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2:31:22

에른스트 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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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율리우스 귄터 룀
Ernst Julius Günther Röhm
파일:Ernst Julius Röhm.jpg
출생 1887년 11월 28일
독일 제국 뮌헨
사망 1934년 7월 1일 (향년 46세)
나치 독일 뮌헨
정당
서명
파일:에른스트 룀의 서명.svg
계급 중령 (볼리비아군)
대령 (독일 제국군)
참모장 (돌격대)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서훈 철십자 훈장

1. 개요2. 출생과 젊은 시절3. 제1차 세계 대전4. 1차 세계 대전 직후5. 돌격대 참모장6. 나치당 내 분파 갈등7. 토사구팽의 서막8. 장검의 밤9. 동성애10.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Mein Führer...(총통 각하…)"
룀의 유언

에른스트 룀은 초기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돌격대(SA)의 간부였다.

룀은 나치당 초기의 급진 사회주의 성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그 때문에 보수층의 지지를 잃거나 나치당 내에서 히틀러의 잠재적 경쟁자로 떠오를 것을 우려하여 숙청당하였다.

2. 출생과 젊은 시절

룀은 1887년 11월 28일 뮌헨 태생으로, 아버지는 철도관리직 공무원이었다. 1906년 바이에른의 막시말리안 김나지움을 졸업했고, 바이에른 육군 제10보병연대, 일명 프린츠 루드비히(Prinz Ludwig) 연대에 입대하였다. 1908년에 바이에른 뮌헨 사관학교를 나와 소위로 임관하였다.

3.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룀은 서부전선에서 종군했으며, 1916년에는 바이에른 전쟁성에 임시 근무했다.

로렌 지방[1]에서 부상을 입었으며, 베르됭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이 부상은 코 윗부분에서 시작해 윗뺨으로 총알이 관통한 큰 부상이었고, 이후 룀의 얼굴에는 큰 흉터가 남았다.

북부 프로이센의 귀족 출신이 지배하던 독일 제국군의 상층부와는 이질적인 남부 바이에른 평민 출신 장교였다. 이런 출신 배경 때문에 후에 그는 장교 출신답지 않게 프로이센 귀족 출신이 지배하는 군 지휘부를 증오하게 되고 이를 자신의 휘하에 놓으려고 했다. 또한 나치당 내에서 보인 귀족과 자본가를 미워하는 좌파적인 성향도 여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4. 1차 세계 대전 직후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되었고, 독일군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10만으로 제한되지만, 여기에 남는 것을 허락받은 것으로 봐서는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듯하다. 이 무렵 독일군은 군대 해체로 남게 된 무기를 민간에 넘겨서 준군사조직민병대를 조직하려 했고, 룀은 대량의 무기를 모아서 비밀 무기고에 보관한 다음 여러 민병대와 향토군에 보급했다.

룀은 현역군인 신분으로 베르사유 조약으로 부대가 해체되어 사실상 바이마르 공화국의 법외 위장 군인 집단인 자유군단에 연계하여 활동하였고 이어 나치에 가입했다. 그는 나치의 초창기 멤버들 중 하나로서 공산당 조직과 싸우거나 유대인에게 테러를 가했고, 또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료가 되었다.

1923년 11월 뮌헨에서 히틀러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영향을 받아 뮌헨 폭동을 일으켰으나 시원하게 망했다. 룀은 현역군인으로서 여기에 무기를 지원하기로 했는데, 때문에 룀도 함께 체포되어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받고 불명예 제대 처분을 당했다. 본래 중형이 내려져야 하지만 폭동과 테러가 난무하던 바이마르 시절 정치범들은 또 반발로 인한 폭동과 정부요인 대상으로 한 테러를 염려하여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물론 좌익 폭동이 더 엄격하게 다뤄지긴 했지만 도긴개긴이였다.

그러나 룀이나 히틀러는 이런 솜방망이 처벌로 받은 형기를 제대로 복역하지도 않았는데, 룀의 경우 당시 법원의 안이한 처사로 준법서약만 하고는 즉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히틀러가 옥중에서 나의 투쟁을 저술하는 동안 룀은 불법화된 SA 대신 "프론트반"이라는 합법 조직을 만들었다. 나치당은 "민족사회주의자유당"이라는 이름으로 선거에 나섰고 룀도 의회에 진출했으나, 정쟁에 휘말려 그 자리를 금세 내놓고야 말았다.

