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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0000>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조직국장 그레고어 슈트라서 Gregor Straßer | |
출생 | 1892년 5월 31일 |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가이젠펠트 | |
사망 | 1934년 6월 30일 (향년 42세) |
독일국 베를린 | |
정당 | |
최종계급 | 독일제국군 육군 중위 (철십자 훈장 수여) |
시민권 | 독일인 |
학력 | 뮌헨 대학교 (약학 / 학사) |
가족 | 부모님, 동생 오토 슈트라서 |
경력 | 군인 약사 돌격대 바이에른 지역 지휘관 바이마르 공화국 국회의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선전국장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조직국장 화학제약회사 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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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약사 출신 정치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간부 직위를 수행했다. 그의 아우 오토 슈트라서 역시 간부였으며 형이 죽은 이후에 독일을 탈출하여 반(反) 히틀러 운동을 벌였다.2. 생애
1892년 독일 제국의 바이에른 왕국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에서 시험을 치른 뒤 1910년부터 약사 견습생으로 일하였고, 뮌헨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학업을 중단하여 독일 제국군 육군에 입대해 대전에 참전하였다. 전쟁 중 장교로 현지임관하여 중위로 복무하고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는다. 종전 후 전역해 1918년 뮌헨 대학을 졸업하며 본격적으로 약사로 일했다.1919년부터 우익 운동을 했으며, 1920년에 돌격대에서 나치당에 입당하였다. 1921년에 히틀러와 처음 대면하게 되었고, 오버바이에른 지역 나치 돌격대 지휘관직을 지냈다. 1923년 뮌헨 폭동[1]에서 돌격대의 한 부대를 이끌고 참가하였다. 폭동 실패 후 벌어진 재판에서 1년 반의 징역형을 받았으며, 1924년 5월에 가석방 되었다. 뮌헨 폭동 이후 1924년 6월 12일 나치당 잔당 세력과 독일 민족자유당이 합류한 국가사회주의 자유 운동에 참가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25년 히틀러가 출옥하고 나치당을 재결성하기로 하자, 노동자 계층의 권익을 우선시하는 성향이라 히틀러의 명령으로 노동자 계층이 많은 북독일 지역에서 나치당을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고 북독일 지역에서 전권을 위임받는다.슈트라서의 지도 하에 나치당은 북서독일 지역에서 지부수가 증가하였고 세력이 강화되었다. 북서독일은 바이에른과 달리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강세를 보이는 지역이 많아 노동자 계층의 지지가 필요했다. 원래 슈트라서 형제의 성향도 나치당 내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노선 분파 중에 사회주의 우위 노선이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서 좌파적 성향을 띄었고, 이 때문에 나치당 베를린 지역구는 반 자본주의 사상을 강화하였으며, 이 강화 노선이 민족주의를 더 중시한 헤르만 괴링과 빌헬름 프리크 등 우파 성향의 뮌헨의 중앙당과의 대립을 일으키기도 했다. 히틀러는 초기에는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1926년에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당내 강령이 지나치게 우편향되었다는 의견을 내고 당헌 개정을 요구했으나, 나치당 주류인 뮌헨에선 이에 극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국 당내 노선 차이는 중앙당에서 그레고어의 의견이 무시되고 히틀러가 "내가 곧 이데올로기"라는 메시아 선언을 하면서 마무리되는데, 실제론 뮌헨 중앙당의 민족주의 계열이 당내에서 세력이 컸고 같은 좌파 성향이라고 여긴 북독일 베를린 지역의 파울 요제프 괴벨스조차 지도자 원리에 승복해버렸기 때문에 슈트라서의 당내에서 입지는 점점 약해졌다.
그러나 굴복 직후에도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히틀러에게 낯간지런 찬양사를 쓸 정도로 히틀러에게 반기를 들진 않았다. 직접 당내 강령 유인물을 회수하며 갈등보단 지도자에 대한 충성으로 일을 덮어버린 것. 석달 후 슈트라서는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히틀러가 직접 문병하여 오랫동안 독대하며 깊은 대화를 나누며 갈등은 일단 봉합되었다. 반면 동생 오토 슈트라서는 이런 나치당의 반응에 반발하여 당을 탈당하고 민족볼셰비즘 쪽으로 노선을 바꾼다.
슈트라서는 1927년 나치식 경례가 퍼져나가는데도 일조했다. "하일 히틀러"는 '지도자에게 개인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충성의 맹세이며 지도자에 대한 깊은 사랑과 국가사회주의 운동에 바치는 내면적 헌신'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주군과 가신!
지도자와 동지들의 끈끈한 유대야말로 귀족적이면서도 민주적인 독일의 유서 깊은 전통인데 그것은 바로 나치당 구조의 본질이기도 하다. 벗들이여, 오른팔을 높이 들어 나와 함께 자랑스럽게 외치자!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겠다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치겠다고! "하일 히틀러!"[2]
이후 슈트라서는 나치당 선전국장을 맡으며 북독일 노동자 계층에 파고들었다. 나치당 기세는 전국적으로 정체인 가운데 1928년 벌어진 선거에서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되지만 이 해 당선된 나치당 의원수는 12명에 불과할 정도. 선거에서 나치당의 지지율은 오히려 전보다 더 떨어졌지만 골수분자들은 훨씬 늘어나 맥주집 폭동 시절에 비하면 당원 수가 두 배나 늘어난 10만명에 달했다. 이런 세력은 훗날 나치당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지도자와 동지들의 끈끈한 유대야말로 귀족적이면서도 민주적인 독일의 유서 깊은 전통인데 그것은 바로 나치당 구조의 본질이기도 하다. 벗들이여, 오른팔을 높이 들어 나와 함께 자랑스럽게 외치자!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겠다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치겠다고! "하일 히틀러!"[2]
이후 슈트라서는 선전국장을 사임하고[3] 당내 업무를 총괄하는 조직국장 자리로 이임했고, 1930년경부터 나치당이 경제 위기를 기회삼아 원내 제2당이 되며 정치적으로도 거물이 되었다. 가톨릭 중앙당 하인리히 브뤼닝과의 정책 연합을 시도하기도 했고, 나치당 내 거물 국회의원으로 여러 곳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브뤼닝의 가톨릭 중앙당 뿐만 아니라 온건우파 부르주아 정당들 사이에서도 신뢰할 만한 인물이란 평을 얻었다.
