 운동을 벌여 상하이로 남하, 반 회선 운동을 진행했다. 정학회도 헌정사로 개칭하고 상하이로 남하하여 반회선 운동에 동조했으며 민우사, 정학회, 안복계 소속의 여러 의원들도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7월 14일까지 상하이에 200여명의 국회의원이 모여들었다. 8월에 들어서는 상하이에 개회 정족수에 달하는 숫자의 국회의원들이 모여들면서 직예군벌 내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3.3. 회선과 차오쿤 헌법 제정

반직세력의 제헌운동에 맞서기 위해 차오쿤은 영미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일본 제국위안스카이에게 강요했던 21개조 요구의 무효를 선언하고 국회의장인 우징롄과 논의하여 국회의원들을 매수하기로 결정, 미국 은행단과 각성 성장, 독군들에게 선거 비용을 요구했다. 이에 소요남, 치셰위안, 옌시산이 각각 50만원을, 톈중위가 40만원을 차오쿤에게 송금했다. 여기에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프랑화의 가치 화락으로 고생하던 프랑스 측에서 의화단 사건의 배상금을 프랑이 아니라 달러로 상환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직예군벌은 이를 받아들여 총 7천만원에 달하는 국가적 손실을 초래한 대신에 선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또한 중법실업은행 영업재개를 도와준 대가로 200만원을 프랑스로부터 받았다. 또한 군경을 배치하여 의원들이 추가적으로 남하하는 것을 물리적으로 저지했으며 베이징에 잔류한 국회의원들에게는 매주 100원의 회의 출석비와 표 한장당 5천원의 표비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소식을 들은 국회의원들이 대거 북상하여 베이징에 모여들었다.

한편 베이징에선 총통 선거법이 제정되었고 중의원 임기가 1923년 10월 부로 만료되려 하자 양원은 각각 9월 7일과 9월 26일에 <의원의 직무는 차기 선거를 완료할 때까지로 법에 의하여 개회하기 하루 전날에 해제된다>라는 새로운 조항을 추가하기로 의결하여 중의원의 자동 해산을 막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모여든 국회의원은 874명 중에 555명이었는데 1923년 4월에 개정된 국회 조직법은 <양원의 총의원 5분의 3 이상이 출석하지 않으면 개회할 수 없으며,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없으면 의결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국회 조직법에 따르면 법정인수가 583명이었으므로 규정상 국회는 개회하지 못해야 했으나 중의원 의장 우징롄은 590명의 국회의원이 모였다는 허위발표를 한 후 1923년 9월 12일 예비 총통선거회를 개최하여 국회의원들에게 500원의 출석비를 지급하고 표값을 논의했다.

하지만 베이징에서도 차오쿤 찬성파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안복계 의원들은 뇌물을 뿌려 차오쿤에게 투표하지 말 것을 독려했고 동삼성의원구락부도 회선 실행을 방해했다. 또한 잔류한 국회의원들 사이에서는 제헌이 우선이라는 주장과 총통 선거가 우선이라는 주장이 갈렸는데 결국 논의 끝에 총통 선거와 헌법 제정을 나누어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1923년 10월 1일, 각 국회의원들에게 5천원 어치의 수표가 지급되었으며 일부 사람들이 더 많은 표값을 요구했기 때문에 최대 1만원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총 300만원에 대항하는 금액이 국회의원들에게 표값으로 지급되었다.

10월 5일, 공식적으로 593명의 의원이 출석한 가운데 선거회가 열렸다. 이 투표에서 막대한 돈을 뿌린 차오쿤은 총 480표[6] 를 얻어 규정상 필요한 표인 443표 이상을 얻어 대총통에 당선되었고 1923년 10월 10일 중화민국 3대 대총통에 취임했다.[7] 이와 별개로 헌법 제정이 진행되어 10월 4일 헌법 회의가 열렸으며 10월 8일 202차 헌법회의가 열려 헌법 3독회가 통과, 10월 10일 차오쿤의 취임에 맞추어 차오쿤 헌법이라 불리는 중화민국 사상 첫 헌법이 발표되었으나 실행되진 않았다.

4. 결과

차오쿤의 당선에 활약했던 우징롄은 너무 큰 공을 세워 차오쿤의 측근들의 경계를 받았기 때문에 민헌동지회 내부에 우징롄을 배척하기 위한 헌정당이 조직되어 실권하고 톈진으로 떠나야 했다.

1922년 영풍함 사건과 구국회 회복 이후 사실상 호법운동을 포기하고 있던 쑨원은 이 회선 사건 이후로 호법운동에 완전히 희망을 잃고 혁명정부를 선포, 북벌을 통해 혁명을 진행하게 되었고 중국 내부의 혁명을 위해 중국 내부에서 합작 상대를 찾던 중국공산당1차 국공합작을 결정하게 된다. 회선은 중국의 지식인계로 하여금 북양정부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완전히 잃게 만들었으며 기존 중화민국의 법통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중국 국민당은 북벌을 통해 새로운 정치질서를 창출하려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는 직예군벌을 비롯한 다른 군벌들에게도 마찬가지라서 돤치루이는 임시대총통이라는 호칭 대신 임시집정을 택하면서 새로운 법통을 조직할 의지를 천명했고 이후 선후회의 개최를 통해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한편 차오쿤의 총통 당선은 직예군벌 내부의 분열을 야기하여 보정파와 낙양파의 분열이 가속화되었으며 절강독군 루융샹 등 반직 세력들은 회선 사건을 구실로 차오쿤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반직 세력을 결집하였다. 결국 1924년 루융샹과 치셰위안, 쑨촨팡 사이의 강절전쟁이 발발하였고 이를 빌미로 북방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던 장쭤린이 개입하여 2차 직봉전쟁이 발발, 직예군벌이 몰락하게 된다.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 국민혁명운동의 구조분석, 민두기 등 공저, 지식산업사.
  • 民國 元年을 전후로 한 '約法'과 孫文의 護法運動, 이승휘, 중국근현대사연구 63권 63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조곤의 부패선거(1923년)과 법통문제의 종식, 윤혜영, 동양사학연구 28호, 동양사학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1] 150여석 규모.[2] 100여석 규모.[3] 40~50석 규모.[4] 40~50석.[5] 50여명 규모.[6] 여담으로, 쑨원이 33표, 탕지야오가 20표, 천춘쉬안이 8표, 돤치루이가 7표, 우페이푸가 5표를 얻었다.[7] 계임된 대총통은 대수를 따지지 않으므로 선거에 따라 대총통에 오른 위안스카이,쉬스창에 이은 3대 대총통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