1928년볼리비아 정부의 요청을 받아서 일시적으로 남미로 떠나, 군사고문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5. 돌격대 참모장

1930년 9월 히틀러가 SA를 장악하여 수장인 최고지도자가 되었고,[2] 덕분에 다음해 1월에는 룀이 SA 참모장을 맡게 되어 실질적인 수장이 되었다.

거리가 실업자와 불만분자로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에 돌격대에 들어오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어났으며, 돌격대의 수는 30년에는 7만이었다가 31년에는 17만명, 1933년 기준 나치당원은 40만 명 정도였으나 돌격대원은 300만 명에 달했다. SA는 나치당과는 독립된 준군사조직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도 SA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격대의 지도자인 룀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참모장이 된 룀은 측근을 지휘부에 앉히고 조직 내에 급진적인 사상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SA는 당 인사 경호임무를 SS에 넘겨주고 본격적인 정치깡패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들은 나치당에 적대적인 공산주의자나 유대인을 두들겨 패고 다녔으며, 반대 의사를 표하는 학자, 언론인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당시 룀은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SA는 노동쟁의에 자주 개입하여 노동자 편을 들었다. SA의 이런 행동으로 나치는 좌파 정당들의 지지기반을 잠식할 수 있었으나, 무분별한 폭력성과 과도한 음주, 그리고 룀 자신을 비롯한 SA 수뇌부의 동성애적 경향과 그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당내 보수세력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룀은 서로를 총통 각하(Mein Führer)가 아니라 (Du)[3]라 칭했다. 다른 이들은 슬슬 히틀러를 총통 각하(Mein Führer)라고 높여 부르고 있었으며, 오직 룀과 나치당내 초기 가입자나 히틀러의 군대 고참이나 전우, 일명 '노전사'이라 불리는 소수만이 총통을 감히 너(Du)라고 칭할 수 있었다. 심지어 룀은 히틀러를 아돌프라며 직접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에른스트 룀은 원래 히틀러의 군대 시절 상관이었기 때문이다.

6. 나치당 내 분파 갈등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고,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헤르만 괴링이 기존에 자신들을 탄압하던 주 경찰 간부들을 해임하고 이 자리에 돌격대 간부들을 임명하면서 SA는 법적으로 경찰에 준하는 지위에 올랐다. 나치가 힘을 얻은 만큼 SA도 기고만장해져, 지방 관청에 들이닥쳐 행정을 나치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룀과 돌격대는 이제까지 해 오던 대로 독일을 더 크게 변화시킬 작정을 하고 있었지만, 히틀러는 룀의 생각대로 독일을 바꿀 마음이 없었을 뿐더러 돌격대를 쓸데없어진 사냥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룀의 사상에 있었다.

그는 나치당의 사회주의 분파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었으며, 사회주의적인(Sozialistische), 노동자(Arbeiter) 등 사회주의적인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이 분파의 성향은 대체로 유대인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 지배를 선호했다. 특히 제2제국 시대부터 내려오는 귀족들의 자산을 몰수하여 재분배하기를 원했고, 룀은 반동세력에 맞선 제2의 혁명을 주구장창 부르짖었다.

히틀러의 집권을 도운 자본가 세력은 이를 큰 위협으로 여겼다. 히틀러는 자본가들에게 제2의 혁명은 없다라고 말하며 안심시키려 했지만, 돌격대의 출신 성분을 바꿀 순 없었다. 상당수가 노동계급 출신인데다 전직 공산주의자가 득실거리는 이들은 스테이크[4]와 같았다. 결국 권력을 잡은 히틀러가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시행하지 않고,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 SA에게도 보답하지 않자 이들은 곧 실망하였다. 심지어 룀은 돌격대 지도자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히틀러의 정책을 비난하기도 하였다.[5]

더더욱 위험한 것은 국군(Reichswehr)을 바라보는 300만 SA의 시선이었다. 룀과 SA 수뇌부는 구 프로이센 왕국 출신 융커들이 주름잡는 국군을 아주 싫어했으며, 혁명정신이 떨어지고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취급했다. 때문에 룀은 국방장관이 되고, 군대를 SA에 합병하여 진짜배기 인민군을 창설하고 기존의 국군에는 기껏해야 신병의 소집과 훈련 정도의 역할만 남겨두려 했다.[6] 당시 돌격대는 5개의 돌격대 상급집단(군단에 해당)과 18개의 돌격대 집단(사단에 해당)으로 구성되어 정규군의 5배에 달했고, 지휘관들도 전직 군인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하려고 하면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의 깊은 역사를 가진 국군 수뇌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거리에서 쌈박질만 해대며 수뇌부라는 자들은 동성애나 저지르는[7] 오합지졸들 따위에게 국군을 들어다 바칠 의사 또한 전혀 없었다. 때문에 군과 SA의 갈등은 깊어져 갔으며, 히틀러도 물론 국군 수뇌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권력의 안정화를 위해 군부를 휘어잡을 필요를 느꼈기에 룀의 노선과는 갈라서게 되었다.