1932년 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총리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접촉해와서 연정을 제안하여[4] 이를 고려했는데, 이 사실을 안 히틀러의 격노를 사서 결국 당직과 국회의원직을 모두 사임하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2.1. 숙청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 내각이 성립했다. 당시 슈트라서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독일에 머물고 있었다. 당무에는 다시 복귀하지 않고 화학제약회사 이사직으로 스카웃되었다. 그는 정계 동료를 만나기를 거부했고, 동생 오토가 만든 정치단체 흑색 전선에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1934년 6월 18일 루돌프 헤스에게 편지를 보내 히틀러에게 변함없는 충성심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2주도 지나기 전인 6월 30일, 장검의 밤 사건 당시 게슈타포에 납치되었으며, 2시간 뒤 감옥에서 사살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발표되었다. 동생 오토는 국외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다.
에른스트 룀과 패키지로 살해되고 좌파 성향이라 룀과 정치적 성향마저 유사했다고 곧잘 치부되지만, 룀을 비롯한 당내 과격 좌파와 슈트라서의 정치 노선은 전혀 달랐다. 룀과 돌격대는 반동 척결을 주장하며 사회혁명을 부르짖은 과격 좌파였고, 슈트라서는 반자본주의 성향은 있었으나 비교적 온건한 노동자 권익 중시 성향이었으며[5], 정치적 행보로는 우파 부르주아 정당과 연정을 주도할 정도로 유연성이 있었다. 당연히 둘은 서로 사이도 좋지 않았고, 아예 슈트라서가 룀이 동성애자인 점을 비꼬아 룀을 암퇘지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3. 평가
나치당 내부에서 좌파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것은 현재 기준의 좌우 구별 스펙트럼과 거리가 멀다. 반자본주의 성향이라 좌파로 분리되긴 하는데 나치당 내 반자본주의와 반공주의는 반유대주의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 아돌프 히틀러에게 변함없는 개인적 충성을 바쳤고 일종의 음모론인 반유대주의에도 반대하지 않았다.결국 나치당 주류인 민족주의 세력과는 다른 점이 많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레고어 슈트라서도 나치이고, 히틀러 개인의 숭배까지는 나가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히틀러를 천재이자 지도자로 인정하며 그를 대체할 인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종합적으로 보면 여느 나치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인종주의자였으며, 히틀러에게 바치던 개인적인 충성심은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개인적인 능력으론 당내 행정에 관해서는 탁월한 업무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1920년대의 나치당 제2인자는 외부에서 보기엔 괴링이 아니라 그레고어 슈트라서로 여길 정도.
그러나 정치인의 필수 능력인 연설에선 별 재능이 없었다. 나치당의 베를린 관구 기관지인 캄프(kampf) 출판사의 여러 출판물 주필도 맡았지만 형편없이 안 팔려서 괴벨스가 이런 약점을 발견하고 자신이 따로 출판물을 만들어버릴 정도. 결국 연설 실력에서도, 글 쓰는 능력에서도 괴벨스에게 철저히 밀린 슈트라서는 선전국장 자리도 뺏겨버리고 베를린 관구도 괴벨스에게 넘어가는 등 괴벨스에게 당내 실권을 잃게 되었다.
4. 슈트라서가 정권을 잡았다면?
일단, 괴링이나 힘러 등의 당내 우파를 숙청하고, 소련과 어느정도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나치당을 지원하던 몇몇 도움 안되는 기업을 소규모로 국유화했을 것이며, 소련같은 사회주의 국가와 오히려 더 친선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5.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19 - 1920 | 정계 입문 |
| 1920 - 1923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23 - 1924 | 징역형으로 인한 탈당 가석방으로 정계 복귀 |
1924 - 1925 | 입당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25 | 나치당 복당을 위한 탈당 |
| 1925 - 1934 | 복당 정계 은퇴 숙청 |
6. 여담
하인리히 힘러를 잠시 비서로 두었던 적이 있다. 무능해서 힘러가 짤렸다는 낭설이 있지만, 오히려 슈트라서가 나치당 선전국장이던 시절 힘러는 튀링겐과 오버바이에른 지역에서 한 지역에만 집중해서 유세하는 아이디어를 내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힘러는 윗사람들의 눈에 들어 출세하게 된다.나치당 주요 인물 중에선 괴링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앙숙이었다. 괴벨스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비슷한 좌파성향이어서 슈트라서가 일종의 멘토 역할을 하기도 했었지만, 괴벨스가 주류와 타협하고 히틀러에게 승복하자 불편한 사이가 되었으며 이후 베를린시당을 놓고 갈등을 빚으면서 서로 라이벌이 될 정도로 사이가 악화되었다. 나치당 과격 좌파 에른스트 룀과도 성향이 맞지 않았는데, 슈트라서는 노동자 권익 중심의 현실참여형 온건 성향이기 때문. 기억해야 할 건 상술한대로 좌니 우니 하는 것은 상대적 성향일 뿐이고, 1920~30년대 독일기준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