7. 토사구팽의 서막

당시 독일 대통령은 86세 고령의 육군 원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장군이었다. 히틀러가 그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군부를 휘어잡을 필요가 있었고, 때문에 어떻게든 SA의 영향력을 줄여야 했다. 이 때문에 룀은 히틀러에게 강하게 항의했고, 막무가내로 SA의 무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는 반란 기도처럼 보일 소지가 충분했으며, SA의 군부에 대한 타협 시도도 계속 결렬되고 있었다.

1934년 4월 11일, 나치와 군부는 힌덴부르크 사망 이후의 방안을 논의하였다. 히틀러는 SA 축소와 룀의 영향력 억제, 군의 지위 보장과 군비 확장을 대가로 차기 대통령직 승계에 대한 지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군부와 자본가들은 여전히 SA를 싫어했고, 6월에는 급기야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상급대장을 통해 SA와 군부 간의 긴장이 지속될 경우 계엄령을 선포할지도 모른다는 최후 통첩까지 받게 되었다. 히틀러는 한낱 아첨꾼에 불과해 보이던 블롬베르크까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으며, 힌덴부르크 대통령 또한 이 경고를 확실히 하자 히틀러는 결국 룀의 처단을 결심하게 된다.

8. 장검의 밤

히틀러는 룀을 처단하기를 매우 주저했던 것처럼 보인다.[8] 그러나 당 내에서 룀을 반대해 오던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 등은 룀의 처단을 벼르고 있었다. 괴링은 게슈타포를 힘러 휘하로 전속시켜 SA의 반역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캐내게 하였다.

힘러의 SS와 그 휘하의 보안국(SD) 국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룀이 프랑스에게 뇌물 2000만 마르크를 받고 6월 24일 히틀러 정권을 SA로 전복하려 했다는 거짓 증거를 만들었다. 히틀러는 괴링, 힘러, 하이드리히 등이 그동안 만들어온 살생부를 바탕으로 SS에 총동원 명령을 내렸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동안 룀과 동료들은 바트비제로 휴가를 떠나 있었다. 6월 28일 히틀러는 룀에게 전화를 걸어 회의를 위해 6월 30일까지 모든 SA지휘관을 바트비제에 소집할 것을 요구했고, 룀은 별다른 의심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운명의 30일이 밝자, 히틀러는 직접 바트비제에 도착하여 힘러 휘하의 SS를 동원, 룀과 SA 지휘관들을 일망타진하였다. 히틀러는 자고 있던 에른스트 룀에게 "룀, 너를 체포한다"라고 말했다.[9] 룀은 경악하여 반역을 부정했지만 히틀러는 이미 방을 빠져나간 뒤였다. 체포된 후 다른 돌격대 간부들과 함께 뮌헨의 슈타델하임 형무소에 보내진 룀은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돌격대 간부 6명의 총살형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룀은 이 날 처형되지 않았는데 히틀러는 "룀의 그 동안의 공적을 생각해서 형을 면하게 해주었다"라고 술회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베를린으로 돌아간 뒤 그의 구명의지를 힘러괴링이 반대했기 때문에 7월 1일 정오 경 형집행으로 룀은 끝내 살아남지 못한다.

히틀러는 후에 다하우 강제수용소장이자 악명높던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의 창설자가 되는 테오도어 아이케에게 룀에게 자결기회를 주고 만약 자결하지 않으면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오후 3시경, 아이케는 부하인 미하엘 리페르트와 함께 슈타델하임 형무소에 있는 룀의 독방을 방문했다. 아이케는 룀에게 "당신은 사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총통은 그대에게 최후결단을 위한 기회를 주었다."라고 말하며 룀의 체포 및 그가 반역자였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는 나치당 기관지와 자결용으로 한 발의 탄환이 들어있는 권총을 두고 독방에서 나갔다. 기관지를 읽고 상황을 파악한 다음에 알아서 자결하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룀은 신문을 다 읽고도 자결하지 않았으며 10분을 기다려도 총성이 울리지 않았기에 아이케 일행은 다시 룀의 독방으로 들어갔다. 룀은 권총을 내버려두고 가만히 있었다. 이에 아이케는 권총을 회수한 다음에 룀에게 웃통을 내놓으라고 지시했다. 룀은 할 말이 있다고 외쳤으나 아이케는 듣지 않고 리페르트에게 룀을 쏘라고 명령을 내렸고 리페르트는 룀을 향해 총 2발을 쏘았다. 총에 맞은 룀은 마루에 쓰러지면서 총통 각하...(mein Führer...)라고 외치면서 절규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이케는 "당신은 그걸 더 빨리 말했어야 했다."라고 이야기했고,[10] 룀이 아직도 숨이 붙어있었기에 다시 한 발을 더 가슴에 쏘아 그를 살해했다.[11]

SA 숙청의 표면적인 이유는 반란음모 혐의였지만, 이는 처형 며칠 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6월 30일에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으로 나치당 내의 좌익 계열은 일소되었으며, 나치당 좌파의 영수인 그레고어 슈트라서도 이때 암살되었다. 이를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 사건이라 한다. 장검의 밤 때 죽은 사람들 중에는 나의 투쟁의 편집자도 있었고 심지어 대통령 힌덴부르크의 측근이었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도 있었는데 즉 당내 좌파뿐만이 아니라 당내 우파 중 수뇌부에게 밉보인 자들 및 평소 정권에 거슬렸던 인물들도 동시에 숙청된 것이다.

초법적인 숙청과 집단처형이었지만, 이미 돌격대의 평판이 너무나 나빴기 때문에[12] 일반 시민들은 오히려 히틀러가 나라의 기강을 되찾아주었다고 환호하며 히틀러의 조치를 대단히 환영했다.

9. 동성애

에른스트 룀은 동성애자였다. 그는 15세쯤 된 '어린 소년'을 좋아했으며, 자신의 어린 애인에게 시까지 써주었다고 한다.[13] 룀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큰 거리낌이 없었고, 동성애자라는 비난에[14] 히틀러는 "돌격대는 신사들의 무리가 아니라 군대이다", "개인의 사생활에 관심 없다" 라며 그의 성적 지향에 대해 개인사라는 투로 말했다.

다만, 원래 룀의 성적 지향은 나치당 내부에서는 알려져 있어도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다 사민당에서 나치를 공격하기 위해 히틀러의 최측근인 룀의 성적 지향을 이용했고, 이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끝에 룀은 스스로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서한들을 공개했다. 어쨌든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독일이 그나마 동성애에 대해 열려있던 축이었지만, 이 당시에도 동성애에 대해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룀은 대중들에게 비호감 대상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장검의 밤 이후, 나치는 당 내부는 물론, 사회적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고 매년 8천명 이상의 성소수자들이 체포, 또는 탄압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베를린 검찰은 정보를 입수하여, 베를린의 한 성(性) 장애 전문의의 가택 수색에 나섰다. 그곳에서 룀이 보낸 편지가 여러 통 발견되었는데, 편지에서 룀은 자신의 동성애를 자유롭게 고백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여성들은 무시무시한 존재이며 특히 그를 사랑한다고 쫓아다니는 여자들이 지긋지긋하다고 썼다. 그리고 그는 '친애하는 의사 선생님'에게 동성애 상대가 없다는 불만을 털어놓으면서, 그에게 자신의 별자리를 확인해줄 것을, 즉 애정 문제의 별점을 쳐 달라고 호소했다. 검찰은 "반자연적 방종" 혐의로 수사를 시작했다. 수사가 증거 부족으로 중단되기 전에 사민당 성향의 기자 헬쿠트 클로츠가 이를 언론에 공개하였고, 뚱뚱한 용병대장의 성적 취향은 곧 구설수에 올랐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322~323p
룀과 그 부하들이 거처하고 있는 바트 비스제의 한슬바우어 호텔에 도착했다. 그들은 어떤 저항에도 부딪히지 않고 호텔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앞에 선 히틀러는 승마 채찍을 휘둘렀고 그 뒤를 다른 자들이 따랐다. 그 중에는 히틀러가 룀의 방문을 열어젖히고 그가 체포되었다고 고함을 지를 때 바로 그의 옆에 붙어 있으려고 다리를 절며 앞으로 밀고 나가는 괴벨스도 있었다. 돌격대 참모장 룀은 잠에 취한 상태에서 "하일 퓌러"라고 응대했지만, 곧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히틀러는 다른 돌격대장들도 마찬가지로 다루었다. 그 과정에서 히틀러가 에트문트 하이네스의 방을 덮쳤을 때 그는 동성 애인과 함께 있었는데, 괴벨스는 이를 "역겹고 거의 구토를 일으키는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478p

10. 매체에서

  • '히틀러: 악의 탄생'에선 피터 스토메어가 역을 맡았다. 사실상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써, 초반에는 히틀러와 서로를 존경하면서[15] 나치당을 발전시키나, 결국 사이가 틀어져서 숙청당하고 만다.[16] 작중 히틀러는 룀에 대한 애증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빨리 처리하자는 괴벨스에게 화까지 내며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1] 당시에는 독일령이었으나 전후에는 프랑스에 넘겨졌다.[2] 이때 북독일의 돌격대 중 일부를 지휘하던 슈테네스가 히틀러의 방침에 반발하면서 돌격대가 흔들리자 당시 최고지도자였던 잘로몬 폰 페퍼를 해임하고 히틀러가 직접 돌격대 최고지도자를 겸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조직관리나 행정능력은 낮았다.[3] 이것은 꼭 낮춤말은 아니다. 관계의 상하가 아니라 멀고 친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에게도 du를 쓴다. 이것과 대비되는 Sie(당신)은 공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 결과적으로 히틀러를 du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친구처럼 매우 친한 관계였다는 의미이다.[4] 겉보기에는 나치당의 상징색처럼 갈색이지만, 그 속은 공산주의자와 같이 붉은색.[5] 이때 룀이 히틀러를 공개비판했다고 밀고한 빅토어 루체는 장검의 밤 이후 돌격대 참모장이 되는 것으로 보답받았다.[6] 재미있게도 이러한 군조직 관념은 19세기 독일내 진보진영이 이상시하던 민병대의 관념을 받아들인 것이며, 무장친위대 또한 이러한 사상적 영향 아래에서 형성될 수 있었다.[7] 에른스트 룀은 동성애자였고 자신의 성적 지향을 감추지 않았다.[8] SA는 분명 문제가 많았지만 나치당과 히틀러가 힘을 키우는 과정에선 도움을 준 공신이었고, 그들을 숙청하면 자기 힘이 약해지는데 그 대가로 국방부가 자신을 확실히 지지해줄지도 불확실했기에 고민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이후의 행적들을 봐도 스탈린과는 달리 주변인들을 숙청하는걸 선호하지 않았다. 괴링이나 힘러가 온갖 월권과 파벌화를 저지르고 다녀도 히틀러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종전 직전에 그들이 명백하게 자신을 배신했다는 증거가 드러난 이후에야 분노를 표출하며 처벌하려 했다.[9] 히틀러는 이제까지의 벗이었던 룀에 대해 너(Du)란 2인칭 용어를 사용했다.[10] 당시 룀은 히틀러에게 '너'(Du)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 일부러 그러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슬슬 괴벨스와 괴링을 위시한 측근들이 히틀러를 '총통 각하'라고 부르기 시작하던 때였으나 룀은 히틀러를 총통이라고 부르는 일이 드물었다.[11] 앞서 쏜 두 발과 달리 이 최후의 부분에서는 쏜 게 아이케였는지 리페르트였는지가 확실하지 않다. 이언 커쇼의 히틀러 평전에서는 둘이 같이 쏘았다고 보았다.[12] 외교관과 일반 시민들까지 함부로 두들겨패는 돌격대의 과격한 행동 때문에 나치당원들조차 '저런 짓은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에게 해야지 왜 엉뚱한 사람들에게 하는 거지?' 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13] 히틀러: 악의 탄생에서는, 심지어 막판에 체포당할 때도 젊은 남자 애인 두 명이랑 벌거벗고 침대 위에서 성관계 중이던 것으로 묘사되나, 이 일화는 룀이 아니라, 다른 돌격대 간부인 하이네스의 일화이다. 룀은 체포당할때 그냥 자고 있었다.[14] 타블로이드지에서 룀의 진료기록을 빼돌렸는데 "난 여자들이 더럽고 성적으로도 관심없는데 자꾸 여자들이 나를 귀찮게 한다."라는 내용이 있었다.[15] 히틀러는 옛 상관인 룀이 공산당을 물리치고 자신을 지지해주자 진심으로 감동하며, 룀은 히틀러의 연설과 비전에 크게 감명받는다.[16] 감방에서 나치식 경례를 하며 총통 만세!라고 외치고 처형된다.[17] 진짜로 유진을 보며 '츄릅'거린다.